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근본정신 토대 / 학문 닦고 예절·덕행 쌓고 / 유생들 기숙하며 '열공'
▲ 전주향교에는 400살이 넘은 은행나무들이 서로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 있다. 옛 사람들은 향교에 반드시 은행나무를 심어 유교적 공간임을 상징적으로 알렸다. | ||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서 공자와 제자 3000명이 대나무 책을 들고 논어의 구절 중 '온 세상사람이 모두 형제'(四海之內 皆兄弟也)를 노래하며 행진하는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지난해에는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내려다보이는 천안문 광장에 9.5m의 공자동상이 우뚝 섰고, 중국정부의 주도로 노벨평화상에 맞먹는 공자세계평화상도 제정됐다. 전세계 313개 대학에 공자학원이 설치됐고 작은 규모의 공자학당도 369개가 세계 곳곳에 세워졌다.
중국에서 벌어지는 공자의 화려한 복권은 우리에게 남다른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전라도 유교와 유학의 심장부였던 전주향교에서 공자의 부활을 생각한다.
△ 전라도 53관의 수도향교, 전주향교
서울 성균관을 모델로 삼아 지어진 전주향교는 그 역사로 보나 건물배치와 건축미학으로 보나 유교적 이상을 구현한 곳으로 손꼽는다. 전주향교 안을 사색의 눈빛으로 소요하는 것만으로도 2,500년 전 유학의 문을 처음 열고 세계 4대 성인이자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 된 공자의 길을 엿볼 수 있다.
전주향교는 고려 공민왕 때(1354) 지금의 경기전 북쪽에 처음 앉혀졌다. 조선 태조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 곁이어서 향교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태종 때 전주성 서쪽 황화대 아래로 옮겨졌다. 두 차례 전쟁을 겪고 나서 선조 때(1603) 지금의 자리에 안착했다. 전주향교는 대성전과 명륜당을 비롯하여 만화루, 동무와 서무, 동재와 서재, 계성사, 신문, 입덕문, 사마재, 양사재, 책판고, 제기고, 수복실 등 모두 99칸이 넘는 규모였다.
▲ 성현을 모신 대성전. 대성전에서는 해마다 두 차례 공자를 기리는 석전이 거행된다. |
△ 삶의 멘토들을 모신 대성전
향교의 정문인 만화루는 2층 누각이다. 이 누각은 일종의 유생회관으로 이용되었고 이곳에서 방문객을 맞았다. 마을원로의 양로회가 열리거나 연회가 베풀어지기도 했고, 바깥마당에서 마을잔치가 벌어지면 이곳에서 구경할 수도 있었다. 향교나 서원에 만화루가 세워졌다면 그 고을에 왕비나 정승처럼 특별한 존재가 태어났다는 것을 상징하는데, 전주는 태조의 본향이므로 응당 만화루가 세워졌던 것.
향교는 크게 제향공간인 대성전과 강학공간인 명륜당으로 나뉜다. 전주향교는 평지에 앉은 탓에 앞에 대성전이 나서고 명륜당이 그 뒤에 섰다. 성현을 모신 대성전을 배움의 공간보다 더 신성시해서다. 대성전에는 공자 초상화, 4성과 공문십철, 송조6현의 위패를 모셨고, 앞쪽 동무와 서무에는 최치원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18현을 모셨다. 대성전에서는 해마다 두 차례 공자를 기리는 석전이 거행된다. 공자의 기일인 5월11일과 공자의 탄생일인 9월28일이다. 이때는 제수음식이 진설되고 연주되는 문묘제례악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술을 올리는 등 의례의 법도가 까다롭고 복잡하다. 또 전주향교에는 다른 향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계성사라는 건물이 있는데,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의 아버지를 모시는 사당이다.
마오쩌둥은 '공자가 죽어야 중국이 산다'고 외치며 봉건왕조를 떠받든 지배이데올로기로 공자사상을 비판하고 탄압했다. 문화대혁명 기간(1966~1976)에 공자를 기리는 사당은 파괴됐고 문묘제례는 사라졌다. 중국은 개방과 개혁을 통해 삽시간에 미국과 어깨를 겨루는 강대국으로 일어섰다. 이제 역사와 문화, 전통에 맞는 정체성으로서 또한 대표적인 국가 브랜드로 공자를 내세운 중국이 우리나라를 찾고 있다. 석전의 원형을 간수해온 우리의 전통적인 의례방식을 배우기 위해서다.
△ 젊은 글벗들이 열공하던 명륜당
강학하는 공간인 전주향교의 명륜당은 독특한 외양으로 아낌을 받는다. 정면 5칸 측면 3칸에 다시 좌우에 한칸씩 눈썹지붕을 달아내어 몸집을 넓혔고 20개에 달하는 널문이 분합문 형식으로 달렸다. 눈썹지붕의 도리가 뺄목으로 되어 비스듬히 길게 뻗어 나와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면 독수리가 날갯짓을 다듬으며 내려앉는 형국이다.
전주향교에는 400살이 넘은 은행나무들이 서로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 있다. 옛 사람들은 향교에 반드시 은행나무를 심었다. 은행나무의 연륜이 그대로 향교의 역사가 된다.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에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를 행단이라 부르고 은행나무를 심어 유교적 공간임을 상징적으로 알렸다.
명륜당 양쪽 앞에는 동재와 서재가 앉아 있다. 유생들이 기숙하며 공부하던 곳이다. 향교는 뜻이 있어 배우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지만, 생계에서 벗어나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여력과 여유가 있는 사람만 공부할 수 있었다. 반상이 나뉘어 동재에는 양반자제가 서재에는 서민자제가 지냈다. 차츰 양반 자제들은 향교의 대중교육에서 벗어나 이름난 학자들이 운영하는 서원을 찾아 사교육을 받으러 떠났다. 1000여 개가 넘다가 서원철폐령으로 삽시간에 사라졌던 서원의 역사에 비하면 향교는 언제나 그 수를 유지하며 공교육의 밑바탕을 떠받쳐왔다. 유학의 근본정신을 붙잡고 어진 심성과 예의바른 성품을 가르치는 데 전력했지만 향교 역시 시대의 변화에 내리막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 '반드시 필요한 사람'
공자는 춘추시대 사람이다. 그 시대는 패권경쟁이 치열했던 난세이기도 했지만 중국사상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군주마다 정치이론에 통달한 학자를 초빙하여 나라경영에 대한 의견을 들었고, 제자백가로 통하던 학자들은 자신의 사상이 정치에 반영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는 그 목표를 향한 길을 압축한 표현이었다.
공자는 14년 동안 주유했으나 세상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고 당대 최고 지식인이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68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행단을 차려놓고 73세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시서예악을 비롯한 고전문화의 정수를 가르쳤다. 그는 공문십철로 일컫는 수제자를 비롯하여 3천명의 제자를 배출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선비라는 뜻의 유(儒)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유교는 내세를 약속하거나 절대자를 내세우지 않지만, 종교이자 학문이며 동시에 도이자 삶의 기술이다. 지금 전주향교는 소일하듯 관광지가 되어 지칫거리고 공자의 가르침은 옹색하며, 그럴수록 중국에서 들려오는 공자의 소식은 사뭇 솔깃해진다.
한때 전주향교는 성균관스캔들을 촬영하던 날이면 어린 소녀 팬들이 몰려들어 뜨겁게 몸살을 앓았다. 꽃미남 유생들의 우정과 사랑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향교 안을 여전히 떠돈다. 이제는 먼 곳에서 한옥마을을 찾은 객들이 소슬해진 향교에 들러 퇴락해 가는 명륜당 툇마루에 걸터앉는다. 혹은 힘겹게 생명을 버텨온 늙은 은행나무에 등을 기댄다. 생각에 잠겼다가 돌아가는 길에는 더 나은 세상을 그리며 인간의 길을 밝혔던 공자의 말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를 무슨 주문처럼 되외며 정신이 고양되는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김정겸 문화전문시민기자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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