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규(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사무처장)
올해 북핵 문제로 남북관계가 또 한 번 파동을 겪었지만 이미 한반도는 새로운 전환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물론 남북이 지독한 증오감에 휩싸여 서로의 존재를 전면 부인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이제 막 화해와 협력의 길목에 들어섰지만 올해 목격하듯 일촉즉발의 전쟁위기가 채 가시지는 않은 과도기이다. 백낙청 선생의 지적대로‘분단시대의 끝자락, 통일시대의 들머리가 충돌하는 지점’이기 때문에 모든 일이 순탄하게 나가지는 않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숱한 우여곡절과 우회, 반전이 숨어 있는 6?15시대에는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기만 하면 되었던 이전의 냉전시대보다 훨씬 정교한 대응을 필요로 한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은 6?15시대를 상징하는 사업이 아닌가 싶다.
2005년 2월 19일 남북공동편찬위원회가 금강산에서 결성되면서 겨레말사전은 16년 전의 약속에서 ‘현실’의 문제가 된 후로 2년 동안 여덟 차례의 공동편찬회의가 서울, 평양, 개성, 금강산, 북경을 오가며 열렸다. 겨레말큰사전은 남과 북의 언어 뿐만 아니라 오랜 이산의 삶을 살아온 재외동포의 말까지도 포괄하는 최초의 우리말 대사전 작업인 관계로 중국 지역 조선족 동포가 살고 있는 연변지역을 방문할 기회가 몇 차례 있었다.
남과 북의 교류협력이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이뤄지기 전에 연변 조선족 사회는 북과 접촉하는 유일한 우회통로였다. 중국 연변지역은 사회주의 체제의 지배원리가 작동하고 지리적으로도 인접한 곳이며 말과 혈통을 같이하는 조선족이 집단거주해온 사회였기 때문에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진 뒤에 연변은 북을 들여다보는 창(窓)과 같은 역할을 했다. 실제 연변 조선족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려서 배운 조선말과 글의 기준은 다 북쪽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 조선족 사회는 한국과 거의 실시간으로 움직인다. 위성방송으로 한국의 인기드라마를 같은 시간대에 시청하고, 왕래가 빈번하기 때문에 생활어도 남쪽을 많이 닮아간다는 것을 느낀다고 한다. 조선말, 한국말, 연변말이 뒤섞이면서 아직 북측 언어체계를 따르고 있는 교육현장과 실제 생활과의 괴리 등 여러 부문에서 정체성의 혼란이 나타나고 있다. 연변 쪽 분들을 만나게 되면서 한반도 근현대사의 격동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지켜보았고, 두 개의 사회제도를 경험하고 있으며, 조선동포이면서 동시에 중국 인민이기도 한 연변 조선족의 특수한 처지가 역설적으로 한반도의 미래를 편견 없이 볼 수 있는 제3자의 눈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우리가 지향하는 통일이 1945년 이전 시점으로 돌아가 남과 북을 단순통합하자는 것이 아니라면, 통일이란 남과 북이 각기 걸어온 길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의 다른 측면을 적극 받아들여 우리 모두가 풍성해지는 길일 것이다. 우리의 통일이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먹어버리거나 일 대 일로 단순 통합하는 것이 아니듯 겨레말큰사전편찬사업은 남과 북의 어휘를 단순히 통합하는 작업이 아니라 ‘겨레말에 녹아 있는 우리 민족의 유산과 얼을 발굴하여 민족 공동체 의식의 폭과 깊이를 확장하고. 통일 조국의 밝은 미래를 담보하는 일’이다. 어디 이 일이 한반도에만 그칠 일인가. 중국, 러시아, 일본, 미주, 유럽에 이르기까지 집단적 이산의 삶을 살아온 우리의 묵은 상처가 회복되는 순간, 민족어의 영토가 한없이 넓어지면서 우리의 언어도 그만큼 풍성해질 것이다. 물론 공통의 사전 한 권을 우리들 손에 올려놓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6?15시대의 특징이 그러하듯 남과 북의 편찬 작업자들은 어느 한 순간 긴장을 놓지 못하고 격돌하고 논쟁하며 또 한편으론 서로를 아울러 갈 것이다.
평양과 서울, 북경과 개성, 금강산을 종횡으로 연결하며 이어가는 공동편찬회의. 우리 민족이 오랜 고통의 시간을 대가로 지불한 이 유례없는 ‘우리만의 역사’를 버물려 ‘가장 풍성한’언어의 창고를 함께 만들어내는 작업에, 작은 역할이나마 거들고 있다는 사실에 매번 감격하곤 한다.
/이재규(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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