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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일가(一家), 이 사람] 손길환국악기연구소 손길환·손태백, 연구하며 몸으로 익힌 기술…40여년 외로운 길

처음 이야기의 시작은 '전북에 태평소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었다. 태평소라니, 낯익은 단어다. 초등학교에서 3년여 피리와 태평소를 배운 적이 있었다. 이십여 년 만에 다시 듣게 된 그 '태평소'라는 말에 귀가 쫑긋했다. 게다가 아버지에 이어 아들까지 대를 이어서 태평소를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에 더욱 관심이 생겼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태평소를 제작하는 곳이라는 이야기도 그때 들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그 수많은 '태평소'들은 무엇일까. 궁금증이 발걸음을 이끌었다. 우선, 태평소(太平簫)는 전통 관악기이자 국악기다. 나무로 만든 관에 여덟 개의 구멍을 뚫어, 아래 끝에는 깔때기 모양의 놋쇠를 달고, 부리에는 갈대로 만든 서를 끼워 분다. 농악이나 불교음악, 군중음악, 군영음악 등에 사용하는 악기 중 유일하게 선율을 연주하는 악기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서도 ‘태평소는 규격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음정과 음고가 일정하지 않다’고 적혀있다. 이 때문에 만드는 사람에 따라 분류가 달라지기도 하고, 표준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지난 6월 말 파란 여름 하늘에 해가 쨍쨍 내리쬐던 날. 전주에서 40여 분을 달려 정읍에 위치한 손길환 국악기 연구소를 찾았다. 손길환 소장(64)과 그의 맏아들이자 제자 손태백 대표(33). 유쾌한 사람. 첫인상이 그랬다. 취미로 시작한 일이 국내 유일 업(業)이 된 거죠. 언제나 그렇듯 시작이 궁금했다. 손 소장은 처음엔 취미였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전라도에서 내로라하는 목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무 다루는 일은 눈에 익었다. 풍물패 활동을 하던 부친의 모습을 보고 자라며 자연스럽게 태평소를 접했다. 나이가 들고 직장, 아파트, 동네까지 가는 곳마다 풍물패를 만들고 패장으로 활동하다 보니, 내 태평소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한 일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이제는 아들도 함께한다. 연구하고 제작하기 시작한 것만 따져도 40년은 족히 넘는 세월이다. 손 소장은 태평소가 눈에 띄는 악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만들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태평소를 전문적으로 제조하는 사람이 본인뿐이라는 것은 우연한 기회에 알게됐다. 지난 2018년 국립국악원이 '실내악용 태평소 특허기술'을 국악기 제작업체에 기술을 이전하면서다. 그곳이 손길환 국악기 연구소다. "우리보다 더 큰 곳들도 있을 텐데 왜 우리한테까지 왔을까 의문이었죠. 그런데 물어보니, 태평소 만드는 곳이 저희밖에 없대요." 국방부 군악대, 취타대나 국악원 등 태평소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손 씨의 태평소가 있다. 모양뿐 아니라 소리만 들어도 자신이 만든 것인지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태평소는 '비밀'이 많은 악기입니다 태평소에 대해 설명을 듣다 보니, 자꾸 중요한 것 한가지씩이 빠져있는 느낌이다. 어떤 나무로 만드는지, 어떤 과정을 어떻게 거치는지. 손 소장도 대답은 하지만 모호하게 말한다. 손 소장은 "악기에는 비밀이 많이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인터뷰도 그동안 하지 않은 이유가 비밀이 많아서라는 이야기다. 태평소 하나를 만들기 위한 공정은 셀 수가 없다. 아니, 셀 수 있다고 해도 기간이 짐작이 안된다. 우선 태평소를 떠올릴 때 기둥으로 볼 수 있는 '관'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나무만 생각해봐도 그렇다. 각진 나무 하나를 둥글게 깎아야 하고, 옻칠과 구멍을 뚫는 작업도 해야 한다. 이 과정들이 몇 번씩 반복되고, 나무 자체를 깎고 쪄서 말리는 과정도 1∼2년에 끝나지 않는다. 나무 하나가 태평소로 만들어지기까지 7∼8년은 족히 소요되는 셈이다. "누군가 태평소를 만드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좋을 텐데 아무리 물어봐도 없더라고요. 봉사 문고리 잡듯 힘들었습니다." 그 시행착오를 직접 부딪쳐가며 버텨왔다. 그래도 악기라는 게 나무는 특히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시간을 단축하려면 문제가 생기는 것. "나무는 기다려야한다는 겁니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량 생산 중국산 제품들이 손 씨의 제품을 따라올 수 없는 이유다. 아버지와 아들 3대, 숱한 실패에도 애정 가득 손 소장은 "(태평소는) 아버님께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한다. 부친은 집 짓는 목수였지만, 손 소장이 열 살 무렵 군산으로 이사한 이후에는 장롱이나 찬장도 만들고, 탁자도 만들며 분야를 넓혀갔다. 아버지 옆에서 '가리'라고 하는 나무 깎는 기계를 구르며 눈에 익혔던 것이 지금의 자산이 됐다. 고등학교를 익산으로 진학하며 잠시 멀어졌지만, 군산 한국유리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만든 풍물패 덕분에 태평소와 다시 접점을 이을 수 있었다. 도립국악원 소속 박지중 선생과도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지금의 태평소 기틀을 다졌다. 배우고 만들고, 연구했지만, '돈'은 안되다 보니 직장 생활도 꼬박 25년을 채웠다. 눈부시게 화려하지는 않았어도 끈기 있고 성실한 시간이었다. "아들은 제가 꼬셨어요. 아깝잖아요. 인생은 돈으로 사는 게 아니라고 계속 꼬셨죠. 중학생 때부터" 맏아들이자 제자인 손태백 대표의 이야기를 할 때면 애정이 뚝뚝 떨어진다. 큰아들인 태백 씨의 재능은 악기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연주에서 빛이 났다.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금세 예술고 학생들을 따라잡았고, 대학도 피리로 진학했다. 아들에 대한 말을 꺼낼때면 퉁명스럽게 이야기하지만, 하나하나 듣다 보면 어마어마한 칭찬들이다. "저한테는 없는걸 다 가지고 있어요. 음감도 있고, 욕심도 있고, 꼬라지도 있어서 대충하는 게 없어요. 검수할 때 마음에 안들면 하루 종일 붙들고 있습니다. 대충하는 법이 없거든요." 그래도 아들은 편할 거라 덧붙인다. 연구과정에서 얻은 숱한 실패들을 아버지인 본인이 했기 때문이다. 국악기는 참 외로운 분야입니다. 무척이나 아쉽죠. 아쉬운 것을 묻는 말에는 금방 답이 나온다. 연구소에서 만든 소책자에는 수상 경력도 쓰여 있는데, 가장 위에 있는 경력이 바로 '제1회 한국악기공모전 전통악기분야 차상(태평소)'이다. 그런데 공모전은 1회로 끝이었다고 한다. 국악기만 경쟁하는 곳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것. 전주 전통공예전국대전에서도 기타부문에서 동상과 장려상, 특성, 입선 등 수상을 하긴 했지만 국악기 부문이 아니라 기타 부문이다. 매듭, 인두화, 붓, 가죽, 유리, 캘리그래피 등이 함께 경쟁하는 부문이다. "전주라는 우리 지역에서 하는 전통공예전국대전이 그나마 전국에서 크죠. 2∼3년 간격으로라도 선을 보이고는 있습니다. 다만, 외롭죠. 기타 부문에서 악기를 두고 경쟁한다는 것이 아이러니 같습니다." 인연과 운명, 그리고 가족. 버틸 수 있게 해준 힘입니다. "어릴 땐 아버지 옆에서 돕는 게 참 지겨웠는데, 그런데 제가 어느 날 그걸 만들고 있더라고요. 이게 인연인가 싶기도 하고요." 손 소장은 모든 것이 '인연' 같다고 말하기도, '팔자'라고도 하며 섞어 부른다. 종교는 없지만 그런 마음으로 인생을 살려고 한다고 말한다. 앞으로의 목표와 같은, 상투적인 질문을 했더니, 금방 시큰둥한 말투로 바뀐다. "취미로 했고, 나이 들고도 돈이 되겠다고 해서 했지요. 악기 장인으로서 자부심 등 평생의 업으로 생각하고 그런 건 아닙니다. 하다 보니 이렇게 됐고요. 감사하게도 먹고사는데 지장은 없고요. 앞으로도 쭉 이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대답이 겸연쩍었는지 말하고 크게 웃는다. 그러면서 '가족' 이야기를 덧붙였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악기는 만들었지만, 제대로 팔리지 않았다. 공연도 사라지고, 입문하려는 사람들도 줄었기 때문. 통상적으로 1년에 150개에서 200개가 팔리지만 지난 2년여 동안에는 뚝 끊겨 굉장히 힘들었다. 하지만 지치지 않은 것은 가족과 악기. 이것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악기를 물려줄 수 있다는 생각이 크다. "내가 힘 있을 때 열심히 만들어놓으면 100년 뒤에도 내 악기를 사가는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저는 게을러질 수 없어요. 재미있어요. 100년 뒤 제 손주가 직업이 없더라도 제 악기를 팔 수는 있겠죠. 그때는 35만 원(지금은 30만 원 남짓이다)은 받지 않을까요." 끝으로 손 소장은 한마디를 덧붙인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뭐든지 30년 넘으면 좀 된다더라' 이거에요. 30년은 너무 기니까 눈 딱 감고 3년만 해보세요. 그러면 무엇이든 인생에 중요한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 기획
  • 천경석
  • 2022.07.03 17:46

[전북 일가(一家), 이 사람] 손길환국악기연구소 손길환·손태백

처음 이야기의 시작은 '전북에 태평소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었다. 태평소라니, 낯익은 단어다. 초등학교에서 3년여 피리와 태평소를 배운 적이 있었다. 이십여 년 만에 다시 듣게 된 그 '태평소'라는 말에 귀가 쫑긋했다. 게다가 아버지에 이어 아들까지 대를 이어서 태평소를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에 더욱 관심이 생겼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태평소를 제작하는 곳이라는 이야기도 그때 들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그 수많은 '태평소'들은 무엇일까. 궁금증이 발걸음을 이끌었다. 우선, 태평소(太平簫)는 전통 관악기이자 국악기다. 나무로 만든 관에 여덟 개의 구멍을 뚫어, 아래 끝에는 깔때기 모양의 놋쇠를 달고, 부리에는 갈대로 만든 서를 끼워 분다. 농악이나 불교음악, 군중음악, 군영음악 등에 사용하는 악기 중 유일하게 선율을 연주하는 악기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서도 ‘태평소는 규격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음정과 음고가 일정하지 않다’고 적혀있다. 이 때문에 만드는 사람에 따라 분류가 달라지기도 하고, 표준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지난 6월 말 파란 여름 하늘에 해가 쨍쨍 내리쬐던 날. 전주에서 40여 분을 달려 정읍에 위치한 손길환 국악기 연구소를 찾았다. 손길환 소장(64)과 그의 맏아들이자 제자 손태백 대표(33). 유쾌한 사람. 첫인상이 그랬다. △ 취미가 국내 유일 업(業)으로 언제나 그렇듯 시작이 궁금했다. 손 소장은 처음엔 취미였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전라도에서 내로라하는 목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무 다루는 일은 눈에 익었다. 풍물패 활동을 하던 부친의 모습을 보고 자라며 자연스럽게 태평소를 접했다. 나이가 들고 직장, 아파트, 동네까지 가는 곳마다 풍물패를 만들고 패장으로 활동하다 보니, 내 태평소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한 일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이제는 아들도 함께한다. 연구하고 제작하기 시작한 것만 따져도 40년은 족히 넘는 세월이다. 손 소장은 태평소가 눈에 띄는 악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만들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태평소를 전문적으로 제조하는 사람이 본인뿐이라는 것은 우연한 기회에 알게됐다. 지난 2018년 국립국악원이 '실내악용 태평소 특허기술'을 국악기 제작업체에 기술을 이전하면서다. 그곳이 손길환 국악기 연구소다. "우리보다 더 큰 곳들도 있을 텐데 왜 우리한테까지 왔을까 의문이었죠. 그런데 물어보니, 태평소 만드는 곳이 저희밖에 없대요." 국방부 군악대, 취타대나 국악원 등 태평소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손 씨의 태평소가 있다. 모양뿐 아니라 소리만 들어도 자신이 만든 것인지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 '비밀'이 많은 악기 태평소에 대해 설명을 듣다 보니, 자꾸 중요한 것 한가지씩이 빠져있는 느낌이다. 어떤 나무로 만드는지, 어떤 과정을 어떻게 거치는지. 손 소장도 대답은 하지만 모호하게 말한다. 손 소장은 "악기에는 비밀이 많이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인터뷰도 그동안 하지 않은 이유가 비밀이 많아서라는 이야기다. 태평소 하나를 만들기 위한 공정은 셀 수가 없다. 아니, 셀 수 있다고 해도 기간이 짐작이 안된다. 우선 태평소를 떠올릴 때 기둥으로 볼 수 있는 '관'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나무만 생각해봐도 그렇다. 각진 나무 하나를 둥글게 깎아야 하고, 옻칠과 구멍을 뚫는 작업도 해야 한다. 이 과정들이 몇 번씩 반복되고, 나무 자체를 깎고 쪄서 말리는 과정도 1∼2년에 끝나지 않는다. 나무 하나가 태평소로 만들어지기까지 7∼8년은 족히 소요되는 셈이다. "누군가 태평소를 만드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좋을 텐데 아무리 물어봐도 없더라고요. 봉사 문고리 잡듯 힘들었습니다." 그 시행착오를 직접 부딪쳐가며 버텨왔다. 그래도 악기라는 게 나무는 특히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시간을 단축하려면 문제가 생기는 것. "나무는 기다려야한다는 겁니다." 대량 생산하는 중국산 제품들이 손 씨의 제품을 따라올 수 없는 이유다. △아버지와 아들 3대 손 소장은 "(태평소는) 아버님께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한다. 부친은 집 짓는 목수였지만, 손 소장이 열 살 무렵 군산으로 이사한 이후에는 장롱이나 찬장도 만들고, 탁자도 만들며 분야를 넓혀갔다. 아버지 옆에서 '가리'라고 하는 나무 깎는 기계를 구르며 눈에 익혔던 것이 지금의 자산이 됐다. 고등학교를 익산으로 진학하며 잠시 멀어졌지만, 군산 한국유리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만든 풍물패 덕분에 태평소와 다시 접점을 이을 수 있었다. 도립국악원 소속 박지중 선생과도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지금의 태평소 기틀을 다졌다. 배우고 만들고, 연구했지만, '돈'은 안되다 보니 직장 생활도 꼬박 25년을 채웠다. 눈부시게 화려하지는 않았어도 끈기 있고 성실한 시간이었다. "아들은 제가 꼬셨어요. 아깝잖아요. 인생은 돈으로 사는 게 아니라고 계속 꼬셨죠. 중학생 때부터" 맏아들이자 제자인 손태백 대표의 이야기를 할 때면 애정이 뚝뚝 떨어진다. 큰아들인 태백 씨의 재능은 악기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연주에서 빛이 났다.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금세 예술고 학생들을 따라 잡았고, 대학도 피리로 진학했다. 아들에 대한 이야기에는 퉁명스럽게 이야기하지만, 하나하나 듣다 보면 어마어마한 칭찬들이다. "저한테는 없는걸 다 가지고 있어요. 음감도 있고, 욕심도 있고, 꼬라지도 있어서 대충하는 게 없어요. 검수할 때 마음에 안들면 하루 종일 붙들고 있습니다. 대충하는 법이 없거든요." 그래도 아들은 편할거라 덧붙인다. 연구과정에서 얻은 숱한 실패들을 아버지인 본인이 했기 때문이다. △국악기는 참 외로운 분야 아쉬운 것을 묻는 말에는 금방 답이 나온다. 연구소에서 만든 소책자에는 수상 경력도 쓰여 있는데, 가장 위에 있는 경력이 바로 '제1회 한국악기공모전 전통악기분야 차상(태평소)'이다. 그런데 공모전은 1회로 끝이었다고 한다. 국악기만 경쟁하는 곳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것. 전주 전통공예전국대전에서도 기타부문에서 동상과 장려상, 특성, 입선 등 수상을 하긴 했지만 국악기 부문이 아니라 기타 부문이다. 매듭, 인두화, 붓, 가죽, 유리, 캘리그래피 등이 함께 경쟁하는 부문이다. "전주라는 우리 지역에서 하는 전통공예전국대전이 그나마 전국에서 크죠. 2∼3년 간격으로라도 선을 보이고는 있습니다. 다만, 외롭죠. 기타 부문에서 악기를 두고 경쟁한다는 것이 아이러니 같습니다." △인연과 운명, 그리고 가족 "어릴 땐 아버지 옆에서 돕는 게 참 지겨웠는데, 그런데 제가 어느 날 그걸 만들고 있더라고요. 이게 인연인가 싶기도 하고요." 손 소장은 모든 것이 '인연' 같다고 말하기도, '팔자'라고도 하며 섞어 부른다. 종교는 없지만 그런 마음으로 인생을 살려고 한다고 말한다. 앞으로의 목표와 같은, 상투적인 질문을 했더니, 금방 시큰둥한 말투로 바뀐다. "취미로 했고, 나이 들고도 돈이 되겠다고 해서 했지요. 악기 장인으로서 자부심 등 평생의 업으로 생각하고 그런 건 아닙니다. 하다 보니 이렇게 됐고요. 감사하게도 먹고사는데 지장은 없고요. 앞으로도 쭉 이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대답이 겸연쩍었는지 말하고 크게 웃는다. 그러면서 '가족' 이야기를 덧붙였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악기는 만들었지만, 제대로 팔리지 않았다. 공연도 사라지고, 입문하려는 사람들도 줄었기 때문. 통상적으로 1년에 150개에서 200개가 팔리지만 지난 2년여 동안에는 뚝 끊겨 굉장히 힘들었다. 하지만 지치지 않은 것은 가족과 악기. 이것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악기를 물려줄 수 있다는 생각이 크다. "내가 힘 있을 때 열심히 만들어놓으면 100년 뒤에도 내 악기를 사가는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저는 게을러질 수 없어요. 재미있어요. 100년 뒤 제 손주가 직업이 없더라도 제 악기를 팔 수는 있겠죠. 그때는 35만 원(지금은 30만 원 남짓이다)은 받지 않을까요." 끝으로 손 소장은 한마디를 덧붙인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뭐든지 30년 넘으면 좀 된다더라' 이거에요. 30년은 너무 기니까 눈 딱 감고 3년만 해보세요. 그러면 무엇이든 인생에 중요한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천경석 기자

  • 기획
  • 천경석
  • 2022.07.03 17:14

[전북 일가(一家), 이 사람] 천일제지 이용제 대표 "성실이 최선"…엄격한 아버지 대 이어 제지의 길로

천일제지㈜에 관심이 생긴 것은 단순했다. 지난 3월 천일제지㈜ 이용제 대표(61)가 전주시 명예시민이 됐다는 소식을 들은 후였다. 지난해 전주시 우수향토기업으로 선정됐다는 기사를 쓴 기억도 어렴풋이 스쳤다. 1987년 문을 열었다고 하니 35년 동안 제지업 한길을 걸어왔다. 대표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진 것은 호기심이 시작었다. 명예시민이라는 말을 묻자 단순 주소는 서울이지만, 생활권은 전주라고 했다. 전주와 서울에 거주하며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전주, 목요일과 금요일은 서울 사무소에서 일한다. 오는 5월 1일 회사 창립 35주년을 맞는다. 지난 3월 말, 그리고 4월 들어 다시 한번 두 차례에 걸쳐 이용제 대표를 만났다. 천일제지를 설명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붙었고, 향후 기업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는 조심스럽지만, 자부심도 느껴졌다. 용어가 낯설죠? 그래도 모든 것들이 우리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된 것들입니다. 실제로 그랬다.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제품 이름들이 낯설었다. 지관 원지와 합지, 고평량 원지 등 평소 들어보기 어려운 용어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우선 지관 원지는 화학섬유, 필름, 면사 등을 감는 데 사용하는 종이관의 원지다.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니 휴지심이 떠올랐다. 다만, 지관원지에 감기는 제품들이 다른 것이었다. 합지는 우리 생활에서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여러 장을 합쳐 두꺼운 제품으로 만드는 기술이 들어간다. 이렇게 생산된 제품으로 삼성전자의 휴대전화 케이스, 달력 용지, 앨범용 마분지 등을 만드는 데 활용된다. 특히 방탄소년단의 음반 CD, DVD, USB 케이스 제작에도 천일제지에서 만든 제품이 사용됐다. 공업용 방직용 합지 원지생산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은 천일제지㈜ 밖에 없다는 설명을 할 때는 자부심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마음속 첫 번째 고향을 꼽으라면 '전주'라고 할 겁니다. 천일제지의 창업주는 이 대표의 선친(先親)인 이점호 대표다. 제지생산업계에서 오랫동안 잔뼈가 굵은 선친이 서울, 천안 공장을 정리하면서 물 좋고 공기 좋은 전주에서 공장 부지를 물색하다 ‘경성제지’를 인수하고 팔복동에 제1공장을 설립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 대표 선친의 고향은 경남 마산이지만 모친의 고향이 김제로, 선친이 김제에 오갈 때 전주를 보고 제지공장으로 최적이라 생각한 것도 자리 잡게 된 이유다. 1987년 전주 팔복동 현 부지에 1공장을 설립했고, 2000년대까지 2공장 설립과 2, 3호기 증설 등 규모를 키워갔다. 이용제 대표는 지난 2012년 3월 제2대 대표로 취임했다. 현재 천일제지에서 생산하는 공업용 지관과 산업용 원지는 연간 18만여 톤. 최근에는 친환경 표지 소재 개발로 제품 검수가 까다롭다는 삼성전자 휴대폰 케이스를 만드는 데에도 납품하고, 출판사 아동 책자 제작 등에도 사용하면서 제품 우수성도 인정받았다. 이 대표는 매주 전주와 서울로 오가는 바쁜 일상이지만, 늘 마음은 전주에 있다고 말한다. 기업이 이만큼 성장하고, 직원들과 할 수 있는 것은 전주의 물과 땅뿐만 아니라, 지역 사람들의 성원과 도움도 컸다는 감사의 표현이었다. 국내보다 세계에서 더 유명해요. 수출도 차츰 늘릴 계획입니다. 천일제지는 지난 2018년 500만불 수출의 탑 수상이나 2019년 산업통상자원부장관상, 2021년에는 환경부장관상 등을 수상하는 등 지관 및 합지업계 대표주자로 공인받은 기업이다. 하지만 이 대표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주목받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 대표는 전 세계를 무대로 수출을 해보니 고품질의 지관원지 생산을 하는 곳은 "우리 한 곳"이라 말한다. 국내에서는 유수의 기업들이 함께 제지업에 나서기 때문에 차이가 크지 않지만, 해외에서는 천일제지의 제품을 더 알아준다고 강조한다. 코로나19 여파로 최근 내수와 수출 비중이 9대1 정도로 줄었지만, 향후 6대4까지는 늘릴 계획이다. 실제로 연간 제품 18만여 톤을 생산하고 있고, 우수한 제품이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해외 각 나라에서 주문이 밀려오지만, 물가 인상과 코로나19로 선적 운송비가 올라 수출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세계 무대를 상대로 "가능성을 봤다"고 말하는 이 대표는 가격을 떠나 물건을 달라는 곳도 많고, 특히 입소문이 나면서 천일제지의 위상도 올라갔다고 평가한다. 좋은 것을 쓰자는 인식이 늘었다는 설명이다. 변화해야죠. 저희가 생산량이 많은 곳은 아닙니다. 품질을 더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란 확신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제지업은 사양산업으로 꼽힌다. 이 대표에 따르면 국내에서도 곧 제지산업의 쇠퇴가 더욱 빨라질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이 대표는 "자신있다"고 말한다. 천일제지의 경우 산업용 지관을 생산하는 곳으로, 생산량을 늘리기보다는 품질을 높이는 데 더 힘쓰고 있다. 지난 코로나19 상황에 박스나 골판지 등의 수요가 늘면서 생산 설비를 증설한 곳들은 최근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대표는 "우리는 수량을 줄이는 대신에 품질을 높이도록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특히 천일제지의 장비는 작은 축에 속한다고 한다. '단폭'이라고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생산량은 적을 수 있어도 다양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대표는 "업계가 어려워질수록 우리 제품은 살아남는다는 자신감이 있다"고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제품이 세계 최고⋯ "직원들과 나누고 싶다" 이용제 대표(61)는 지난 2012년부터 현재까지 천일제지(주)의 총괄 대표이사를 맡아오며 전북애향운동본부 기업특별대상, 전라북도지사 표창, 오백만불 수출의 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같은 대외적인 성과들이야 드러난 것들이고, 개인적인 삶이 궁금했다. 어린시절 기억을 물으니 아버지 이야기부터 나온다. 특히 '엄격한 아버지'였다고 말한다. 밤늦게 들어오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고, 저녁 식사는 가족들과 해야 했다. 친구들로부터 원망을 사기도 했지만,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싫지 않았다. 무일푼으로 사업을 시작해 기업을 꾸린 아버지를 보며 꿈을 키워갔다. 중앙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하기 전 1년 동안 자유롭게 지낸 것이 인생의 유일한 일탈이었다. 그만큼 성실하게 살려고 애썼다는 설명이다. 천일제지에는 10년, 20년, 30년 이상 근무한 장기근속자가 많다는 것도 이 대표가 자랑하는 것 중 하나다. 200명가량의 직원 중에서 30년 이상 근속자가 10명이 넘는다. 대를 이어 근무하는 직원들도 있다. 이 대표는 "주변에서 ‘장기근속자가 많아 회사가 망한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절대 동의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능력은 큰 차이가 아니고, 함께 하는 게 중요하다는 지론이다. 오래된 인연들과 같이 가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 기업이 잘되면 직원들과 같이 나누는 것도 신념이다. 이 대표는 세계 최고 제품이라고 하면 국내에서는 반도체를 많이 떠올리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천일제지의 제품이 세계 최고'라고 말한다. 이 대표는 지난 35년의 세월보다 앞으로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 기획
  • 천경석
  • 2022.04.24 17:36

[전북 일가(一家), 이 사람] 천일제지 이용제 대표

천일제지㈜에 관심이 생긴 것은 단순했다. 지난 3월 천일제지㈜ 이용제 대표(61)가 전주시명예시민이 됐다는 소식을 들은 후였다. 지난해 전주시 우수향토기업으로 선정됐다는 기사를 쓴 기억도 어렴풋이 스쳤다. 1987년 문을 열었다고 하니 35년 동안 제지업 한길을 걸어왔다. 대표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진 것은 호기심이었다. 명예시민이라는 말을 묻자 단순 주소는 서울이지만, 생활권은 전주라고 했다. 전주와 서울에 거주하며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전주, 목요일과 금요일은 서울 사무소에서 일한다. 오는 5월 1일 회사 창립 35주년을 맞는다. 지난 3월 말, 그리고 4월 들어 다시 한번 두 차례에 걸쳐 이용제 대표를 만났다. 천일제지를 설명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붙었고, 향후 기업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는 조심스럽지만, 자부심도 느껴졌다. 용어가 낯설죠? 그래도 모든 것들이 우리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된 것들입니다. 실제로 그랬다.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제품 이름들이 낯설었다. 지관 원지와 합지, 고평량 원지 등 평소 들어보기 어려운 용어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우선 지관원지는 화학섬유, 필름, 면사 등을 감는 데 사용하는 종이관의 원지다.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니 휴지심이 떠올랐다. 다만, 지관원지에 감기는 제품들이 다른 것이었다. 합지는 우리 생활에서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여러 장을 합쳐 두꺼운 제품으로 만드는 기술이 들어간다. 이렇게 생산된 제품으로 삼성전자의 휴대전화 케이스, 달력 용지, 앨범용 마분지 등을 만드는 데 활용된다. 특히 방탄소년단의 음반 CD, DVD, USB 케이스 제작에도 천일제지에서 만든 제품이 사용됐다. 공업용 방직용 합지 원지생산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은 천일제지㈜ 밖에 없다는 설명을 할 때는 자부심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마음속 첫 번째 고향을 꼽으라면 '전주'라고 할 겁니다.천일제지의 창업주는 이 대표의 선친(先親)인 이점호 대표다. 제지생산업계에서 오랫동안 잔뼈가 굵은 선친이 서울, 천안 공장을 정리하면서 물 좋고 공기 좋은 전주에서 공장 부지를 물색하다 ‘경성제지’를 인수하고 팔복동에 제1공장을 설립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 대표 선친의 고향은 경남 마산이지만 모친의 고향이 김제로, 선친이 김제에 오갈 때 전주를 보고 제지공장으로 최적이라 생각한 것도 자리를 잡게 된 이유다. 1987년 전주 팔복동 현 부지에 1공장을 설립했고, 2000년대까지 2공장 설립과 2, 3호기 증설 등 규모를 키워갔다. 이용제 대표는 지난 2012년 3월 제2대 대표로 취임했다. 현재 천일제지에서 생산하는 공업용 지관과 산업용 원지는 연간 18만여 톤. 최근에는 친환경 표지 소재 개발로 제품 검수가 까다롭다는 삼성전자 휴대폰 케이스를 만드는 데에도 납품하고, 출판사 아동 책자 제작 등에도 사용하면서 제품 우수성도 인정받았다. 이 대표는 매주 전주와 서울로 오가는 바쁜 일상이지만, 늘 마음은 전주에 있다고 말한다. 기업이 이만큼 성장하고, 직원들과 할 수 있는 것은 전주의 물과 땅뿐만 아니라, 지역 사람들의 성원과 도움도 컸다는 감사의 표현이었다. 국내보다 세계에서 더 유명해요. 수출도 차츰 늘릴 계획입니다. 천일제지는 지난 2018년 500만불 수출의 탑 수상이나 2019년 산업통상자원부장관상, 2021년에는 환경부장관상 등을 수상하는 등 지관 및 합지업계 대표주자로 공인받은 기업이다. 하지만 이 대표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주목받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 대표는 전 세계를 무대로 수출을 해보니 고품질의 지관원지 생산을 하는 곳은 "우리 한 곳"이라 말한다. 국내에서는 유수의 기업들이 함께 제지업에 나서기 때문에 차이가 크지 않지만, 해외에서는 천일제지의 제품을 더 알아준다고 강조한다. 코로나19 여파로 최근 내수와 수출 비중이 9대1 정도로 줄었지만, 향후 6대4까지는 늘릴 계획이다. 실제로 연간 제품 18만여 톤을 생산하고 있고, 제품이 우수하다는 평가여서 외국 각 나라에서 주문이 밀려오지만, 물가 인상과 코로나19로 선적 운송비가 너무 올라 수출에 치중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 무대를 상대로 "가능성을 봤다"고 말하는 이대표는 가격을 떠나 물건을 달라는 곳도 많고, 특히 입소문이 나면서 천일제지의 위상도 올라갔다고 평가한다. 좋은 것을 쓰자는 인식이 늘었다는 설명이다. 변화해야죠. 저희가 생산량이 많은 곳은 아닙니다. 품질을 더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란 확신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제지업은 사양산업으로 꼽힌다. 이 대표에 따르면 국내에서도 곧 제지산업의 쇠퇴가 더욱 빨라질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자신있다"고 말한다. 천일제지의 경우 산업용 지관을 생산하는 곳으로, 생산량을 늘리기보다는 품질을 높이는 데 더 힘쓰고 있다. 지난 코로나19 상황에 박스나 골판지 등의 수요가 늘면서 생산 설비를 증설한 곳들은 최근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대표는 "우리는 수량을 줄이는 대신에 품질 높이도록 연구를 많이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특히 천일제지의 장비는 작은 축에 속한다고 한다. '단폭'이라고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생산량은 적을 수 있어도 다양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대표는 "업계가 어려워질수록 우리 제품은 살아남는다는 자신감이 있다"고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제품이 세계 최고⋯ "직원들과 나누고 싶다" 이용제 대표(61)는 지난 2012년부터 현재까지 천일제지(주)의 총괄 대표이사를 맡아오며 전북애향운동본부 기업특별대상, 전라북도지사 표창, 오백만불 수출의 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같은 대외적인 성과들이야 드러난 것들이고, 개인적인 삶이 궁금했다. 어린시절 기억을 물으니 아버지 이야기부터 나온다. 특히 '엄격한 아버지'였다고 말한다. 밤늦게 들어오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고, 저녁 식사는 가족들과 해야 했다. 친구들로부터 원망을 사기도 했지만,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싫지 않았다. 무일푼으로 사업을 시작해 기업을 꾸린 아버지를 보며 생각을 키워갔고, 중앙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하기 전 1년 동안 자유롭게 지낸 것이 인생의 유일한 일탈이었다. 그만큼 성실하게 살려고 애썼다는 설명이다. 천일제지에는 10년, 20년, 30년 이상 근무한 장기근속자가 많다는 것도 이 대표가 자랑하는 것 중 하나다. 200명가량의 직원 중에서 30년 이상 근속자가 10명이 넘는다. 대를 이어 근무하는 직원들도 있다. 이 대표는 "주변에서 ‘장기근속자가 많아 회사가 망한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절대 동의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능력은 큰 차이가 아니다. 함께 하는 게 중요하다. 오래된 인연들과 같이 가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기업이 잘되면 직원들과 같이 나누는 것이 신념이다. 이 대표는 세계 최고 제품이라고 하면 반도체를 많이 떠올리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천일제지의 제품이 세계 최고'라고 말한다. 이 대표는 지난 35년의 세월보다 앞으로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천경석 기자

  • 기획
  • 천경석
  • 2022.04.24 15:28

[전북 일가(一家), 이 사람] 빈타이 강신석 대표 "커피 하는 사람입니다"

"빈타이 들어보셨나요?" 몇 해 전 누군가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때 들은 말이다. 물론 당시에도 익히 들어본 이름이었고, 바로 '그' 빈타이에서 커피를 마시던 참이었다. 빈타이가 지역 사람들에게는 '전북의 스타벅스'로 불린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들었다. 최근 인터뷰를 해봐야겠다고 다시 마음먹은 것도 부여 롯데아울렛에서 빈타이를 본 직후였다. 전북 지역이 아닌 곳에서 처음 본 매장이었다. 하지만 막막했다. 인터넷을 찾아보아도 이상할 만큼 나오는 것이 별로 없다. 흔한 홍보성 기사는 물론이고 대표와 관련된 정보는 찾기 더욱 어려웠다. 그러던 중 지난해 나온 작은 기사 하나를 계기로 대표와 간신히 연락이 닿았다. 첫 통화에서 그는 웬만하면 외부 노출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정말 인터뷰를 꺼리는 분이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다만 우리 지역(전북) 매체이기도 하고, 이번에는(인터뷰) 해보려고 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쁜 마음으로 곧장 약속을 잡았다. 3월 말. 전주 호성동 빈타이 본점에서 강신석 대표(42)를 만났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시각. 가장 여유 있는 시간이라고 했지만, 강 대표는 로스팅이 한창이었다. 각 매장에 원두를 납품하기 위해 오전에 출근해 오후 3시까지 본점 로스터리에서 직접 로스팅한다. 인터뷰 내내 강 대표의 전화는 수없이 울렸고, 그를 찾는 방문객도 끊임없었다. 직접 만나본 그는, 순박해 보이는 웃음 사이로 진지함이 비쳤다. 커피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커피가 좋았어요 첫 시작은 라테 아트 사진 한 장이다. 사진을 본 순간부터 커피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부지런히 영상을 찾아보고 마침 일하던 레스토랑에 있던 커피 머신으로 한 시간 일찍 출근해 커피 내리는 연습을 했다. 커피에 대한 갈증은 커져만 갔고, 수소문한 끝에 강남에 바리스타 학원을 찾았다. 2006년. 전문적인 커피 교육이 대중화된 때는 아니었다. 40명이 넘는 수강생 가운데 지방 출신은 강 대표 한 명뿐. 그만큼 행복했고, 절실했다. 2008년 20대 중반의 나이로 창업에 도전했다. 처음부터 '빈타이'라는 이름은 아니었다. 지금은 커피 가게가 골목 가득 들어서 커피 골목으로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인적도 뜸했던 전북대 대학로 한쪽 골목에 '10그램'이라는 카페를 차린 게 시작이다. 열여섯부터 시작했던 비보이 이력이 화제가 돼 인기를 끌었다. 20대 초반부터 서비스업에 종사한 경험도 사업이 연착륙하는 데 도움을 줬다. "찾아 주는 손님들이 정말 많았어요. 감사한 일이죠. 제 커피가 거기서 시작이 됐습니다" 그곳에서는 커피 교육도 함께 진행했다. 그저 즐거워서 시작한, 나누고 싶다는 의미에서 시작한 일. 하루 영업이 끝나면 커피를 배우고 싶어 찾아온 손님과 함께 공부하고, 또 커피를 가르쳤다. 그렇게 창업한 사장님들도 다수다.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장사가 잘되던 점포를 넘기고 2011년 객사에 '빈타이'라는 이름의 카페 문을 열었다. 현재 빈타이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그 후 10여 년. 첫 매장이었던 객사점부터 부여 아울렛에 입점한 매장까지. 5곳을 넘기기 어렵다는 프랜차이즈 가맹점은 이미 13곳까지 늘었다. 사업가보다 '커피하는 사람'이라 생각해요 전국 각지에서 가맹 문의가 빗발친다. 이쯤 되면 가맹점을 늘려 전국적인 프랜차이즈로 성장을 꿰할 법하지만, 강 대표는 "어려운 문제"라고 말한다. 실제로 처음부터 프랜차이즈를 염두에 두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기에 준비가 미흡했다고 말한다. 겉으로 보기에 충분히 잘 진행되는 것처럼 여겨졌지만, 애초부터 방향성을 정하고 추진했으면 지금보다 나았을 거라는 뉘앙스였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빈타이 무조건 잘되잖아요' 하세요. 하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엄청 힘들어요. 똑같이 힘들 거에요. 좋은 말씀을 해주시면 감사하지만, 부담 아닌 부담입니다" 특히, 가맹점을 문의하는 분들께 미안해한다. 왜 더 이상 전주에는 매장을 내지 않는지 문의가 많이 들어오는데, 강 대표는 더는 전주에서는 이득이 없다고 판단했다. 물론 본인이 아니라 업주들 입장에서다. 현재 전주 시내에 있을 만한 곳에는 모두 매장이 있고, 군산이나 익산, 남원에도 매장을 늘렸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구획을 나누면 전주에도 매장을 더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업주분들이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더 크다. "저는 커피를 하는 사람이지, 사업가가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괜히 사업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자주 들어요" 그래서인지 우선 전북 도내 시군 가운데 매장이 없는 곳 위주로 확장을 생각하고 있다. 빈타이라는 '자부심' 커피콩이 보타이를 한 이미지. 빈타이는 강 대표가 서울에서 커피 로스팅 교육을 받고 지하철을 기다리던 중 용산역에서 떠올린 이름이다. 커피콩을 볶는 사람마다 커피 맛이 달라지는 것이 꼭 우리가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게 강 대표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사업 시작은 왜 전주였을까? 의외로 답은 간단했다. 전주가 고향이고, 단 한 번도 타지에서 살아본 적 없었다. 자연스럽게 시작도 고향에서였다. 확장성이 다소 부족하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오히려 인지도를 더 빨리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도 됐다. 특히 "전주에도 이런 커피 전문점이 있다"며 타지에서 온 지인과 함께 '빈타이'를 찾은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자부심이 한껏 올라간다. 커피, 그리고 카페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빈타이는 익숙한 브랜드가 됐다. 빈타이는 전주와 전북에서는 '고유명사'로 여겨진다. 이 자체가 신기하고 감사하다 말한다. 고향인 전주와 전북이 빈타이를 도와준 만큼 사회를 위해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돕고 싶다고도 덧붙였다. 가맹점이 늘어날수록 관리해야 하는 부분도 많다. 직영이 아니다 보니 매장마다 모두 업주가 따로 있지만, 빈타이 매장을 찾는 손님은 모두 같은 수준을 기대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창업 교육을 할 때, 업주와 매니저는 본점에서 일정 기간 일을 해야 한다. 교육이라고는 하지만 직원처럼 일한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일을 하는지, 어떤 멘트를 하고, 어떤 서비스를 하는지 직접 아시는 게 중요하거든요" 커피 교육도 커피 교육이지만, 빈타이만의 색을 입히는 과정이라는 설명이다. 시간이 지나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강 대표가 말하는 빈타이의 정체성은 '커피 회사'다. 커피 회사에서 빈타이라는 카페를 만들었다는 것. 인스틸이라는 원두 회사를 함께 운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강 대표는 그것이 주 '업'이라고 말한다. 빈타이는 강 대표가 만든 원두를 맛볼 수 있는 '쇼룸'이다. 빈타이에서 커피를 마시고 원두와 관련해 연락했다는 이야기가 뿌듯하다. "사실, 빈타이가 계속 영업하고, 지금 빈타이를 찾는 손님들이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찾아올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것 같아요. 그 자체가 가장 바라는 점입니다" 빈타이 컴퍼니를 '커피 회사'로 더 키우고 싶다는 마음도 크다. 커피 로스팅 공장을 준비하고자 하는 마음도 그러한 차원이다. 자연스럽게 빈타이 카페에도 도움이 되고, 커피를 연습하고, 교육하는 곳도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49살에는 은퇴하고 싶어요 인터뷰가 마무리될 무렵 강 대표 개인의 미래도 궁금했다. 너무 빈타이에만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던 참이다. 그런데 대뜸 49살에는 은퇴하고 싶다니, 말로만 듣던 파이어족(FIRE·조기은퇴 계획자)이 내 눈앞에 있나 싶었다. 49살 은퇴는 처음부터 생각했던 일이라는 게 강 대표 말이다. 커피가 좋아서 시작했지만, 사업은 하루하루가 전쟁처럼 느껴진다. 49세 이후 일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커피와 관련해서는 좋은 곳 가서 힐링하며 커피 마시는 게 제일 좋다고 말한다. 빈타이처럼 강 대표 역시 신기한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49세라면 앞으로 7년. 강 대표가 7년 후 실제로 은퇴를 할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처음 커피를 만나 지금껏 달려온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됐다. 전북대 앞에서 처음 10그램 카페를 운영하던 시절, 매일매일 테이블과 의자를 닦으며 '오늘 여기 앉으시는 분들 행복하세요'라는 주문을 속으로 되뇌었던 일화처럼. 여전히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쓰는 모습이다. '행복한 커피 나라'라는 당시 슬로건은 지금도 유효해 보였다.

  • 기획
  • 천경석
  • 2022.04.07 15:47

빈타이 강신석 대표 "커피 하는 사람입니다"

"빈타이 들어보셨나요?" 몇 해 전 누군가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때 들은 말이다. 물론 당시에도 익히 들어본 이름이었고, 바로 '그' 빈타이에서 커피를 마시던 참이었다. 빈타이가 지역 사람들에게는 '전북의 스타벅스'로 불린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들었다. 최근 인터뷰를 해봐야겠다고 다시 마음먹은 것도 부여 롯데아울렛에서 빈타이를 본 직후였다. 전북 지역이 아닌 곳에서 처음 본 매장이었다. 하지만 막막했다. 인터넷을 찾아보아도 이상할 만큼 나오는 것이 별로 없다. 흔한 홍보성 기사는 물론이고 대표와 관련된 정보는 찾기 더욱 어려웠다. 그러던 중 지난해 나온 작은 기사 하나를 계기로 대표와 간신히 연락이 닿았다. 첫 통화에서 그는 웬만하면 외부 노출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정말 인터뷰를 꺼리는 분이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다만 우리 지역(전북) 매체이기도 하고, 이번에는(인터뷰) 해보려고 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쁜 마음으로 곧장 약속을 잡았다. 3월 말. 전주 호성동 빈타이 본점에서 강신석 대표(42)를 만났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시각. 가장 여유 있는 시간이라고 했지만, 강 대표는 로스팅이 한창이었다. 각 매장에 원두를 납품하기 위해 오전에 출근해 오후 3시까지 본점 로스터리에서 직접 로스팅한다. 인터뷰 내내 강 대표의 전화는 수없이 울렸고, 그를 찾는 방문객도 끊임없었다. 직접 만나본 그는, 순박해 보이는 웃음 사이로 진지함이 비쳤다. 커피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커피가 좋았어요 첫 시작은 라테 아트 사진 한 장이다. 사진을 본 순간부터 커피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부지런히 영상을 찾아보고 마침 일하던 레스토랑에 있던 커피 머신으로 한 시간 일찍 출근해 커피 내리는 연습을 했다. 커피에 대한 갈증은 커져만 갔고, 수소문한 끝에 강남에 바리스타 학원을 찾았다. 2006년. 전문적인 커피 교육이 대중화된 때는 아니었다. 40명이 넘는 수강생 가운데 지방 출신은 강 대표 한 명 뿐. 그만큼 행복했고, 절실했다. 2008년 20대 중반의 나이로 창업에 도전했다. 처음부터 '빈타이'라는 이름은 아니었다. 지금은 커피 가게가 골목 가득 들어서 커피 골목으로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인적도 뜸했던 전북대 대학로 한쪽 골목에 '10그램'이라는 카페를 차린 게 시작이다. 열여섯부터 시작했던 비보이 이력이 화제가 돼 인기를 끌었다. 20대 초반부터 서비스업에 종사한 경험도 사업이 연착륙하는 데 도움을 줬다. "찾아 주는 손님들이 정말 많았어요. 감사한 일이죠. 제 커피가 거기서 시작이 됐습니다" 그곳에서는 커피 교육도 함께 진행했다. 그저 즐거워서 시작한, 나누고 싶다는 의미에서 시작한 일. 하루 영업이 끝나면 커피를 배우고 싶어 찾아온 손님과 함께 공부하고, 또 커피를 가르쳤다. 그렇게 창업한 사장님들도 다수다.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장사가 잘되던 점포를 넘기고 2011년 객사에 '빈타이'라는 이름의 카페 문을 열었다. 현재 빈타이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그 후 10여 년. 첫 매장이었던 객사점부터 부여 아울렛에 입점한 매장까지. 5곳을 넘기기 어렵다는 프랜차이즈 가맹점은 이미 13곳까지 늘었다. 사업가보다 '커피하는 사람'이라 생각해요 전국 각지에서 가맹 문의가 빗발친다. 이쯤 되면 가맹점을 늘려 전국적인 프랜차이즈로 성장을 꿰할 법 하지만, 강 대표는 "어려운 문제"라고 말한다. 실제로 처음부터 프랜차이즈를 염두에 두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기에 준비가 미흡했다고 말한다. 겉으로 보기에 충분히 잘 진행되는 것처럼 여겨졌지만, 애초부터 방향성을 정하고 추진했으면 지금보다 나았을 거라는 뉘앙스였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빈타이 무조건 잘되잖아요' 하세요. 하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엄청 힘들어요. 똑같이 힘들 거에요. 좋은 말씀을 해주시면 감사하지만, 부담 아닌 부담입니다" 특히, 가맹점을 문의하는 분들께 미안해한다. 왜 더 이상 전주에는 매장을 내지 않는지 문의가 많이 들어오는데, 강 대표는 더는 전주에서는 이득이 없다고 판단했다. 물론 본인이 아니라 업주들 입장에서다. 현재 전주 시내에 있을 만한 곳에는 모두 매장이 있고, 군산이나 익산, 남원에도 매장을 늘렸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구획을 나누면 전주에도 매장을 더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업주분들이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더 크다. "저는 커피를 하는 사람이지, 사업가가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괜히 사업가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자주 들어요" 그래서인지 우선 전북 도내 시군 가운데 매장이 없는 곳 위주로 확장을 생각하고 있다. 빈타이라는 '자부심' 커피콩이 보타이를 한 이미지. 빈타이는 강 대표가 서울에서 커피 로스팅 교육을 받고 지하철을 기다리던 중 용산역에서 떠올린 이름이다. 커피콩을 볶는 사람마다 커피 맛이 달라지는 것이 꼭 우리가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게 강 대표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사업 시작은 왜 전주였을까. 의외로 답은 간단했다. 전주가 고향이고, 단 한 번도 타지에서 살아본 적 없었다. 자연스럽게 시작도 고향에서였다. 확장성이 다소 부족하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오히려 인지도를 더 빨리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도 됐다. 특히 "전주에도 이런 커피 전문점이 있다"며 타지에서 온 지인과 함께 '빈타이'를 찾은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자부심이 한껏 올라간다. 커피, 그리고 카페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빈타이는 익숙한 브랜드가 됐다. 빈타이는 전주와 전북에서는 '고유명사'로 여겨진다. 이 자체가 신기하고 감사하다 말한다. 고향인 전주와 전북이 빈타이를 도와준 만큼 사회를 위해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돕고 싶다고도 덧붙였다. 가맹점이 늘어날수록 관리해야 하는 부분도 많다. 직영이 아니다 보니 매장마다 모두 업주가 따로 있지만, 빈타이 매장을 찾는 손님은 모두 같은 수준을 기대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창업 교육을 할 때, 업주와 매니저는 본점에서 일정 기간 일을 해야 한다. 교육이라고는 하지만 직원처럼 일한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일을 하는지, 어떤 멘트를 하고, 어떤 서비스를 하는지 직접 아시는 게 중요하거든요" 커피 교육도 커피 교육이지만, 빈타이만의 색을 입히는 과정이라는 설명이다. 시간이 지나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강 대표가 말하는 빈타이의 정체성은 '커피 회사'다. 커피 회사에서 빈타이라는 카페를 만들었다는 것. 인스틸이라는 원두 회사를 함께 운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강 대표는 그것이 주 '업'이라고 말한다. 빈타이는 강 대표가 만든 원두를 맛볼 수 있는 '쇼룸'이다. 빈타이에서 커피를 마시고 원두와 관련해 연락했다는 이야기가 뿌듯하다. "사실, 빈타이가 계속 영업하고, 지금 빈타이를 찾는 손님들이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찾아올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것 같아요. 그 자체가 가장 바라는 점입니다" 빈타이 컴퍼니를 '커피 회사'로 더 키우고 싶다는 마음도 크다. 커피 로스팅 공장을 준비하고자 하는 마음도 그러한 차원이다. 자연스럽게 빈타이 카페에도 도움이 되고, 커피를 연습하고, 교육하는 곳도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49살에는 은퇴하고 싶어요 인터뷰가 마무리될 무렵 강 대표 개인의 미래도 궁금했다. 너무 빈타이에만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던 참이다. 그런데 대뜸 49살에는 은퇴하고 싶다니, 말로만 듣던 파이어족(FIRE·조기은퇴 계획자)이 내 눈앞에 있나 싶었다. 49살 은퇴는 처음부터 생각했던 일이라는 게 강 대표 말이다. 커피가 좋아서 시작했지만, 사업은 하루하루가 전쟁처럼 느껴진다. 49세 이후 일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커피와 관련해서는 좋은 곳 가서 힐링하며 커피 마시는 게 제일 좋다고 말한다. 빈타이처럼 강 대표 역시 신기한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49세라면 앞으로 7년. 강 대표가 7년 후 실제로 은퇴를 할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처음 커피를 만나 지금껏 달려온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됐다. 전북대 앞에서 처음 10그램 카페를 운영하던 시절, 매일매일 테이블과 의자를 닦으며 '오늘 여기 앉으시는 분들 행복하세요'라는 주문을 속으로 되뇌었던 일화처럼. 여전히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쓰는 모습이다. '행복한 커피 나라'라는 당시 슬로건은 지금도 유효해 보였다. 천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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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경석
  • 2022.04.07 15:12

(원본) "커피하는 사람입니다" 빈타이 강신석 대표

"빈타이 들어보셨나요?" 몇해 전 누군가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때 들은 말이다. 물론 당시에도 익히 들어본 이름이었고, 바로 '그' 빈타이에서 커피를 마시던 참이었다. 흥미로운 별명도 들었다. 빈타이가 지역 사람들에게는 '전북의 스타벅스'로 불린다고. 최근 인터뷰를 해봐야겠다고 다시 마음먹은 것도 부여롯데아울렛에서 빈타이를 본 직후였다. 전북 지역이 아닌 곳에서 처음 본 매장이었다. 막막했다. 인터넷을 찾아보아도 이상할 만큼 나오는 것이 별로 없다. 흔한 홍보성 기사는 물론이고 대표와 관련된 정보는 찾기 더욱 어려웠다. 그러던 중 지난해 나온 작은 기사 하나를 계기로 대표와 간신히 연락이 닿았다. 첫 통화에서 그는 웬만하면 외부에 노출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정말 인터뷰를 꺼리는 분이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지역(전북) 매체이기도 하고, 이번에는(인터뷰) 해보려고 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쁜 마음으로 곧장 약속을 잡았다. 3월 말. 전주 호성동 빈타이 본점에서 강신석 대표(42)를 만났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시각. 가장 여유있는 시간이라고 했지만 강 대표는 로스팅이 한창이었다. 각 지점에 납품하기 위해 오전에 출근해 오후 3시까지 본점 로스터리에서 직접 로스팅 한다. 인터뷰 내내 강 대표의 전화는 수없이 울렸고, 그를 찾는 방문객도 끊임없었다. 직접 만나본 그는, 순박해보이는 웃음 사이로 진지함이 비쳤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커피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단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 여운이 깊게 남았다. 처음에는 그저 커피가 좋았어요 첫 시작은 라떼 아트 사진 한장이다. 사진을 본 순간부터 커피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부지런히 영상을 찾아보고 마침 일하던 레스토랑에 있던 커피 머신으로 한시간 일찍 출근해 커피를 내렸다. 커피에 대한 갈증은 커져만 갔고, 수소문한 끝에 강남에 바리스타 학원을 찾았다. 2006년. 전문적으로 커피 교육이 대중화된 때는 아니었다. 40명이 넘는 수강생 가운데 지방 출신은 강 대표 한명 뿐. 그만큼 행복했고, 절실했다. 2008년 20대 중반의 나이로 창업에 도전했다. 처음부터 '빈타이'라는 이름은 아니었다. 지금은 커피 가게가 골목 가득 들어서 커피 골목으로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인적도 뜸했던 전북대 대학로 한 켠 골목에 '10그램'이라는 카페를 차린 게 시작이다. 열여섯부터 시작했던 비보이 이력이 화제가 돼 인기를 끌었다. 20대 초반부터 서비스업에 종사한 것도 첫 창업이었지만 사업이 연착륙하는데 도움을 줬다. "찾아 주는 손님들이 정말 많았어요. 감사한 일이죠. 제 커피가 거기서 시작이 됐습니다" 그곳에서 커피 교육도 함께 진행했다. 그저 즐거워서 시작한, 나누고 싶다는 의미에서 시작한 일. 하루 영업이 끝나면 커피를 배우고 싶어 찾아온 손님과 함께 공부하고, 또 커피를 가르쳤다. 그렇게 창업한 사장님들도 다수다.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장사가 잘 되던 점포를 넘기고 2011년 객사에 '빈타이'라는 이름의 카페 문을 열었다. 현재 빈타이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그 후 10여 년. 첫 매장이었던 객사점부터 부여 아울렛에 입점한 점포까지. 5곳을 넘기기 어렵다는 프랜차이즈가 이미 13곳까지 늘었다. 좋은 원두, 감각적인 공간, 커피와 디저트 대표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이 문장이 빈타이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슬로건이다. 강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원두, 공간, 디저트' 이 세 단어에 키워드가 맞춰졌다. 무엇보다 가장 첫번째는 좋은 원두다. 강 대표가 택한 원두를 가져와 매일 로스팅한다. 13곳 빈타이 모든 지점에는 강 대표가 로스팅한 원두가 공급된다. 로스팅하는 것이 본인의 '업'이라고 말할 때 강 대표의 눈이 가장 빛났다. 빈타이 점포는 전북에 대부분 위치해있지만, 강 대표가 로스팅한 원두는 전국으로 팔려나간다. 빈타이하면 떠오르는 특색있는 공간도 마찬가지다. 빈타이의 독특하고 세련된 이미지는 강 대표와 함께 일하는 과장이 컨셉을 잡고 진행한다. 부지 선정부터 인테리어까지. 우선 공간의 디자인 컨셉을 잡으면 외부 전문가가 완성한다. 오랜 시간 함께 일해오면서 즉각즉각 피드백도 이뤄진다. '케이크 담당 과장이라고 하는데, 디자인 컨셉까지 맡고있구나'라고 생각할때 쯤. 그 과장이 강 대표의 아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소비자분들은 그저 예쁘게 봐주시면 되지만, 저희는 그 공간을 만들기 위한 과정을 아니까, 마냥 예뻐보이지만은 않더라고요. 힘들었던 게 더 떠올라요" 다음으로 디저트다. 어떻게보면 빈타이를 유명하게 만든 게 바로 디저트, 그 중에서 수제로 만드는 '딸기생크림 케이크'다. 처음에는 구색맞추기로 시작했던 것이 빈타이를 대표하는 메뉴가 됐다. 커피 맛이 너무 좋아서 빈타이를 찾기보다는 공간과 디저트가 메인이 됐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커피하는 사람으로 자존심도 상했지만, 이제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다고 생각한다. 빈타이하면 디저트라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1명으로 시작한 베이킹팀도 10명으로 늘었고, 디저트는 매일 새벽 호성동 본점에서 만들어져 13개 매장에 배송된다. 지난 2019년에는 해썹(HACCP) 인증도 받았다. 사업가보다 '커피하는 사람'이라 생각해요 전국에서 가맹 문의가 빗발친다. 이쯤되면 가맹점을 늘려 전국적인 프랜차이즈로 진행할 법 하지만, 강 대표는 "어려운 문제"라고 말한다. 실제로 처음부터 프랜차이즈를 염두에 두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준비가 미흡했다고 말한다. 방향성을 정하고 추진했으면 지금보다 나았을 거라는 뉘앙스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빈타이 무조건 잘되잖아요' 하세요. 하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엄청 힘들어요. 똑같이 힘들거에요. 좋은 말씀을 해주시면 감사하지만 부담 아닌 부담입니다" 특히, 가맹점을 문의하는 분들께 미안해한다. 왜 더이상 전주에는 매장을 내지 않는지 문의가 많이 들어오는데, 강 대표는 더이상 전주에서는 이득이 없다고 봤다. 물론 본인이 아니라 업주들에게다. 현재 전주에는 있을 만한 곳은 모두 매장이 있고, 군산이나 익산, 남원에도 매장을 늘렸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구획을 나누면 전주에도 매장을 더 만들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업주분들이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더 크다. 그래서인지 우선 전북 도내 시군 가운데 매장이 없는 곳 위주로 확장을 생각하고 있다. "저는 커피를 하는 사람이지, 사업가가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괜히 사업가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자주 들어요" 고향에서 시작한, 빈타이라는 '자부심' 왜 사업 시작이 전주였을까. 의외로 답은 간단했다. 전주가 고향이고, 단 한번도 타지에서 살아본 적 없다. 자연스럽게 전주에서 시작했다. 확장성이 다소 부족하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오히려 인지도를 더 빨리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도 됐다. 특히 "전주에도 이런 커피전문점이 있다"며 타지에서 온 지인과 함께 '빈타이'를 찾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때 자부심을 느낀다. 커피, 그리고 카페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빈타이는 익숙한 브랜드가 됐다. 이 자체가 신기하고 감사하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창업 교육을 할 때, 창업을 하러 온 업주와 매니저는 본점에서 일정 기간 일을 해야 한다. 창업 교육이라고는 하지만 직원처럼 일한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일을 하는지, 어떤 멘트를 하고, 어떤 서비스를 하는지 직접 아시는 게 중요하거든요" 커피 교육도 커피 교육이지만, 빈타이만의 색을 입히는 과정이다. 빈타이의 정체성은 '커피' 그 자체 강 대표가 말하는 빈타이의 정체성은 '커피 회사'다. 커피 회사에서 빈타이라는 카페를 만들었다는 것. 인스틸이라는 원두 회사를 함께 운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강 대표는 그것이 주 업이라고 말한다. 빈타이는 강대표가 만든 원두를 맛볼 수 있는 '쇼룸'이다. 빈타이에서 커피를 마시고 원두와 관련해 연락했다는 이야기가 뿌듯하다. 빈타이 컴퍼니를 '커피 회사'로 더 키우고 싶다는 마음도 크다. 커피 로스팅 공장을 준비하고자 하는 마음도 그러한 차원이다. 자연스럽게 빈타이 카페에도 도움이 되고, 커피를 연습하고, 교육하는 곳도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또한, 고향인 전주와 전북이 빈타이를 도와준 만큼 사회를 위해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돕고싶다 덧붙였다. "사실, 빈타이가 계속 영업하고, 지금 빈타이를 찾는 손님들이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찾아올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것 같아요. 그 자체가 가장 바라는 점입니다" 10그램 카페를 운영하던 시절. 매일매일 테이블과 의자를 닦으며 '오늘 여기 앉으시는 분들 행복하세요'라는 주문을 속으로 되뇌었던 일. 여전히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쓴다. '행복한 커피 나라'라는 당시 슬로건은 지금도 유효해 보였다. 천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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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경석
  • 2022.04.07 15:04

빈타이 강신석 대표

빈타이 강신석 인터뷰는 꽤 했다. 초창기에는 많이 했었다. 어느순간 부담감이 많아져서, 제가 노출되는 것보다 저희 브랜드가 노출되는게 맞다고 판단, 뒤로 빠졌다. 철학일 수 있지만, 사장이 누구인줄 모르는 매장을 만들고 싶었다. 제가 오픈했을때는 저를 보고 오는 분이 태반이었지만, 오히려 족쇄가 된다 나중에는. 제가 그 자리를 비웠을 경우나. 그러다보니, 체인아닌 체인이 돼 버렸고, 오히려 대중적인 것을 향해 가려면, 제가 사라지는게. 누굴보고 오는게 아니라, 빈타이라는 간판을 보고 들어오게 하려고. 그래서 제가 나서는 일이 없어지고. 팀원들이 할 수 있는일이 많아져야. 저는 원천. 로스팅에 집중. 그러다보니 매스컴을 꺼려하게 되고, 두려워하게 됐다. 처음 시작은 빈타이라는 브랜드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전북대 앞에 상가에 10그램이라는 카페다. 10그램이라고 지금으로 보면 고수닭갈비 사거리에서 번화가쪽 말고 반대편. 하얀색 카페가 있었다. 2008년에 오픈을 했었다. 그렇게 시작을 했다. 제 커피가 시작이 됐고, 거기서 2~3년정도 운영을 하다가 빈타이로 2011년도에 브랜드를 만들어서 그때부터 시작이 됐다. 차츰 체인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그런 마음으로 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다보니 제 커피를 조금 더 알리고자 했던 것이고, 그래서 빈타이라는 카페를 열었고, 동시에 원두를 같이 했다. 지금처럼. 훨씬 작게. 원두 납품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했던 것이 원두 납품을 계속 하게됐고, 입소문이 와서 찾아와주신느 분들 중에서 카페에 관심있는데 창업이 가능할까, 하나둘씩 생겨나게 되서, 현재 13곳이다. 직영은 아니다. 그당시에는 객사매장, 전북대매장, 호송점 이렇게 3개를 운영했었는데, 하나둘씩, 어떻게 보면 관리가 안된다. 제 성격이 제가 해야 하는 사람인데, 관리가 안되는 경우도 생기고. 어떠헥 보면 신시가지점부터, 외부 사장님들이 시작이 된 것이다. 5개가되다보니 법적의무가 생긴다. 체인 등록을 해야한다. 직영이 아닌 이상은. 어쩔수없이 이렇게 되버려서.그때 체인이라는 걸 처음 알게된것. 정보공개서나, 가맹계약서나 이런것들을 그때부터 부랴부랴 만들고, 지금까지 온 것. 지금도 사실 체인을 시켜야겠다는 마음이 크지는 않다. 당연히 체인이니까 매장은 늘겠지만, 기존 체인처럼 우후죽순 늘수 없는 구조고, 저희는 한 매장 한 매장이 기존 매장과 겹치면 안되고, 컨셉을 정해야 하니까 바운더리도 커지게 되고, 그래서 외부에 가맹 문의 하는 분들으 ㄴ왜케 추진이 더디냐고 하는데. 저희가 할 수 있는 능력은 정해져 있으니까. 문의하는 분들은 넘쳐나고, 저희가 할 수 있는건 정해져있고. 무리보다는, 저희가 체인을 목적으로 한게 아니니까. 체인을 목표로 했으면 엄청 늘었을거다. 그러나 저희 원천은 원두, 커피회사이지, 체인회사의 개념이 아니다보니까. 저희도 준비한 사항들을 보면 법적인 문제가 가장 크잖아요. 어떤 한 분이 저희회사를 보고 투자하는건데, 법적인문제도 다 생각해야하고, 제품을 생산해서 납품하는 것도 체크해서 실질적으로 가맹점주분들에게 원두나 케이크 등을 납품해야하는데, 생각보다 그런 부분들이 까다롭더라. 커피를 처음에 왜? 처음에요.. 2006년도일것 같다. 아마도 제가 이런 서비스업을 하다가. 올해 42세입니다. 26살때, 레스토랑에서 일을 했었다. 근무를 하다가, 일반 직원, 처음에는 파트타이머. 트레이너까지 오르게 됐는데, 그런 과정에서. 매장에 우연치 않게 커피 머신이 있었다. 커피 머신이 있다보니, 패밀리레스토랑이다보니 그게 주가 아니다. 디저트 등으로만 나가고, 사용안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으로 보면 유튜브. 우연치 않게 라떼아트를 보게 됐다. 동영상도 아니고, 사진으로. 이거는 그냥 그렸겠지 라는 생각으로 무의식적으로 봤는데, 동영상을 찾아보게 됐다. 우와, 그때 무너가 번쩍하는 느낌이 났다. 저거 해보고싶다. 마침 머신도 있으니까. 업무보다 한시간 일찍 출근했다. 편의점에서 우유를 사서, 해보기 시작한 것. 그당시에는 바리스타 학원도 없었고, 교육도 없었다. 그래서 라떼아트를 그냥 동영상보며 따라했다. 재미있다보니,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에 검색을 했고, 강남에 바리스타 학원이 있더라. 그리고 그때 이슈가 커피프린스, 드라마. 저의 첫 선생님은 커피프린스 교육해주시는 선생님이었다. 레스토랑 근무하면서 월 1회 휴무였는데, 화요일이었던 것 같다. 화요일마다 서울로 간 것. 배우러. 그 당시 클래스로 하는데, 40명 중에서 저만 지방에서 올라 온 사람이었다. 40명 중에 저만 서울. 붐이니까 서울 사람들이 먼저 배우더라. 그러다가 계쏙 머리속에는 카페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뿐. 젊은 나이에 모아둔 돈도 없을 것이고, 라떼아트를 배우고, 로스팅도 배우고. 커리큘럼이 있어서 시작한 것. 너무 해보고 싶어서. 수료는 끝났는데. 느낌상 멈춰버릴 것 같았다. 몸으로 익힌거니까 바로 써먹지 않으면 뭔가 안될 것 같아서, 빨리 여기 레스토랑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 그당시에 책임자이다 보니, 오너에게 말을 해야 하는데,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렸다. 제 생각을. 여기에 근무하는건 좋은데, 제 머릿속은 커피밖에 없어서, 가게에 마이너스다. 흔쾌히 그분이 저를 키워준거나 다름없는데. 그렇게 말씀 드리고, 저는 바로 나와서, 원래는 카페에 취직을 하려고 했다. 그당시에 그런데 26~7이다보니 쉽지 않더라. 왜냐면 일하는 근무자들이 저보다 어리니까. 그당시면 매니저나 그러니까. 당시에 카페보다는 프렌차이즈에 들어가고 싶었다. 객사 안에 스타벅스. 그자리에 원래 체인점이 있었다. 무슨 브랜드였는데, 거기에 지원했는데, 나이가 있어서 안될 것 같다고 하더라. 고민 엄청 많이 했다. 취직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큰일이다. 젊은 나이에 할 수 있는게. 그래서 저질러야겠다. 창업이다. 답이 없다. 그렇게 해서 전북대에서 10그램이라는 카페를. 말도 안되는 곳에. 제가 창시자다 거기는. 로프트는 테이크아웃점이 있었고, 앞쪽에. 저는 그니까. 그 골목이다. 지금은 그 건물이 없어졌다. 신축을 해서. 제가 운영했던 카페다. 인터넷을 통해 찾아서 보여준다. 아기자기한 모습. 지금도 검색하면 나온다. 약간. 일본의 조그마한 카페 느낌. 빈티지한 카페 느낌. 그런걸 좋아해서 그렇게 꾸몄었다. 그쪽에는 커피숍이 없었다. 아예. 그렇게 시작했다.] 그런데. 2년동안 너무 잘됐다. 너무너무 잘됐다. 그래서 카페 골목이 됐다. 앞에 세븐이라는 카페. 지금 되게 너무 많아졌다. 그렇게 창업이 시작됐고, 재미있게 했던 것은 교육이었다. 커피 교육을 같이 했다. 돈을 받지 않고, 무상으로. 그냥 재미있게 했다. 지금의 시작점으로 볼 수 있다. 매장 운영후에도 어떻게 보면, 어떤 사장님이 라떼아트 배우고싶다하면, 그럼 영업 끝나고 우유한박스 들고 들어오세요. 이렇게. 새벽까지 하고, 커피 모임도 생기고. 무료로 창업을 시키게 됐고.오픈을 하게 되는 것. 어떻게 보면, 그게 영업아닌 영업이 됐다. 빈타이로 와서 객사점으로. 로스팅을 했었다. 커피교육도 계속하고. 그렇게 시작이 됐다. 그렇게 하나둘씩. 시작이돼서, 부여아울렛에도 입점을 했던데? 빈타이 좋아하는 친구들도 많다. 빈타이는. 이것도 그당시 커피를 배우러 다니면서, 10그램이라는 카페를 접고, 빈타이를 만들기 위해 다시 서울로. 조금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2년동안 커피를 좋아해서 했지만, 제가 느끼기에 장사를 하고 있더라. 저는 고객들도 좋은데, 내가 좋아하는 커피가 어느순간 장사가 돼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그당시에는 너무 싫었다. 그게. 제 생활도 없었고, 어떻게 보면 대출도 갚아야하니 현실을 직시해야해서 그렇게 했지만,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재미도 없어졌다. 그래서 정말 남들이 왜이렇게 잘되는걸 그만두냐고 했는데, 저는 바운더리를 조금 더 키우고 싶었다. 조그마한 가게에서, 제가 제 로스팅을 통해서. 비유를 하자면, 카페테이블 장사를 했다면, 그 테이블이 카페가 되는 것. 그럼 전국이나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서울로 올라가서 공부를 하게 되고. 서울에서는 다시 밑바닥부터라 생각했다. 그땐 로스팅을 더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그리고 커피 머신을 공부했다. 지금의 선생님을 만나서, 그당시에도 커피 머신을 설치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창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창업 한 것. 전주로 와서 창업했다. 10그램에서 같이 일하던 직원. 직원은 지금도 있다. 저희 과장으로 있다. 그 과장이 10그램때 파트타이머로 시작해서, 빈타이 만들고 나서는 최초의 직원이 됐다. 직원이라면 딱딱할 수 있지만, 그때 인연이 지금까지 왔다. 되게 힘들었다 처음에는. 사실. 10그램이라는 카페가 워낙 잘됐고, 그랬기 때문에, 저희가 옮긴다고 알리는 것은 사장님께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디로 간다고. 그래서 객사로 옮긴 후에 일주일정도 됐을때, 아, 안되나보다. 너무 형편없는 매출이었다. 하루에 4만원? 아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 객사를 잘 몰랐다. 평일에는 손님이 없고 주말에 있는, 저는 반대로 생각. 학교는 반대니까. 일주일 정도했는데, 자존심이 상하더라.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에 바로 가게를 내놨다. 누가 바로 한다고 왔더라. 그래서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날밤이 잠이 안오더라. 그때 곰곰히 생각한게, 제가 초심을 잃었더라. 어떻게 준비해서 이 샵을 열었는데. 2년동안 장사하면서 초심을 잃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다시 안판다고 하고, 얼마를 팔든, 그당시에는, 20대 초반부터 서비스업을 했기 때문에 자료가 있었다. 서비스업을 하면서 왜 저 카페나 레스토랑은 잘되는지 안되는지 저만의 노트를 만들었었다. 그걸 토대로 10그램을 만들었었다. 준비아닌 준비를 참 많이 해서 잘됐을 수 있다. 그런데 빈타이 창업할때는 그런걸 잃었다. 나는 잘했었으니까 하는 거만함이 있었다. 그당시에는 청소할때도, 의자나 테이블 닦으면서, 웃긴 얘기지만, 주문을 외웠다. 제 그당시 10그램 슬로건이, 행복한 커피 나라, 였다. 여기 와주시는 분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닦으면서도 여기 앉으시는 분들은 행복하세요 라는 그 말을 하면서 했다. 어떻게 보면 미쳤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걸 잃었던 거다. 다시 리셋으로. 다시 처음부터 하자. 내가 잘할 수 있는건 웃는거고, 친절하게 하는것. 그게 밑바탕이되야하는데, 못했었다. 다시 차츰차츰 올라왔다. 다시 일정 수준 올라왔다고 느낀게. 객사점을 하면서, 1년정도했을대, 원래 있던 카페를 인수해서 조금만 리모델링했는데, 주인이 바뀌면 많이 바꼈다는 신호탄이 필요하더라. 그래서 1년정도 하고 전체 리모델링을 했다. 조금더 예쁘게. 리모델링 후부터 반전이 왔다. 그런데, 리모델링 후 일주일 후에 화재가 났다. 토요일에. 오픈 준비를 하는데 타는 냄새가 나더라. 여름이었는데, 실외기에서 불이. 한옥이다보니 엄청 위험했다. 기어나오면서 119 신고하고. 그렇게 소방관이 5분만 늦어도 주저앉았다고. 천운이라고 하더라. 그때가 최고의 위기. 가진돈 다 넣어서 리모델링했는데. 다시 수리해서 오픈했는데, 그때부터 잘되더라. 그리고. 리모델링 하면서 케이크를 하게 됐다. 수제케이크. 딸기 생크림이라는. 그게 시초가 됐다. 전북에는 거의 최초. 수제케이크를 할 수있는. 그게 발판이 돼서 커졌다. 빈타이하면 딸기생크림. 그렇게 커져서. 베이킹 팀도 1명 2명, 늘어서 10명까지 늘었다. 호성점에서 다 만들어서 납품하는 것. 베이킹 팀이 1층이 전부다. 코로나라는 걸 저도 처음 겪는 것이고. 그러다보니. 해썹 공간이다. 밀실이다. 창문도 없다. 감염이 되기 쉽더라. 한명만 되면 무조건. 단체로 걸린 것. 그렇게 해서 그런 일도. 디저트나 케이크 시작 생각은? 저희 과장한테 좋은 기술이 있는데, 사실 그 당시에는 냉동케이크를 납품받아서 하면 되는데, 그러다보니, 하루에 많이 나가야 몇조각이야. 라고 해서 시작된 것. 저도 이렇게 될 줄 모르고, 구색맞추기로. 근데 이왕하는거 수제로해보자고 해서. 지금은 빈타이는 커피땜에 오는게 아니고, 메인이 케이크라고 한다. 저는 그게 메인이 됐다. 처음에는 커피하는 사람으로서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데 그게 문화니까. 예전에는 커피맛을 보러 오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커피맛이 너무 좋아서 온다기보다는, 공간과 디저트가 주가 됐다. 원두도 여기서 모두 로스팅해서 나간다. 원두와 케이크는. 저희가 커피회사다 보니까. 커피회사에서 빈타이라는 카페를 만든 것이지, 또 저는 원두회사가 있다. 인스틸이라는 커피회사가 있다. 빈타이 컴퍼니에서 빈타이 카페를 운영 중이고, 인스틸이라는 원두회사가 있다. 저에게는 그게 주 업이다. 전국에 납품한다. 제가 그 일을 하다보니까. 그러다보니, 빈타이가 쇼룸이 된 것이다. 저희 원두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문의내용이 빈타이에서 마시고 연락드렸는데요. 라고 한다. 빈타이에서 먹는 커피는 그러면 품질이 동일하겠네요? 라는 질문에. 어… 어떻게 보면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커피가 재미있는게. 각종 원두가 똑같이 가지만, 100% 똑같지 않다. 맥락은 비슷할 것. 색깔은 같다. 검정색이지만 약간 흰색이 있는 검정 등등 100% 같지는 않다. 한 지점에서도 아침 점심 저녁 커피가 모두 다를 수 있다. 그걸 맞춰나가는게 바리스타 테크닉이다. 오늘처럼 비가오는날, 햇볕이 쨍쨍한날 등등 커피 세팅을 맞춰서, 우리가 갖고있는 원두를. 로스터들이 볶을때, 이 커피는 검정색을 표현하고 싶어라고 한다면, 검정색을 맛을 표현하는 사람이 바리스타다. 바리스타 협업을 통해서, 검정색을 만들어내는게 바리스타 역할이다. 원두의 상태, 매장의 상태, 공간의 상태에 맞춰서. 지점마다 교육을 하나? 기본적으로 저희가 처음에 창업 교육을 할때 본점에서 일을 시킨다. 창업교육이라고 하면 교육이겠지만, 직원처럼 일을 한다. 조금전 신시가지 사장님이다. 와서 계속 일을 하고. 그때는 커피도 커피지만, 빈타이의 색을 입히는 것. 그분들에게.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구나, 우리가 어떻게 하고있구나, 어떤 서비스를 하는구나, 어떤 멘트를 하는구나. 지금은 제가 필드에서는 나와있지만, 직접 체화하는 것. 사장님과 매니저님 이렇게 두분이 오셔서 한다. 지금은 직영이 본점뿐이고. 나머지는 다 다른 사장님들이다. 빈타이를 공부하면서, 창업을 했는데, 저는 로스티잉 주 업이다보니, 로스팅은 볶은 사람에 맞춰서 맛이 달라지더라. 그러면, 우리가 옷에 비유가 되더라. 정장을 입을때, 트레이닝 입을때, 캐쥬얼 입을때 행동거지가 달라지더라. 그래서 그걸 표현하고 싶었다. 용산 전철역에서 그려봤다. 이미지화 시킨 것. 원두에 옷을 입히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에 원두 그림에 나비넥타이. 그래서 빈타이다. 보타이를 표현했다. 처음에 로고가 나왔고, 현대식으로 바뀌다보니 이렇게 현재처럼. 그렇게 만들어진 것 빈타이는 공간이 눈에 띤다. 디자인. 모두 다르더라. 인테리어나 그런건 어떻게. 사실 저는 문외한이다. 저희 지금 케이크 담당 과장이, 어떻게 보면 저의 와이프다. 아내가 공간 공간을 디자인 컨셉을 잡는다. 전문가는 아니다보니, 표현해 줄 팀이 필요한데, 그 팀은 인테리어 하는 분이 따로 있다. 섭외를 해서, 지금 맞는 업체가 선정이 되서, 그 대표님과 수시로 미팅을 해서, 지금이야 오래돼서 대표님이 서치를 바로바로 스케치 해주시고, 피드백 주시고. 공간적인 부분이 이뤄진다. 예쁘긴 한데, 저희는 과정을 아니까. 마냥 이뻐보이지만은 않다. 소비자분들은 그냥 예쁘게 봐주시면 된다. 저희는 힘들었던게 더 떠오른다. 난 커피하는 사람이지, 사업가가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괜히 사업가가 따로 있는게 아니구나 생각하기도 한다. 왜 전주에서 시작? 전주가 제 고향이다. 타지에 나가서 잠깐 공부할때는 그렇지만, 타지에서 살아본적이 없다. 단 한번도. 그냥 자연스럽게 전주에서. 서울 올라가서 해도 되겠지만, 전주니까. 제가 해야하지 않았을까. 전주라서 힘든건… 지금으로서는 사실 뭐 취약점이나 그런게 크게 없는 것 같고. 아무래도 바운드가 작다보니까, 커질 한계는 좀 있다. 확장이. 규모가 작은 카페는 아니다보니, 저희가 우후죽순 동네 상권에 들어갈 컨셉은 아니다보니 한계는 있다. 오히려 더 열심히 한다면, 인지도는 더 많이 올라오지 않을까 싶다. 저희를 모르는 분들은,. 얘네는 어떻게 단시간에 커졌지/할 수 있다. 하지마 그렇지는 않다. 단시간에 커진게 아니다. 준비가 좀 미흡해서 이렇게 된것. 그리고 방향성이 이런게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도 미안하다. 문의오시는 분들에게. 왜 더이상 전주에 내지 않냐고 한다. 하지만 더이상 전주에 내는 건 매리트가 없다. 있을만한 곳은 다 있다. 더 세부적으로 나누면 들어갈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그분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카페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알겠지만, 또다시 트랜드가 바꼈다. 시대도 시대이니 만큼,. 외부 카페가 트랜드다. 그만큼의 커피 시장이 커진 것ㄹ수도 있는데. 지금은 소자본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돈있는 사람이 돈을 번다고, 그런 것 같다. 작게하는 분들에게는 속이 상할 수ㅜ있겠지만. 막상 운영해보면. 가맹점을 늘릴 생각? 지금도 추진하고 있는 것은 있다. 지금은 전국에서 연락이 오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전국으로 갈 수 있다?는 아닌 것 같다. 어려운 문제다. 일단 전북에서 아직 들어가지 않은 곳에 들어가는게 1순위인것 같다. 저희가 추구하는게, 디저트를 많이 하는데, 그중에 케이크다. 케이크가 생산과 유통이 생각보다 어렵다. 냉동이면 조금 편할 수 있는데. 이게 다 냉장이다보니 쉽지 않다. 매일 아침 생산해서, 배송팀에서 탑차로 일일이 배송해야하니까. 가시권 1시간 정도. 이제는 사업성을 봐야하니까. 광주에 한곳이 생겼다고 해서 갔다오면 마이너스다. 쉽지 않다. 문의는 전국에서 온다. 저희는 일단 안된다고 하는게 크다. 현재로서는. 그러면 저희가 원천을 바꾸지 않는 이상. 그리고 혹은 전국구로 나가려면 생산 공장을 늘려야 하는데, 구상은 하는데도 답은… 너무 어려운 문제다. 코로나 시대에 인건비뿐 아니라, 쉽지 않더라. 우후죽순 많이 생겨나서 대량생산으로 이뤄지지 않는 이상 어렵다. 매장 내에서 파티쉐 보유하면 되지 않냐 하지만, 파티쉐 보유할만큼 매출이 유지되야 하는데, 쉽지 않다. 처음에는 될 수 있지만 나중에는 쳐내야할 수도. “전주의 스타벅스” 엄청 웃는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 어떻게보면 좋은 말이다. 근데, 지금의 모든 칭찬은 모든 부담감으로 온다. 엄청 아주 엄청 부담감으로 오다보니. 무조건 잘되겠지? 하는 마음이 크다. 문의하시는 분들. 너무 쉽게. 빈타이 무조건 잘되잖아요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엄청 힘들다. 똑같이 힘들다. 보여지는게 다른 곳에 비해 많으니까 그럴 수 있다. 그런 것들이 부담아닌 부담이다. 10년이상 하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폐점 안하려고 엄청 노력한다. 그게 부담이다. 그런 것들이 저희에게는 큰 부담. 지금은 어떤 판단을 하고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저 혼자 하는 건 넘어섰따. 모든 가맹점주님들과도 상의해야 하고, 뭘 하나 할때도 알려드려야하기 때문에,. 그런것들이 고충일 수 있다. 한분한분 맞춰드릴 수 없으니까, 불만이 무조건 나오게 돼 있다. 저는 성격상. 안에 상처가 너무 크다. 왜 나는 못해줄까, 왜 못맞춰줄까 라는 마음이 크다. 속된 말로, 나같으면 굳이 빈타이 안하고 내가 하고싶은대로 할 것 같은데, 굳이 왜 빈타이를 해서 하고싶은 메뉴도 못하고. 그런 생각도 한다. 오히려 맞다고 생각한다. 창업얘기할때도, 그렇게 예산있으면, 빈타이 아니어도 충분히 잘 됩니다. 라고 말씀드린다. 충분히 매리트있고. 저희는 체인이다보니 가격 선정에도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서 누구는 1억 투자하고 5000짜리 팔고, 누구는 20억 투자해서 5000원짜리 팔면 이게 안맞는 것. 이게 엄청 크다. 요즘에는 외곽 카페 가보면 5000짜리 없다. 아메리카노 6~7~8000원 한다. 둘이 가서 시키면 2만원 넘어간다. 그러면 이게… 밥을 머거야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저는 이 계통에 있으니 이해한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한번가고 안가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그게 무서운거다. 재방문을 하려고 하면, 이 가격을 투자해서 얻는게 커야 한다. 한번 가고 마는게 되면, 투자한 사람들은 1년 지나고 2년 지나고 3년 지나면 매출이 ㄷ급격히 떨어진다. 그때 알게 된다. 그게 가장 큰 문제다. 저는 이런 것들을 말씀 드려야하니까. 왠만해서는 말릴려고 한다. 가격이 높으려면, 그것에 대한 기준을 맞춰줘야 한다. 힐링이 돼야 하지. 지금은 경쟁하는 곳이 워낙 많다. 전북에도 대형샵이 엄청 많다. 저희같이 분명히, 체인점을 준비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저또한, 저희 앞세대 분들을 보고 준비를 했고. 저희가 로컬이긴 하지만, 1세대는 아니다. 저희보다 앞서 한 브랜드도 있다. 자바데이브, 컬러인커피 등 이런분들 쟁쟁했던 분들. 지금도 쟁쟁하신데. 사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보면 우리도 우연찮게 잘 되서, 젊은층에게 인지도가 있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분명히 저희 후속주자들이 나올거다. 3~4개 5개까지는 충분히 가능하다. 그 이상은 어렵다. 제가 봤을때. 해보니까. 다른 사장님들도 인정하는게, 5개 이상일때. 신시가지점부터 신기했다. 오픈을 공지하고, 그러면, 10시오픈이다라고 하면 그전에 사람들이 밖에 와 있더라. 신시점부터 줄을 서더라. 뭔가 느낌이 달랐다. 은파점을 기점으로, 전국으로 알려지게 됐고. 관광지다보니까. 기점으로 더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더 생각하는 것? 제가 이걸 하면서 오래할 줄 몰랐다. 사실. 5년 정도 됐을때, 한 10년은 해봐야지 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이렇게 되니 20년은 해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면 50대가 좀 안될텐데. 원래는 목표는 일 자체를 49살까지 하는 거였다. 그 이후는 생각해본적이 없다. 커피교육도 안할거다. 아예, 커피는 마시는 걸로 끝내고 싶다. 좋은 곳 가서 힐링. 그것땜에 시작했고. 이거는 너무 전쟁이니까. 좋은 커피 마시는게 제일 좋은 것 같고. 이렇게 이렇게 앞을 본다고하면. 아무래도 저희는 커피회사다보니, 커피 회사 쪽으로 더 키우고는 싶다. 준비하는 것은 커피 해썹공장. 커피를 위주로 해서, 커피 로스팅 공장을 조금 더 짓고싶은 생각은 있다. 그걸 해야하지 않나 싶다. 빈타이도 잘될 수 있고, 교육장 아닌 교육인거죠. 직원들이 교육장에 와서 연습할 수도 있고. 그런곳을 만드는게 가장 가까운 목표다. 계속 사실. 원하는 건 장사하는 사람이니까, 빈타이가 망하지 않고 계속 계속 하는 것들이 제일 좋지 않나 싶다. 그 자리에서 계속 할 수 있고, 손님들이 나이들어서 계쏙 찾아올 수 있는 것. 제일 좋은건, 타지에 가서, 전주에도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타지에서 친구들 놀러오면, 데리고 오는. 이게 엄청 신기하다. 커피라는 분야에서 그래도 카페를 다니는 분들은 알 정도가 됐다고 본다. 그것 자체가 엄청 신기하다. 누워있을때도 뜬금없이 신기할때가 있다. 정말 감사한것이고. 빈타이 얘기를 하면, 그래도 프리패스가 될때가 있다. 지금 많이 느낀다. 제가 사회활동을 많이 하지 않지만, 어디를 가도, 빈타이 대표님이다하면 정리가 되더라. 어떻게 보면 그게 지역 사람들의 생각인 것 아니냐. 당연히 저희에게 안좋은 추억이 잇을 수 있지만, 그런게 좋았다. 명함도 사실, 엄청 오래전에 만들어놨는데, 한박스에 있는 한곽도 쓰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런생각을 안했는데, 이제는 저를 보고 오시는 가맹점분들도 있으니까, 빈타이를 홍보할 수만 있다면, 제가 해야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라디오광고나 영상미디어광고나 이런것도 시작을 생각하는데, 1차적 노출을 해야하고 전주시나 전북에서 같이 하는 것이 있다고하면 그런것은 흔쾌히. 도움을 줄수 있는 것은. 어쨌든 전북분들이 저희를 도와주셨기 때문에, 환원할 수 있는 부분은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크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인터뷰를 깨 했다. 중3때부터 22살까지 비보이 활동을 했다. 맥스크루. 비보이 출신이라고 하니까, 계속 방송에서 연락오더라. 비보잉 하면서 라떼아트 할 수 있는지 스타킹 이런 곳에서. 천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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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4.06 22:12

[전북 일가(一家), 이 사람] 신아출판사 서정환 회장 "전북 출판 어른으로, 전주 완판본 알리는 데 앞장"

직업적 의문과 궁금증 사이에서 서정환 회장이 떠올랐다. 신문 기자라는 입장에서, 비슷한 결을 가진 출판업을 하는 사람은 어떤 생각일까. 이미 낡아버린 느낌의 단어지만, ‘디지털 시대’에 출판업을 한다는 것. 그것도 50년 넘게 한 가지 일을 해왔다는 것에서도. 그 긴 시간을 업(業)으로써 버틴 의미가 궁금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사명감이 있기에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이어올 수 있었을까’라는 호기심이 걸음을 이끌었다. 서 회장을 만나기 위해 신아출판사에 먼저 연락했다. 돌아온 대답은 “당연히 회사에 계신다. 매일 사무실로 출근하신다”는 말이었다. 1940년생이니 올해 여든셋. 현역으로 활동하기에 낯선 나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처럼 느껴졌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서 회장의 아들. 서영훈 실장이었다. 공학박사로 반도체 대기업에서 탄탄대로를 걸었지만, 몇 해 전부터 출판사로 출근 중이다. 아버지에 대해 "매일 출근뿐 아니라 하루 만보 걷기를 매일 거르지 않는 분"이라고 귀띔했다. 지난 11일 전주시 진북동 신아출판사 사무실에서 서 회장을 만났다. 기분 좋은 미소를 가진, 삼국지 유비처럼 귓불이 커다란 사람이라는 게 서 회장의 첫인상이었다. 사무실에 매일 출근하고, 업무를 본다는 말이 허투루 나온 말이 아니었다. 이날도 오전 일찍 출근 후 이사장으로 있는 전북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 회의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신아가 지내온 시간만큼이나 세월이 묻어나는 듯한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돈 벌기 위해 한 일이지요. 다른 게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하다 보니 의미도 찾아지더라고요. 신아출판사의 시작은 1970년. 올해로 업력 52년을 이어온 장수 출판사다. 수천 종의 단행본과 10여 종의 정기간행물이 여전히 독자를 만나고 있다. 지역 출판 역사에서 유례없는 일로, 전북의 출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임은 당연하다. 신아의 궤적을 돌이켜보면 시작부터 사명감이나 뚜렷한 목표가 있었으리라 생각했지만, 서 회장의 대답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서 회장은 모든 게 먹고 살기 위함, 지극히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라 말한다. “한눈팔 여유가 없었다. 그것이 정답일 겁니다. 무슨 거룩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건 아니었지요.” 실제 서 회장 청년 시절 대부분은 ‘먹고 사는 것’을 위한 투쟁과 같았다. 고향인 순창 구림면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풍족했다. 공부도 잘했다. 큰아들에 대한 기대로 온 가족이 논과 밭을 팔아 전주로 나오면서 시련이 시작됐다.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아버지가 집을 사고도 등기를 하지 않아 전 재산을 날려 하루아침에 온 가족이 길거리로 나앉게 됐다.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가족들을 지키고 먹여 살리는 일은 온전히 큰아들인 그의 몫이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청년 가장이 됐다. 신문 배달부터 학교 소풍에 따라가 사진 찍어주는 일까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두 했다. 성실한 그를 눈여겨본 민국일보 지사장이 그에게 총무를 맡겼고, 민국일보가 발행하는 사보에 글도 썼다. 1965년 신아일보가 창간하면서 총무와 주재 기자도 지냈다. 신문사 지사를 맡으면서 부업으로 시작한 ‘프린트’일이 평생 업의 시작이 됐다. 1970년 인쇄소를 본격적으로 차린 것이 신아문예사의 시작이었다. 신아출판사를 거치는 모든 결과물에 대한 애정과 자긍심 가득 신아에서 발간하는 정기간행본만 10종이다. 특히 1992년 시작한 <수필과 비평>은 올해로 30년이 됐다. 유일하게 '흑자'가 나는 간행본이라고 말할 때는 자긍심이 드러났다. 실제로 <수필과 비평>은 존재 자체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 초창기 작가들에게 글을 청탁하면 거절당하기 일쑤였지만, 이제는 신아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됐다. 꾸준히 신인을 등단시키고, 등단한 작가들은 모임인 수필과 비평 작가회의를 통해 서로가 교류한다. <수필과 비평>을 기다리는 독자들도 상당하고, 이미 등단한 작가도 많다. 문학상 시상 등 꾸준한 활동도 활발하게 이뤄진다. <수필과 비평>이 신아의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 서 회장은 1990년 문예지로 신아가 처음 창간한 <소년문학>에 가장 애착이 간다. 간행물 창간이 자유로워진 1990년, 신아에서 가장 처음으로 신청한 발행본이 <소년문학>이다. 서 회장은 아이들에게는 문학이 우선이라는 생각이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손으로 엮은 책자에 제 글이 실린 적이 있어요. 그걸 받아들고 어머니께 보여드리기 위해 집으로 뛰어가던 장면이 기억에 가장 크게 남아있습니다. 아마 그 마음이 지금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실제로 서 회장은 이날 <소년문학> 최신 호를 펼쳐 보이며 가장 크게 웃었다. 대전, 부산, 여수, 인천 등등 전국 각지에서 아이들이 보내온 작품이 그득하다. "아이들이 청소년기에 하는 이런 경험들이 자연스럽게 기억 속에 남아요. 회사에도 이런 일을 많이 할 것을 요구합니다." 실제로 과거에는 유수의 신문사들이 앞다퉈 소년 문학지를 창간하며 인기를 끌기도 했었지만, 현재 남은 건 신아의 <소년문학>과 카톨릭출판사에서 발간하는 <월간 소년>정도다. 종이책의 침체와 불황은 이미 현실입니다. 굉장히 어려워요. 그럼에도 책은 살아남을 것이라 믿습니다. 1990년대 출판업이 전성기를 달리던 시절에는 직원이 80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사내에서 결혼한 커플도 다수였다. 지금은 30명 남짓한 직원으로 회사를 꾸리고 있다. 여전히 지역 출판사로서는 규모가 있는 편이지만, 상황이 어렵다는 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다. 이날도 서 회장은 회사 이야기가 나오자 "아주 어렵다"고 말한다. "너무 먼 미래를 상상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현재의 독자들과 앞으로의 독자들. 그 세대가 20년. 30년 까지 없어지지는 않으리라 보기 때문이죠." 최근 e북이나 유튜브를 포함한 영상 등 대세에 따라 사업 다각화도 구상 중이지만 상황이 녹록지만은 않다. 다만, 시대는 기록을 통해 발전한다는 것을 믿는다. 특히 문화는 기록을 통해 발전했다. 책은 과거에도 선봉의 역할을 했고, 앞으로도 역할을 할 것이라 믿는다. 이 때문에 책은 살아남는다고 믿고 있다.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좋아했으니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길게 가려면 좋아해야 합니다. 50년이 넘는 시간을 이 일에 매진할 수 있던 원동력은,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저 좋아했기 때문이라 말한다. 신아에서 나오는 모든 책을 서 회장이 교정하던 시기가 있었다. 책은 소설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시나 수필, 여러 교수들의 논문이나 문화, 예술, 사진까지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는 수준이었다. "날마다 독서를 하는 셈이었습니다. 내가 싫었으면 아무리 돈이 많이 생겨도 싫었겠죠. 그런데 늘 새롭고 새롭게 배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내가 좋아서 했다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지만 여전히 꿈을 품고 있다. 지속적인 투자는 서 회장의 신념 같다. 서울에만 있던 컬러 인쇄기를 전주에서 가장 먼저 도입한 것도, 인쇄에 컴퓨터를 도입한 것도 그다. 돈을 벌기 위함.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마음에 각인된 '의미'도 찾았다. 먹고 사는 문제로 정신없던 시절이지만 완판본 본 고장이 이곳이며, 과거 출판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완판본이 단순히 책만 만든 것이 아니라 문맹을 깨우치는 역할도 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이때다.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더욱 아쉽다고 말한다. "전주가 대한민국 출판의 본고장인데, 지금의 위상은 너무 아쉽죠. 무엇이든 할 생각입니다."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아직도 꿈을 꾼다. 업력 52년. 해야 할 일은 꼭 해야 한다는 소신도 있다. 전주, 나아가 전북 출판의 어른으로, 완판본을 알리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지난 50여년이 아닌, 앞으로의 몇년을 더욱 기대하게 했다.

  • 사람들
  • 천경석
  • 2022.02.16 17:47

[전북 일가(一家), 이 사람] 신아출판사 서정환 회장

직업적 의문과 궁금증 사이에서 서정환 회장이 떠올랐다. 신문 기자라는 입장에서, 비슷한 결을 가진 출판업을 하는 사람은 어떤 생각일까. 이미 낡아버린 느낌의 단어지만, ‘디지털 시대’에 출판업을 한다는 것. 그것도 50년 넘게 한 가지 일을 해왔다는 것에서도. 그 긴 시간을 업(業)으로써 버틴 의미가 궁금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사명감이 있기에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이어올 수 있었을까’라는 호기심이 걸음을 이끌었다. 서 회장을 만나기 위해 신아출판사에 먼저 연락했다. 돌아온 대답은 “당연히 회사에 계신다. 매일 사무실로 출근하신다”는 말이었다. 1940년생이니 올해 여든셋. 현역으로 활동하기에 낯선 나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처럼 느껴졌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서 회장의 아들. 서영훈 실장이었다. 공학박사로 반도체 대기업에서 탄탄대로를 걸었지만, 몇 해 전부터 출판사로 출근 중이다. 아버지에 대해 "매일 출근뿐 아니라 하루 만보 걷기를 매일 거르지 않는 분"이라고 귀띔했다. 지난 11일 전주시 진북동 신아출판사 사무실에서 서 회장을 만났다. 기분 좋은 미소를 가진, 삼국지 유비처럼 귓불이 커다란 사람이라는 게 서 회장의 첫인상이었다. 사무실에 매일 출근하고, 업무를 본다는 말이 허투루 나온 말이 아니었다. 이날도 오전 일찍 출근 후 이사장으로 있는 전북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 회의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신아가 지내온 시간만큼이나 세월이 묻어나는 듯한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돈 벌기 위해 한 일이지요. 다른 게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하다 보니 의미도 찾아지더라고요. 신아출판사의 시작은 1970년. 올해로 업력 52년을 이어온 장수 출판사다. 수천 종의 단행본과 10여 종의 정기간행물이 여전히 독자를 만나고 있다. 지역 출판 역사에서 유례없는 일로, 전북의 출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임은 당연하다. 신아의 궤적을 돌이켜보면 시작부터 사명감이나 뚜렷한 목표가 있었으리라 생각했지만, 서 회장의 대답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서 회장은 모든 게 먹고 살기 위함, 지극히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라 말한다. “한눈팔 여유가 없었다. 그것이 정답일 겁니다. 무슨 거룩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건 아니었지요.” 실제 서 회장 청년 시절 대부분은 ‘먹고 사는 것’을 위한 투쟁과 같았다. 고향인 순창 구림면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풍족했다. 공부도 잘했다. 큰아들에 대한 기대로 온 가족이 논과 밭을 팔아 전주로 나오면서 시련이 시작됐다.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아버지가 집을 사고도 등기를 하지 않아 전 재산을 날려 하루아침에 온 가족이 길거리로 나앉게 됐다.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가족들을 지키고 먹여 살리는 일은 온전히 큰아들인 그의 몫이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청년 가장이 됐다. 신문 배달부터 학교 소풍에 따라가 사진 찍어주는 일까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두 했다. 성실한 그를 눈여겨본 민국일보 지사장이 그에게 총무를 맡겼고, 민국일보가 발행하는 사보에 글도 썼다. 1965년 신아일보가 창간하면서 총무와 주재 기자도 지냈다. 신문사 지사를 맡으면서 부업으로 시작한 ‘프린트’일이 평생 업의 시작이 됐다. 1970년 인쇄소를 본격적으로 차린 것이 신아문예사의 시작이었다. 신아출판사를 거치는 모든 결과물에 대한 애정과 자긍심 가득 신아에서 발간하는 정기간행본만 10종이다. 특히 1992년 시작한 <수필과 비평>은 올해로 30년이 됐다. 유일하게 '흑자'가 나는 간행본이라고 말할 때는 자긍심이 드러났다. 실제로 <수필과 비평>은 존재 자체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 초창기 작가들에게 글을 청탁하면 거절당하기 일쑤였지만, 이제는 신아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됐다. 꾸준히 신인을 등단시키고, 등단한 작가들은 모임인 수필과 비평 작가회의를 통해 서로가 교류한다. <수필과 비평>을 기다리는 독자들도 상당하고, 이미 등단한 작가도 많다. 문학상 시상 등 꾸준한 활동도 활발하게 이뤄진다. <수필과 비평>이 신아의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 서 회장은 1990년 문예지로 신아가 처음 창간한 <소년문학>에 가장 애착이 간다. 간행물 창간이 자유로워진 1990년, 신아에서 가장 처음으로 신청한 발행본이 <소년문학>이다. 서 회장은 아이들에게는 문학이 우선이라는 생각이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손으로 엮은 책자에 제 글이 실린 적이 있어요. 그걸 받아들고 어머니께 보여드리기 위해 집으로 뛰어가던 장면이 기억에 가장 크게 남아있습니다. 아마 그 마음이 지금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실제로 서 회장은 이날 <소년문학> 최신 호를 펼쳐 보이며 가장 크게 웃었다. 대전, 부산, 여수, 인천 등등 전국 각지에서 아이들이 보내온 작품이 그득하다. "아이들이 청소년기에 하는 이런 경험들이 자연스럽게 기억 속에 남아요. 회사에도 이런 일을 많이 할 것을 요구합니다." 실제로 과거에는 유수의 신문사들이 앞다퉈 소년 문학지를 창간하며 인기를 끌기도 했었지만, 현재 남은 건 신아의 <소년문학>과 카톨릭출판사에서 발간하는 <월간 소년>정도다. 종이책의 침체와 불황은 이미 현실입니다. 굉장히 어려워요. 그럼에도 책은 살아남을 것이라 믿습니다. 1990년대 출판업이 전성기를 달리던 시절에는 직원이 80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사내에서 결혼한 커플도 다수였다. 지금은 30명 남짓한 직원으로 회사를 꾸리고 있다. 여전히 지역 출판사로서는 규모가 있는 편이지만, 상황이 어렵다는 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다. 이날도 서 회장은 회사 이야기가 나오자 "아주 어렵다"고 말한다. "너무 먼 미래를 상상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현재의 독자들과 앞으로의 독자들. 그 세대가 20년. 30년 까지 없어지지는 않으리라 보기 때문이죠." 최근 e북이나 유튜브를 포함한 영상 등 대세에 따라 사업 다각화도 구상 중이지만 상황이 녹록지만은 않다. 다만, 시대는 기록을 통해 발전한다는 것을 믿는다. 특히 문화는 기록을 통해 발전했다. 책은 과거에도 선봉의 역할을 했고, 앞으로도 역할을 할 것이라 믿는다. 이 때문에 책은 살아남는다고 믿고 있다.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좋아했으니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길게 가려면 좋아해야 합니다. 50년이 넘는 시간을 이 일에 매진할 수 있던 원동력은,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저 좋아했기 때문이라 말한다. 신아에서 나오는 모든 책을 서 회장이 교정하던 시기가 있었다. 책은 소설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시나 수필, 여러 교수들의 논문이나 문화, 예술, 사진까지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는 수준이었다. "날마다 독서를 하는 셈이었습니다. 내가 싫었으면 아무리 돈이 많이 생겨도 싫었겠죠. 그런데 늘 새롭고 새롭게 배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내가 좋아서 했다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지만 여전히 꿈을 품고 있다. 지속적인 투자는 서 회장의 신념 같다. 서울에만 있던 컬러 인쇄기를 전주에서 가장 먼저 도입한 것도, 인쇄에 컴퓨터를 도입한 것도 그다. 돈을 벌기 위함.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마음에 각인된 '의미'도 찾았다. 먹고 사는 문제로 정신없던 시절이지만 완판본 본 고장이 이곳이며, 과거 출판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완판본이 단순히 책만 만든 것이 아니라 문맹을 깨우치는 역할도 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이때다.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더욱 아쉽다고 말한다. "전주가 대한민국 출판의 본고장인데, 지금의 위상은 너무 아쉽죠. 무엇이든 할 생각입니다."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아직도 꿈을 꾼다. 업력 52년. 해야 할 일은 꼭 해야 한다는 소신도 있다. 전주, 나아가 전북 출판의 어른으로, 완판본을 알리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지난 50여년이 아닌, 앞으로의 몇년을 더욱 기대하게 했다. 천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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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경석
  • 2022.02.16 15:15

[전북 일가(一家), 이 사람] 전주이강주 조정형 명인

‘일가(一家)’. 사전적 의미로 한집에 사는 가족을 말하기도 하지만 학문이나 기술, 예술 등 한 분야에서 독자적인 경지나 체계를 이뤘을 때 이 말을 쓰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일가를 이루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전북일보는 평범한 '우리'를 만나고자 합니다. 특별한 성공과 사건보다는 일상과 삶의 궤적, 특히 사람 그 자체를 들여다보겠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시대의 전북을, 전북에서 살아갈 우리가 되짚을만한 의미를 찾아보려 합니다. ‘술’이 이 사람의 인생이다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전통주, 그중에서 '이강주'가 이 사람의 인생이다. 전주이강주 고천(古泉) 조정형 명인(81)의 이야기다. 배와 생강을 이용해 빚는 이강주는 육당 최남선이 평양의 감홍로, 전라도의 죽력고와 함께 조선 3대 명주로 일컬었을 만큼 유명했던 술이다. 그러나 일제가 통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공포했던 주세령과 주세법은 우리 전통주 문화를 말살시켰고, 해방 이후에도 그 여파가 이어졌다. 원형을 잃었던 전통주를 복원할 수 있도록 실마리를 찾아준 이가 바로 조정형 명인이다. 이강주에 대해 들어봤지만, 접할 기회는 없었다. 2022년을 앞두고 명인을 만나기 위해 전주시 원동 전주이강주 공장을 찾았다. 무엇이 그를 이강주 복원과 확장에 매진토록 했는지 궁금했다. 한복을 차려입은 조 명인은 호방한 웃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인사를 나눈 후 자리에 앉자마자 곧장 서류철 하나를 꺼내 건넸다. A4 용지 열 장 남짓. 그동안 그가 언론과 인터뷰한 기사 중 일부다. 이강주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 참고하면 된다고 했다. 지난 7월 조윤주 식품명인체험홍보관장과 함께 출간한 ‘전통주 비법과 명인의 술’이라는 저서도 함께 건넸다. 여기에는 본인 약력이 있으니 참고하라 말했다. 명인이 숱한 인터뷰를 해왔음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인터뷰어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실제로 전북에서 조 명인 만큼 전국적 주목을 받은 이도 드물다. "이강주에 대한 내용은 모두 거기(건넨 자료)에 있으니, 다른 이야기를 합시다." 명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질문에 대한 답은 거침이 없었고, 지나온 세월에 대한 기억도 끊김이 없었다. 술은 운명이었다 술빚는 가마솥이 땅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태몽 때문일까. 그에게 술은 운명처럼 여겨졌다. 대대로 전주 부사를 해온 집안. 향토사학자이자 서예가이며 시조 시인인 작촌(鵲忖) 조병희 선생의 아들. 명인이 태어나기 전부터 전주 다가동 본가에는 전라도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오갔고, 사람들이 모이다 보면 빠지지 않는 것이 술이었다. 집안에는 늘 술빚는 냄새가 가득했고, 어린 시절 술지게미를 먹으며 컸다. 이강주는 조 명인 가문의 6대째 내려오는 가양주(집에서 담근 술)다. 술 빚는 삶은 대학 졸업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전북대 농대에서 발효학을 공부했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학교 추천으로 당시 국내 굴지의 양조회사인 목포 삼학소주에 입사했다. 공무원 봉급 세 배가 넘는 월급과 사택 제공 등 파격적인 대우에 고민하지 않았다. 풍족하지 못했던 가계를 부양할 기회였다. 이후 25년 동안 목포 삼학소주를 거쳐 전주 오성주조, 이리 보배소주, 제주 한일소주 등 유수의 양조회사 공장장을 맡았다. 그러다 문득 "애주가들 기호에만 맞춘 술이 과연 좋은 술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당시 시중에 나온 술들은 수입산 주정에 물을 섞는 희석식 소주뿐 아니라 위스키도 원액을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술 회사에 다니고 있었지만 자신이 만드는 술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우리 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공장장으로 지내면서 머리가 트이다 보니,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 길로 본격적인 전통주 연구를 시작하고자 관련 기록을 찾기 시작했다. 회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국 도서관을 돌며 전통주 자료를 수집했다. 직원을 몰래 서울대 규장각에 보내 '술 주(酒)만 보이면 앞뒤 장을 복사해오라'고 시키기도 했다. 시간만 있으면 산골 오지나 조그마한 섬까지도 직접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전국을 누비다 보니 가산은 탕진되고 회사도 결근이 잦았다. 이는 명인이 25년 동안 많은 회사를 옮긴 이유이기도 했다. 가족과의 갈등도 당연히 불거졌다. 전주이강주 공장 한편에는 명인이 70년대부터 조사한 자료들이 빼곡히 꽂혀있다. 명인이 전국 각지를 돌며 보고, 들은 기록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잘나가던 공장장도 그만두고, 집까지 팔아가며 모은 기록들이다. 당시 이사만 11번을 했다고 하니 가족들의 고생이 얼마나 컸을지는 짐작이 갔다. 명인은 아내와 세 딸에게 특히 미안함을 전했다. "지금이야 사업도 안정됐고 아이들도 모두 장성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독한 짓을 했지." 특히, 아버지의 반대가 가장 컸다. 명인이 제주로 내려갈 때는 아버지로부터 부자의 연을 끊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던 터다. 안정된 삶이 보장된 길을 차버리고 험한 길로 들어서는 자식을 막고 싶었으리라. 다만 훗날 자식을 인정한 것은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고천(古泉). 옛날 술을 만든다는 의미의 조정형 명인의 호(號). 전통주 제작을 그토록 반대하던 아버지, 작촌 조병희 선생이 아들을 위해 지었다. 이강주는 '문화재' 조 명인에게 '이강주'로 기뻤던 일을 꼽아달라고 부탁했다. 큰 고민하지 않고 두 가지를 말한다. 이강주를 생산할 수 있게 된 일과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았던 일. 서울 올림픽을 한해 앞둔 1987년, 정부는 대한민국을 대표할 술 제조자를 찾아 향토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우리 것 찾기' 열풍에 더해 올림픽을 앞두고 전통 유산을 발굴하겠다는 취지였다. 당시 전주 이강주와 문배술, 안동소주 제조자 세 명이 기능보유자로 지정됐다. 1996년에는 전통식품명인 9호로도 지정받았다. 밀주 취급을 받던 전통주를 본격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 것도 기뻤던 일이다. 1990년 정부의 허가를 받아 이강주를 생산한 지 30년이 지났다. 대학 졸업 후 25년을 소주 회사에서 일하다, 50세에 이강주 회사를 창업했던 조 명인도 팔순을 넘겼다. 6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오로지 '술'에만 매달렸다. 사명감, 또는 전통주를 빚는다는 자부심이 아니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강주에 대한 자부심은 명인의 말 곳곳에서 스며 나왔다. "이강주는 따로 광고하고 싶지 않아. 문화재인데, 광고하는 것은 맞지 않지.", “대량으로 생산하면 작품이 아니라 상품이지. 문화재는 대량으로 나오지 않아.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해.” 혼자 이룰 수 있는 건 없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모든 것이 '운명'처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조 명인은 이 모든 게 '우연'이라 말한다. 이강주를 부활, 복원하고, 사업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지만, 모든 것이 본인이 아닌 남이 만들어준 것이라 한다.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겸손의 표현으로 읽혔다. 조 명인의 인생에는 두 가지 키워드가 있다. 진실과 노력. 진실한 마음으로 끈기 있게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고, 또 그래왔다. "나는 진짜를 좋아해요. 그래서 국회의원들이 싫어. 차라리 농사짓는 사람이 애국자 아닐까요. 자기 일을 철두철미하게 하는 사람이 진정한 애국자라고 생각해요." 명인은 이런 마음이 자신의 뿌리에 배겨있다고 말했다. 대화를 나누는 짧은 시간 동안 그가 일궈낸 '전주이강주'라는 성과물 자체보다, 이를 위해 노력한 지난한 시간이 깊이 있게 전해져왔다. 그가 이강주였고, 이강주가 바로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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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경석
  • 2022.01.03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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