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진(본보 논설위원)
지금부터 20년 전, 나는 익산군 함열읍에 소재한 익산군청에 가 있었다. 1988년 4월 26일 그 날은 13대 총선이 치러졌고, 그 곳 선거 개표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도농(都農)통합 전이라 익산시가 이리시와 익산군으로 나눠져 있던 시절이었다. 익산군 선거구는 평민당 김득수 후보와 민정당 조남조 후보가 박빙의 승부를 벌였다.
그날 밤 나는 자정이 넘어 개표소를 나와 인근 슈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김 후보와 선거운동원 몇몇이 가게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김 후보와 수인사를 나누고 동석했다. 이런 저런 애기가 오가다 김 후보는 불만을 털어놨다. 김대중(DJ) 총재가 "자기 새끼는 이리로 보내고 나는 익산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DJ가 비서인 이협 후보를 도시권인 이리시로 공천하고 자신은 어려운 농촌지역으로 밀어냈다는 뜻이다. 귀가 솔깃해 "그 말이 사실이냐"며 "당선되면 소감으로 쓰겠다"하니 정색하고 그 말을 취소했다. 그러면서 자세를 가다듬은 후 "DJ와 군민들에게 감사드린다"고 정정해 말했다.
같은 시각, 군산시청에서도 개표가 진행되고 있었다. 평민당 채영석 후보와 민정당 고건 후보가 맞붙은 곳이었다. 채 후보는 개표 시작 전, 군산시청 앞에서 왜장을 쳐댔다. "부정선거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표가 시작되고 얼마 있지 않아 자신이 앞서가자 그 소리는 쏙 들어갔다. 새벽 무렵 자신이 2만표 이상 앞서자 시장실로 들어가 몇 차례 전화기를 들었다. 통화가 이루어지자 그는 "총재님, 감사합니다. 제가 얻은 표는 모두 총재님 표입니다"라는 말을 연발했다. 여기서 총재는 물론 DJ다.
13대 총선에서 평민당은 도내 14개 선거구를 모두 싹슬이했다. 선거제도가 소선거구제로 바뀌고 대선이 직선제로 바뀐후 바로 치러진 선거였다. 13대에서는 7선으로 전국 최다선었던 이철승 의원(전주 을)이 손주항, 태기표에 이어 3위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 뒤 정치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또한 청와대 대변인을 지냈던 임방현 의원(전주 갑)도 낙방거사가 되었다.
이에 앞서 1985년 2월 12일에는 12대 총선이 치러졌다. 당시 신한민주당은 돌풍을 일으켰다. 실질적 오너였던 김대중과 김영삼이 만든 이 정당은 전두환 정권에 치명타를 날렸다. 전북에서는 감옥에서 막 풀려난 류갑종 후보(정읍·고창)가 재선의 민한당 김원기 의원을 물리치는 이변이 일어났다. 당시 민주화의 열기는 뜨거웠고 1987년 6·29선언을 이끌어 내는 기폭제가 되었다.
13대 총선 이후 전북은 20년 동안 DJ의 우산아래 있었다. 황인성(14대·무진장) 양창식(14대·남원) 강현욱(15대·군산 을) 단 3명만이 그 우산을 피해 햇빛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어느덧 18대 총선을 맞게 되었다.
그 사이 여권은 민정당에서 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지난 60년 동안 건국의 혼란을 떨치고 산업화와 민주화의 길을 걸어왔다. 정당은 제왕적 총재에서 민주정당으로 거듭나려 몸부림쳐 왔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항상 국민들의 선택이 함께 했다. 오늘 우리는 또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조상진(본보 논설위원)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