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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창] 문용기열사를 기리며

얼마 전 익산 구 시장에 갔다. 시장 구경도 하고 순국 열사비를 보기 위해서였다.

 

중국 화교 앞에 초라하게 서 있는 순국열사비를 보면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휘호가 새겨진 열사비를 보며 일제시대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분열히 궐기해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치다 죽은 선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특별히 문용기 열사에 대해 새롭게 생각했다.

 

문용기열사는 1878년 5월 19일 전북 익산군 오산면 오산리 관음부락에서 출생했다. 문열사는 목포 영명학교(잔와스키중학교)에서 공부한후, 목포 영명학교와 군산 영명학교에서 영어와 한문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철저한 민족애와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그후 그는 익산 남전교회에서 운영하는 도남학교 한문선생으로 일하다가 우리 나라 제일의 금광인 함경도 갑산에서 미국인의 통역으로 일했다. 문열사는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비밀리에 전달하기도 했다.

 

문열사는 1919년 고향으로 내려왔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남전교회 교인들과 도남학교 학생들의 선두에 서서 만세 운동을 지휘했다. 손에 태극기를 들고 모여든 1천여명의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문열사는 만세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몰려온 일본 헌병들에 의해 총검에 찔려 숨졌다. 그는 숨져 가면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가슴 속 깊이 맺혀 있는 한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질 때까지 만세를 외쳤고, 그의 비장한 순국으로 인해 여러 곳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기폭제가 됐다.

 

그의 미망인 최정자 여사는 남편이 순국 당시에 입었던 피묻은 옷을 비밀리에 숨겨두었다가 조국이 해방 되던 날 아들 문창원과 가족들에게 보여주었다. 문창원은 이것을 독립 기념관에 헌납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 포장을 추서했다.

 

우리는 3.1운동을 말할때마다 유관순열사를 떠올린다. 그러나 문용기열사를 잊어서는 안된다. 문열사는 41세의 가장으로서, 도남학교의 교사로서 익산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옥사한 것이 아니고 현장에서 일제의 총검에 찔려 죽었다.

 

유관순은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고, 곳곳에 동상과 비석이 서있다. 그러나 문열사는 지방에서 만세운동을 했기 때문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전북지역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조차도 모르고 있다.

 

3.1운동과 4.19혁명의 정신을 이어받는다고 하는 우리나라가 과연 3.1정신을 얼마만큼이나 기리고 있는가. 오늘날에도 3.1운동의 정신은 유효하다. 오늘의 기독교인은 나라사랑하는 마음, 초교파 종교 화합정신을 가져야 할뿐만 아니라 민족의 구원을 이끌어내야 한다.

 

/정옥균목사(전주금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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