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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가사는 비빔입니다. 비빔, 비빔, 비비빔, 비벼 주세요! 세계를 비빈다는 마음으로! 더 열정적으로 비벼 주세요!"(<흑백 요리사> 중) 평범한 비빔밥 아저씨는 <흑백 요리사> 출연 이후부터 인생이 뒤바뀌었다. 주말 웨이팅 두 시간은 기본, "지금 가면 유비빔 씨 볼 수 있어요?" 문의까지 이어지고 있다. 유비빔 씨의 인생을 바꾼 <흑백 요리사>의 뒷이야기를 들어봤다. 비빔밥 말고도 후식도 준비하셨었다고요? "남들과 다르게 하고 싶어서 비빔 커피를 준비했었습니다. 나름 후식을 준비했던 거죠. 우리가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서도 따로 후식으로 커피를 먹기 때문에 비빔밥에 맞춰 비빔 커피를 선보였죠. 영상에서는 편집 됐는데 이후에 다시 악수를 청하길래 '아, 불합격을 번복하려나 보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바로 또 탈락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주 화끈하게 탈락했죠. 두 번 떨어진 거니까 제가 최다 탈락자일 겁니다." 심사위원 백종원이 비빔송에 맞춰 밥을 비비고 악수를 청했는데요. 합격인 줄 알았나요? "어떻게 알았어요. 백종원 선생님이 악수를 딱 청하는 순간 속으로 '아싸!' 외쳤습니다. 보통 악수는 합격이나 긍정적인 메시지가 있어서 청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웃으시면서 악수를 청하시고 "탈락입니다! 너무 짜요!" 했을 때 주저앉았습니다. 당연히 합격인 줄 알았으니까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어요.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음식과 음악을 적절히 비볐는데 떨어졌죠." 만약 백종원 심사위원이 아니라 안성재 쉐프에게 심사받았다면 합격했을까요? "한국 음식은 결국 비비는 것입니다. 삼겹살 집에만 가더라도 보통 다 먹고 '여기 밥 비벼 주세요!' 하잖아요. 모든 게 비빔으로 마무리된다는 의미입니다. 2002년 월드컵 때에도 모르는 사람끼리 몸을 부딪치고 비볐어요. 결국 한국인에게는 비빔의 DNA가 있다는 말입니다. 안성재 쉐프도 비빔 DNA가 있으니까 안 비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백종원 심사위원과 마찬가지로 막 비볐을 테지만 합격 여부는 잘 모르겠어요." 또 다른 출연자 에드워드 리가 비빔밥을 선보였는데요. 밥을 미리 비벼서 비빔밥을 만들었죠. 안성재 쉐프는 비벼 먹지 않으면 비빔밥이 아니라고 했었는데요. 비빔밥이 맞나요, 아닌가요? "에드워드 리는 사실 한국인이지만 미국에서 살았어요. 미국에 있으면서 비빔의 DNA가 그리웠던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본 뿌리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본인을 비빔 인간으로 고백했잖아요. 그분이 만든 음식은 비빔밥이 맞습니다. 인생이 비벼져 있기 때문입니다. 비빔 철학을 가져온 것만으로도 비빔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문채연 수습기자
넷플릭스 첫 한국 요리 서바이벌 <흑백 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방영 이후 연일 화제가 되는 인물이 있다. 전주에서 식당 '비빔소리'를 운영하는 유비빔(60) 씨다. 당시 비빔에 대한 남다른 철학과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눈길을 끌었다. 실상 출연한 것은 2분밖에 되지 않지만 빨간 곤룡포에 관모까지 쓰고 나와 드럼을 치며 심사위원 백종원과 비빔송을 불렀다. "너무 짜요!"라는 한 마디 심사평을 듣고 바로 탈락하면서 화제의 인물이 됐다. 유 씨가 걸어온 길은 마냥 재미있지는 않다. 40여 년간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비빔과 소리에 몰두한 사연은 무엇일까. 평범한 비빔밥 아저씨에서 비빔대왕이 된 유 씨를 만났다. 세계를 비비려고 태어난 사람! 전주의 비빔대왕! 유비빔입니다! 비빔! 인사마저 '비빔'으로 통일한 유비빔 씨를 만나기 위해 그가 운영하는 식당 '비빔소리'를 찾았다. 식당 입구에서부터 비빔을 향한 그의 사랑이 느껴졌다. 입구에는 '전부 비비자!'는 사훈(?)이 있고 조명이며 벽, 심지어 문고리와 화장지에까지 '비빔'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가게 한 편에는 비빔에 대해 연구하는 비빔소리 연구소가 마련돼 있을 정도다. 식당에서 만난 유 씨는 <흑백 요리사> 속 모습 그대로였다. 경례를 올리며 "세계를 비비려고 태어났다!"고 외치는 모습에서는 힘과 박력, 비빔에 대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나만의 소리를 찾다가 '비빔'을 만나게 됐어요. 오직 비빔 인생을 걸었을 것 같은 유 씨의 마음속에도 꿈이 있었다. 소리를 좋아했던 유 씨는 음악가를 꿈꾸며 20대 중반까지 클럽 밤무대에서 악사 생활을 했다. 그의 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저물었다. 어릴 적 오른쪽 청력을 잃어 남들보다 10배, 100배, 1000배 연습하며 꿈을 꿨지만 극복하기는 쉽지 않았다. 연주하며 계속해서 박자가 밀리기 시작한 것을 눈치 챈 유 씨는 다른 일을 찾아 나섰다. 전북대 앞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하면서 미용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음악은 포기했지만 예술은 포기할 수 없었다. 아내와 함께 미용실을 운영해 보기도 했지만 유 씨의 가슴은 뛰지 않았다. 그러던 중 타악기의 대가로 불리는 고 김대환 음악가를 만나게 됐다. 박자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김대환 음악가의 연주에 매료돼 10여 년을 그 밑에서 음악을 배웠다. 스승은 유 씨에게 "앞으로 소리의 시대가 올 거야. 너만의 소리를 찾아야 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유 씨에게 비빔의 세계가 열렸다. "나만의 소리를 찾으려고 소리의 근원부터 돌아봤죠. 문득 '비빔'이 떠올랐어요. 선생님이 돌아가신 2004년쯤 퓨전 음식이 유행하고 팝페라가 등장하는 등 경계가 무너지고 있었거든요. 그것도 비빔의 일환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소리와 음식이 어우러지는 지금의 식당 '비빔소리'를 열게 된 계기다. 음식 솜씨가 좋고 남에게 맛있는 음식 해 주는 것을 좋아하는 유 씨의 아내는 음식을 만들고, 소리를 좋아하는 유 씨는 손님을 위한 공연을 하기로 했다. 비빔 앞에서는 가슴이 뛰고 무장해제가 돼요.유 씨는 식당 문을 열고 다시 소리를 할 수 있게 됐다. 식당 한가운데 드럼을 놓게 된 것에도 나름의 계획(?)과 이유가 있었다. <흑백 요리사> 방영 이후 식당 앞에 보통 주말에 두 시간을 줄 서는 것이 기본이 됐다. 적게는 100명, 많게는 200명까지도 서는 것을 보며 유 씨는 고민이 많아졌다. 당시 날이 더워 손님을 기다리게 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차단막이 있는 야외 식사 장소 일부를 대기석으로 바꿨다. 사흘 동안 빠른 순환을 위해 음식 만드는 데 속도를 냈지만 유 씨는 손님들의 방문 목적을 깨닫게 됐다. 그는 "단순히 비빔밥이 드시고 싶은 게 아니었다. 나랑 인증 사진을 찍고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연주를 직접 들어보고 싶어 왔던 거였다"고 했다. 그때부터 대기석 중앙에 드럼을 놓고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비빔악장'을 연주했다. 드보르작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4악장 선율에 비빔을 반복하는 가사를 붙인 자작곡이다. 실제로 손님들은 유 씨가 연주할 때마다 촬영하기 바빴다. 유 씨의 퍼포먼스가 끝나면 비빔밥이 나온다. 비빔이 소리도 되고 맛이 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유 씨에게 비빔은 기쁨이자 철학이 됐다. 묘비에 '나는 죽지 않았다'고 쓰려고요. 철학자는 육신이 죽어도 철학은 남잖아요. 제게는 비빔이 철학이에요. 유 씨는 비빔과 만물을 연결시켰다. 본인이 세계를 비비려고 태어난 사람이라는 게 유 씨의 말이다. 그에 걸맞은 일명 '비빔 경제학'까지 정립하며 탄탄한 철학을 갖춰가고 있다. 비빔 경제학은 나 혼자 잘 살자는 것의 반대다. 비빔밥을 비비듯 공동체가 화합하는 과정 속 정이 비벼지며 시너지를 만들어 다 같이 잘 산다는 의미다. 최근 유 씨는 식당 한쪽에 추천 맛집 리스트를 걸어 뒀다. 보통 본인의 식당이 잘 되면 장땡인 경우가 많지만 그는 조금 달랐다. 전주에 있는 비빔밥을 비롯한 한식 맛집 10여 곳을 안내하고 아래에 "전주 모든 음식점이 맛집! 진짜 맛집은? 여러분의 어머니가 해 주시는 집밥"이라고 적었다. 주변과 함께 잘 되고 싶은 마음이 큰 유 씨다. 유 씨는 "비빔의 '비'를 영어로 쓰면 bee, 벌이다. 전주에 관광객이 벌떼처럼 와서 비빔밥을 먹고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다. 맛의 고장 전북, 전주에서 맛있고 신명 나게 비비고 가 주신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처음에 비빔소리 문을 열 때 공연도 하고 음식도 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0년 만에 소원이 이뤄졌다. 지금은 곤룡포를 입고 있지만 사실 평범한 비빔밥 아저씨였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주면서 공연도 할 수 있게 됐고 비빔대왕이 될 수 있었다"고 마무리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문채연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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