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보기 싫은’ 것들을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 할 때가 있다. 생명과 관련된 것들이 가차없이 버려지고 무시당하고 학대당할 때 그걸 두 눈뜨고 바라봐야 하는 것이 너무나 괴롭다.
월셋방 장롱에서 빼빼 말라비틀어진 네 살짜리 아이가 숨져서 발견됐다. 그 아이의 체중은 5킬로그램. 기아사였다. 아버지는 막노동, 어머니는 정신지체 3급. 엄마는 아이가 죽자 이불에 싸서 장롱에 넣어두었다. 이웃이 방문하지 않았다면 그 아이는 언제까지고 장롱 속에 묻혀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정신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아이에 대한 죄책감이나 이웃에 대한 수치심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가치판단이 배제된 멍한 상태. 어떤 이는 그걸 일컬어 ‘현실감 제로’라고 표현했다. 현실감 제로. 사회적 규범이고 인간의 도리고 뭐고 극심한 고통과 한계상황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심부름센터 직원에게 돈을 주고 영아를 훔쳐오라고 시킨 여자도 있다. 아기의 엄마는 목졸라 죽이고 아이만 데려다가 제 자식처럼(!) 키웠단다. 제 자식을 배곯려 죽인 아비는 극심한 가난 때문에 현실감을 잃었다지만, 돈도 있고 가족도 있는 이 여자는 무엇 때문에 ‘현실감 제로’ 상태에 빠진 것일까?
따지고 보면 돈의 문제가 아니라 그 돈을 움직이는 사람과 사회의 문제다. 돈에게 무슨 죄가 있을 것인가? 돈을 움직이는 사람에게 중심이 없기 때문에, 중심이 있어도 전도된 가치에 휘둘려 있기 때문에 이렇듯 ‘마주보기 괴로운’ 사건들이 발생하는 것 아닐까.
지난 1월 초, 사회원로 165명이 경제?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하고 ‘사람 중심의 공동체 건설을 위한 사회협약’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일자리 창출과 사람 중심 사회를 위한 2005 희망포럼’이라는 이름의 이 모임에서는 ‘뉴 패러다임’ 운동을 역설하며 “지금의 양극화, 사회적 고통의 핵심은 고용에 있다”고 주장한다.
고용과 성장이 함께 가는 공동체, 사회적 일자리 창출, 상생의 사회협약 등을 뼈대로 삼고, 과로 해소를 통한 건강사회, 평생학습을 통한 지식사회, 새로운 여가문화 창출을 통한 문화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이들 주장의 핵심이다.
이제 운동 초창기라 다소 비현실적인 계몽운동처럼 보이는 측면도 있지만, 어쨌든 끝을 모르는 사회적 양극화에 지식인들과 사회원로들이 나섰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수출입국’이 아닌 ‘사람입국’을 만들자는 그들의 주장은 사람을 소외시키는 성장발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우리에게 깨우치고 있다.
행정중심도시네, 문화중심도시네, 온통 중심을 부르짖고 살면서도, 정작 우리 삶의 중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하지 않고 사는 것 같다. 나라 정책의 중심이 사람이어야 한다면, 사람의 중심은 무엇이어야 할까? 사람의 중심을 찾는 철학적 패러다임 운동도 범사회적으로 펼쳐지길 기대해 본다.
/김선경(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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