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소나무 숲을 부드럽게 스쳐가며 아름다운 노래를 가늘게 불렀다. 프란치스코는 바람이 자기에게 이야기 하는 소리를 들었다.
바람은 프란치스코의 친한 친구가 되었다. 바람 역시 지붕도 없이 항상 방황하며 사라져 가는 것, 이 세상의 이방인이며 나그네가 아닌가? 가난한 증에 가난한 바람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부유한 창조의 씨앗을 지니고 다닌다.
바람은 자기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지만, 가는 곳마다 씨를 뿌리며 지나간다. 씨가 어디에 떨어질지 걱정하지도 않고 자기 일이 맺어 놓는 열매도 모르고 있다.
그는 심는 것으로 만족하고 풍성히 심는다. 바람은 아무 곳에도 애착하지 않고 무한한 공간과 같이 자유롭다."(『가난한 자의 슬기』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은 1181년 아시시에서 태어나 1226년에 45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신 분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 풍족하고 향락적인 생활을 누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성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세상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부요함과 쾌락을 포기하고 평생 가난한 수도자의 모습으로 살면서 글라라 관상 수도회와 재속회를 설립하셨다.
성인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분이었다. 그렇지만 45년이라는 짦은 삶을 살았던 성인의 한 생애는 인간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 그리 행복한 삶은 아니었다. 성인은 평생 수많은 질병으로 고생하며 사셨다.
말라리아는 주기적으로 재발했고 심한 빈열과 비장암, 간비대증, 위궤양, 장궤양에 걸렸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다섯 상처를 몸에 간직하며 극심한 고통을 받으셨다. 더구나 생의 말년에는 열대성 눈병으로 거의 실명 상태에서 생활하셨다고 한다.
이러한 육체적인 고통 외에도 성인은 자신의 세운 수도회의 형제들로부터 버림받는 정신적인 아픔을 겪기도 하셨다.
그렇지만 성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고통과 아픔 죽음까지도 형제요, 자매로 받아들이고 사랑하였다. 성인께서는 죽기 얼마 전「태양의 찬가」라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셨다.
그 노래에서 성인은 세상만물을 형제자매로 고백하며 그들과 함께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데 마지막으로 죽음을 자신의 형제로 고백하며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우리의 형제인 육신의 죽음과 함께 당신을 찬미합니다. 살아있는 어떤 인간도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죄에 빠져 죽어가는 이들을 애도합니다. 당신의 가장 성스러운 뜻에 감싸여 죽음을 맞는 이는 행복한 것이니, 이러한 두 번째의 죽음은 이들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못합니다."
성인은 바람처럼 자유로운 분이셨다. 죽음마저도 그분의 자유로운 영혼을 옭아매지는 못했다. 성인께서 그렇게 자유로우실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모든 것에서 애착을 버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그것이 고통스러운 것일지라도- 형제자매로 받아들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늘날 우리는 무분별한 애착으로 인한 소유물은 한없이 많아진 반면 삶을 사랑으로 풍요롭게 하는 우리의 형제자매는 지극히 적어 황폐해진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성해볼 일이다.
/남종기(영등동 보좌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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