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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인 100년의 삶] 정월대보름과 전북의 당산제 100년

흔희 '민속'이란 전통사회의 생활습속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민속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일면은 맞고, 일면은 틀리다. 즉, 좁은 의미에서의 민속은 '전통사회의 생활습속'이겠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민속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생활습속'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민속을 시간적 개념으로만 파악함으로써 그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민속은 시간 개념 못지않게 가치 개념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대를 사는 우리의 생활방식에 빗대어 볼 때 불편하고 강압적이며, 때로는 억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민속문화의 현대적 수용, 또는 재창조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현대적인 가치관을 실현할 수 없다면 계승에 있어서 심대한 모순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속문화는 과거의 민속을 오늘날 그냥 되살려 놓는 것만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자칫 전근대적인 사회로의 퇴행화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과거의 민속에 여하히 현대적인 가치관을 수용해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용한, 또하나의 대안문화로 재창조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하겠다.

 

민속에서 백년이란 시간 단위는 큰 의미가 없다. 특히 근대 이전의 민속은 수백년 동안 지속되면서도 변화의 계기가 없거나 변화 자체가 미미하여서 '앞 시기와 서로 다른' 어느 한 시기를 잘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100년의 민속은 다르다. 이 시기의 한국역사는 격동 그 자체였다. 민속현상의 변화도 그 세월과 다름없다. 20세기 역사의 파고는 일제강점기로부터 시작되었다. 민속도 마찬가지이다.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가 일제에 의해서 미신으로 조장되면서 강압적인 금지의 대상으로 전락하면서부터, 해방과 함께 밀려온 신문화의 유입, 그리고 한국전쟁이 불러온 가치관의 변화, 60년대 이후 농업기반에서 산업기반사회로의 이행과정에서 나타난 해체 등에 의해서 격동을 겪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농촌사회에 들불처럼 번져나간 기독교의 보급은 민속의 헤체에 가속페달이 되었다. 그 결과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단절이다. 거의 대부분의 마을에서 행해졌던 마을굿은 이제 손에 꼽을 정도가 되었다. 그것도 마지 못해서, 조상들이 해왔다는 이유로, 극노인층에 의해서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 들어서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80년대 들어서 '우리것'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부터는 참여의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95년 지자체실시 이후에는 마을이 단체장의 표밭이 되고, 전통문화의 관광상품화 차원에서 '내고장 알리기'와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서 당산제에 대한 붐이 일고 있어 다소 의아스러울 정도이다.

 

먼저 정월 대보름의 의미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정월의 세시풍속은 정월 초하루에 시작하여 대보름에 절정을 이른다. 이처럼 정월 명절이 긴 까닭은 첫째, 한 해의 시작이라는 중요한 의미가 담긴 신년제(新年祭) 성격 때문이다. 한 해가 시작되는 정초는 우주의 시작과도 같아 모든 만물이 생성되기 이전의 신성기간이다. 이 기간에는 영험한 신성성 때문에 소망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다른 하나는 농사와 관련이 깊다. 이들이 바라는 소망은 아무래도 가정의 평안과 농사의 풍년이라 하겠다. 이 기간이 농촌에서는 실제로 농한기기로서 시간의 여유가 있다. 그것은 반대로 농번기가 돌아오면 겨를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온갖 민속행사가 이 기간에 행해질 수밖에 없다.

 

정월 대보름의 민속행사는 크게 가택의식과 마을 공동체의식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 가택의식은 앞서 언급했듯이 가정의 평안을 기원하는 차원의 의례로서 전국적으로 거의 동일한 성격을 지닌다. 일테면 복이 담긴 음식이라는 오곡밥과 묵은 나물을 해먹는 의식, 그것도 아홉집의 것을 먹어야 좋다고하여 소쿠리 들고 온 동네를 쏘다닌 기억이 필자만 해도 눈에 선하다. 또한 대보름날 아침에 부럼을 깸으로써 부스럼을 방지함은 물론, 부럼 깨지는 소리에 악귀가 범접치 않는다거나, 귀밝이 술을 마심으로써 일년 내내 좋은 소식만 듣는다거나, "내 더위 니 더위"를 외치며 더위를 파는 행위 등 대동소이하다. 시골에서는 보름날 새벽이면 마당에 대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지핌으로써 대나무가 타면서 내는 '퉁탕 퉁탕' 소리에 잡귀가 놀라서 달아난다는 축귀 폭죽놀이를 한다.

 

마을 공동체신앙은 당산제의 다름 아니다. 즉 거의 대부분의 마을굿이 당산제라는 이름으로 연행되고 있다. 당산제는 정월 대보름날 새벽이나 달이 중천에 뜨는 한밤중에 모셔진다. 당산제를 모시는 공간은 마을에서 가장 신성시하는 장소이며, 이 곳에는 어김없이 당산나무 장승 솟대 선돌 돌탑 등 오랜 새월동안 묵묵히 그 자리에 서서 마을을 보호해 준다고 믿는 마을지킴이가 있다. 당산제라는 마을굿은 제의(祭儀)와 놀이가 따른다. 전북지역의 마을굿은 지역에 따라 성격이 다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제의의 보편성과 놀이의 다양성으로 존재한다. 몇 개 지역의 변화해가는 사례를 소개하면 이렇다.

 

고창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오거리당산제"가 펼쳐진다. 오거리당산이란 고창 읍내를 중심으로 동서남북과 중앙에 비보(裨補)를 목적으로 각각 세워진 돌당산을 말하는데, 명문으로 보아서 중거리와 하거리, 그리고 중앙당산은 1803년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오거리 당산은 정월 초하루에서 열나흗날 사이에 각각 당산제를 모시고, 이와는 별도로 보름날 밤에는 줄다리기를 하였다. 줄다리기 과정에서는 등(燈)싸움이라는 놀이도 따랐다. 당산제의 주관이 처음에는 머슴을 주축으로한 주민들이었다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는 당산제가 축소된채 노인당 차원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게 되었다. 그러다 1980년 부터는 고창문화원에서 주관하여 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오다가, 지자체실시 이후에는 '오거리당산보존회'가 결성되면서 기관장들이 대거 참여하는 민관합동 행사의 성격으로 변하였다. 지난해 행사 유인물에 의하면 당산굿, 당산제, 연등놀이, 줄 예맞이, 줄다리기, 줄시위굿, 당산옷입히기, 흥겨운한마당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 밖에도 고창군 신림면 임리 당산제는 본래 정월 14일 밤, 그러니까 15일 자시(子時)부터 밤새워 당산제를 모시고 아침이면 솟대를 깍아서 세우고 줄다리기를 거행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주민들의 참여와 경비 부족으로 칠팔명의 노인들 만이 겨우 명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다.

 

부안지역의 당산제는 전북지역을 통털어서 현행되는 비율이 가장 높다. 이 중에서 진서면 구진마을은 현재 정월보름날에 당산제와 줄다리기를 행한다. 구진은 마을 뒷산의 거대한 느티나무가 할머니당산이다. "일제때 일본비행기나 미군비행기가 오면 폭격 때린다고 혀서 그 나무 밑으로 가면 꼭 우산처럼 생겨서 사람이 안보여서 대피장소로 이용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마을의 당산제는 한국전쟁 와중에 단절되었다. 당시에 젊은이들 중심으로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다른 동네도 그런 제를 폐지해도 아무렇지 않더라"며 제를 모시지 말자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그런데 우연인지 그 이후로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계속되자 6,7년 전부터 마을에서 가장 고령자 한분이 개인적으로 당산제를 모시기 시작한 뒤로 지금은 다시 예전처럼 성대한 당산제가 복원되었다.

 

완주군 경천면 요동마을의 사례도 재미있다. 이 지역은 서부평야지역과는 달리 동부산간지역의 당제형태를 고스란히 띠고 있다. 즉 놀이 중심이 아닌 의례 중심이다. 이 마을은 음력 정월 초 이렛날 당산제를 거행한다.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마을 당산이 상당산와 하당산이라는 이중구조로 되어있다. 상상산은 산신당 또는 할아버지 당산으로 불리고, 하당산은 아랫당산 또는 할머니당산으로 불린다. 상당산은 신성함을 강조하는 곳이고 하당산은 놀이성이 강화되는 곳이다. 경천면 요동마을은 산신제의 성격이 강하다. 산중에서는 과거에 호환(虎患)이 잦았다. 이 마을에서 산신이라함은 호랑이를 지칭하고 있다. 밤에 제관과 집사 두명이 마을에서 오백미터쯤 떨어진 뒷산 골짜기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은밀하고 폐쇄적인 제사이다. 그리고 다시 마을 입구에 있는 할머니당산으로 내려와 당산제를 지낸다. 이때는 마을의 전주민이 참여한다. 그러나 10여년 전부터는 위기가 닥쳤다. 주민들의 참여가 극히 저조하였던 것이다. 물론 교회와 교인들의 증대가 한몫하였다. 마을에서는 수백년된 전통이 단절 일로에 놓이게 되자 비상대책을 강구하였다. 궁여지책으로 동원된 방법이 '5가구 책임제'라는 조편성이었다. 즉 교인이든 아니든 다섯가구를 한 조로 편성해서 마을 전체를 6개조로 나누었다. 그리고 조에 따라서 교인이 많든 적든 간에 해마다 각 조에서 당산제를 책임지고 주관토록 한 것이다. 끝까지 당산제 전통을 이을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정월대보름 달은 일년의 운세를 점치는 날이다. 달 주변이 붉으면 비가 많이와서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하며, 창백하면 가뭄이 들 조짐이라고 한다. 올 대보름에 뜨는 달을 유심히 지켜볼 일이다.

 

/김성식(전북도립국악원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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