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나눔…먹을 것을 보시하는 마음으로
'여보게 이 사람아 뭘 그리 고민허나 이 차나 한 잔 먹고 가게/일천구백구십칠년 가을 새밝 여태명'
찻주전자와 찻잔 두 개. 이 그림 안에 쓰인 글귀가 예사롭지 않다. 이른바 서각. 나무 등에 글씨나 그림을 새기는….
이 작품이 걸린 곳은 전주 한옥마을(전주시 완산구 교동 142) 안 전통찻집 '예다원'. 이 작품을 만든 사람은 이곳 이선애 사장(53)이다.
찻집 안에는 손재주가 좋은 이 사장이 만든 화분과 꽃병, 찻잔, 수반(水盤), 수저꽂이 등이 탁자며 선반, 주방 곳곳에 놓여 있다. 굳이 '이곳은 전통찻집입니다'라고 소개하지 않아도 이곳이 어떤 곳인지 말없이 증명한다.
'해우소'(화장실) 문에는 '언제나 웃어주는 참 좋은 당신'이라는 글귀가 문 두드리는 이의 다급한(?)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벽마다 한국미술협회와 한국서예협회 등에서 주최한 대회에서 수차례 입선한 이 사장의 문인화와 서예 작품들이 찻집의 품격을 돋운다.
지난해 4월 같은 장소에 먼저 다도 교육장을 연 그는 올 6월 헌 한옥을 수리해 전통찻집을 열었다. 찻집 밖 간판 글씨도 이 사장이 직접 민체(民體)로 썼다.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 20일 '예다원'에서 만난 이 사장은 감물로 염색한 모시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가 손수 만든 생활한복이다. 가게 창가에 친 모시 발과 탁자 위에 깐 다보(茶褓)도 모두 그의 솜씨. 찻집 바로 옆에는 천연 재료로 염색한 생활 소품 판매장이, 안채엔 그의 가족이 사는 살림집과 천연 염색 체험실이 마련돼 있다.
그가 건넨 명함에는 '차 예절 지도사 이선애'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2002년부터 전주완산고와 호남제일고, 성심여고 등 도내 고등학교와 전북대·전주교대 등 대학 다도 동아리, 전주전통문화센터에서 차 예절을 가르쳐 온 다도(茶道) 강사. 현재 전주기전대학 문화전통과 2학년에 다니는 '만학도'이기도 하다.
예부터 차는 규방(閨房·부녀자가 거처하는 방) 문화이기 때문에 차 수업을 하다 보면, 염색부터 바느질, 도자기 굽기까지 다방면을 아우를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설명.
이 사장은 지난달 전북도와 전주소상공인지원센터가 주관하는 '소상공인 맞춤형 코디네이팅 지원 사업'을 신청했다. '차의 달인'인 그도 장사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코디네이터 김현희 씨는 '예다원'에 대해 전주 한옥마을이라는 상권 매력도에 비해 입지 매력도-한옥마을 내에서도 외진 곳에 있다-는 떨어진다며, 산야초(山野草) 등으로 만든 점심 메뉴 개발을 제안했다.
이 사장은 그래서 주먹밥 등 차와 곁들여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구상하고 있다. 가격대는 5000원 정도. 불경기에는 차만 마시기보다 밥 한 끼를 떼우려는 손님(특히 여성)들이 많다는 판단에서다.
"장사라는 게 쉬운 게 아니더라고요. 이윤을 추구해야 하니까요."
차 교육만 하다가 넉 달 가까이 직접 차를 팔아 본 그는 장사가 녹록지 않다고 고백했다. 지난달까지는 방학과 휴가철이 끼어 외부 관광객 등 손님들이 적지 않았지만, 이달 들어서는 손님 발길이 뜸해진 것.
그나마 근처 전주향교에서 찍고 있는 KBS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주인공인 '동방신기' 전 멤버 믹키유천이 촬영 때마다 이곳에 들러 단골이 된 것은 위안이다.
'초보 사장님'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불문율은 있다. '차=나눔'이라는 대원칙이다. 그는 "비록 돈을 받고 차를 드리지만, 남한테 먹는 것을 보시(布施)한다는 마음으로 정성껏 한다"고 했다.
찌고 말리기를 아홉 번씩 한다는 '구증구포'(九蒸九曝)까지는 아니더라도 녹차뿐 아니라 뽕잎차와 쑥차 등 대부분의 메뉴를 "한 번만 덖는(익히는) 게 아니고, 비비고 말리고, 다시 덖고 비비고 말리고를 찻잎이 마를 때까지 되풀이한다." 일반 찻집에서 건조기로 말리는 것과는 정성의 두께부터 다르다.
이 사장은 차와 더불어 빨강·검정·하양·노랑·파랑 등 오방색 곡물로 만든 다식이나 곶감을 썰어 내놓는다. 신상품으로 개발한 수수 빈대떡이나 유기농 딸기로 만든 생과일 주스 등은 지난 여름 손님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그는 전통문화를 강조하면서도, 전통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거나 이른바 '양반다리'(가부좌)를 못하는 외국인과 우리나라 젊은인들을 배려해 가게에 입식 탁자를 놓은 배경이다. 그래도 안채에 따로 다실을 두어 누구나 이 사장으로부터 차 마시는 예절부터 차의 유래 등 차 한 잔으로 도(道)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기회는 열어 놓았다.
"50은 쉬어 가는 나이라고 생각해요. 이제는 아는 만큼 베풀면서 살고 싶어요."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인생 이모작'에 도전하는 이 사장은 "이문만 앞세우기보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만나는 공간으로서 우리 차 문화를 알리고, 외지에서 온 손님들에게는 전주의 정감 어린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며 수줍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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