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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국민족문학이대회 초청강연 여는 고은시인

 

 

그는 우리 문학의 역사다. 그의 시는 바람이다. 역사와 맞서 있는 바람. 현실을 직시하며 아직 채 이르지 않은 미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70년대에는 유신독재에 온몸으로 맞섰고,  80년대에는 뜨거운 민주화운동으로 세월을 더했던 사람. 그리고 다시 민족문학을 갖고 세계문학으로 뛰어든 사람. 고은시인(69)은 그렇게 늘 뜨거운 존재다.

 

9일 전국민족문학인대회의 첫 문을 여는(오후 4시 전통문화센터) 특별강연에 초청되어 전주를 찾는 시인을 앞서 경기도 안성의 자택에서 만났다.

 

옷을 벗어버린 오동나무가 잘 어울리는 하얀 불란서풍의 양옥집에서 손님을 맞는 시인은 따뜻하고 정겨웠다. 이런 그로부터 젊은 시절, 소문에 소문을 불렀던 기이한 행적이나  거리에 나섰던 분노하는 지식인 투사의 모습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전주를 오랫동안 못갔네요. 한 10년 되었나. 어떡하다 그렇게 됐네. 80년대에는 민주화운동하느라 할일이 많이 있으니까 강연도 하고 문정현신부도 거기 있었고." 

 

해야 할 일을 잊고 있었던 것 처럼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전주와 인연이 깊다. 60년대 전주에 살았던 그는 가람 이병기선생이나 석정 해강 백양촌시인과 교류했던 시절을 고스란히 기억한다.

 

민주화운동을 위해 전국 곳곳을 찾아다녔던 그의 발길이 뜸해졌듯이 문학도 변하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그는 자신의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쑥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전쟁 직후 폐허의 시대상황에서 시작된 그의 문학은 그런 폐허가 반영이 되어 허무에 빠지기도 하고, 또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을 엘레지로 노래하기도 했다.

 

그러다 70년대의 현실과 맞닥뜨리면서 문학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80년대까지 지속된 그의 문학은 민중을 분명한 이념으로 지향하면서 우리 민족과 사회의 온전함을 위한 민주화와 통일 등의 커다란 명제를 품고 있었다.

 

"80년대 후반부터 양극체제가 무너지고 미국자본주의가 완전히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문학도 지난 시절에 있었던 여러 뜨거운 문제들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지요. 시인은 자기 자시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큰명제로부터 작은 명제로 돌아가기도 하곤 했는데 내 경우는 초기시와 중기시를 함께 아우르는 자기 종합성을 꿈꾸기 시작했지요. " 

 

그는 문학사에서 전례 없는 다작의 시인이다. 다산, 그 자체가 미덕은 아니지만 그의 창작세계는 특별하다. 평론가 백낙청씨가 그의 독자적인 문학적 성과를 미당과 김수영의 그것보다 윗자리에 두었을 정도로.

 

1960년 첫시집 '피안감성'으로부터 42년. 올해초 펴낸  '두고온 시'까지 단행본 시집만 29권, 120여권에 이르는 엄청난 양의 저작물은 지난 10월말, 서른 여덟권의 전집으로 정리되어 나왔다.

 

1미터 칠십삼센티 자신의 키보다도 더 길다는 전집을 소개하면서 그는 농담처럼 50권은 채워야지않겠느냐며 웃었다.

 

"우리 민족은 아직 온전한 자기 일상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어요. 분단국민으로서 이렇게 사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만 그런 만큼 완성된 국가를 만들어야지요. 분단시대 조국의 아픔을 무시할 수 없어요. 바로 그 아픔이 바로 나의 영감의 원천이 되는 것이예요."

 

지난 98년 시작으로 몇차례 이뤄진 북한 방문길마다 눈물을 흘렸던 그는 지난 80년대 말 목숨걸고 남북작가회담을 제안해, 기어이 성사시켰고 그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네번째 구속되기도 했다. 그만큼 통일에 대한 열망이 뜨겁다.

 

80년대와 달라진 시대 상황속에서 논의되는 문학의 위기, 시의 위기를 그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나는 어떤 경우에도 회한에 젖지 않습니다. 80년대 거리에서 군중을 이끌고 시위를 하면서 지냈지요. 그러면서 내시도 뜨거웠고. 지금은 그 뜨거움을 바칠 대상이  아직 없지요. 그런것이 다시 나타나면 시어는 낙조보다 더 붉은 열정을 표현할 것이고, 세상이 일정하게 일상성을 유지할때는 시로 돌아가서 인간이나 자연, 역사속의 어떤 일들을 깊이 탐구 해야지요."

 

그에게 시는 언제나 거리에만 있지 않은 것. 광장에도 있고 깊은 산속에도 있는, 사막  한복판에 혼자 서있는 존재이기도 한 그런 것이다. 그런점에서 그의 문학은 단수가 아닌 복수의 문학이다.

 

그의 고향 군산에는 가도(歌島), 노래섬이 있다. 먼옛날 서북풍이 유난히 많이 부는 이곳을 지나는 배들이 침몰했다. 서북풍을 타고 뭍으로 울려오는 넋들의 소리가 있었는데 그것을 사람들은 노래라고 했단다.

 

 

 

그는 고향의 노래섬이 노래를 부르게 만들어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다. 
어려운 이야기를 꺼냈다. 미당과 채만식의 친일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였다.

 

(지난해 자신의 스승이기도 한 미당의 친일문제에 대한 이야기로 한차례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그로서는 다시는 그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는 예상대로 단호했으나 자신의 입장을 명징하게 이야기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어떤 방법이 채택이 될겁니다. 지금  분명한 것은 식민시대의 잔재가 청산된 적이 없고 역사도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예요. 우리는 아직  역사를 해석할만한 주체로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만큼 지적하고 비판할 것은 치열하게 해야지요."

 

인터뷰가 끝날즈음 젊은 시인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도 단호했다.

 

"시는 가슴의 시와 머리의 시가 있어요. 때로는 머리의 시도 있어야 하지만, 만일  머리의 시에만 집착하여 가슴을 비워두면 섭섭하지 않겠어요. 가슴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고 싶어요. 심장의 박동, 심장속에 있는 새빨간 피, 이런 것을 가지고 쓰는 시를  진지하게 권하고 싶지요."

 

민족문학인들의 침묵을 꽤 오랫동안 지켜보아온 그에게 이번 전주대회는 민족 문학의  새로운 희망을 읽게 하는 시간이 될 듯 싶었다.

 

" 민족작가회의가 저항세력으로서가 아니라 시민 공동체처럼 활동하고 있는 것 같아요.  시국에 대해 일정한 자기 견해도 밝히고 하는 것이 좋은데. 좀 정태화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요."

 

그는 오늘 강연에서 '문학의 오늘'을 이야기한다. 그에게 문학의 위기는 없다. 시의  위기도 없다. 시인은 그러한 위기를 외부로부터 찾지 말라고 주문한다.

 

그에게 시는 전위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그의 세계가 여전히 크고 아득한 거리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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