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이후 물자수송 도맡아, 조선때 조운 중심지로 발전
세계 최초 화포 함선전투지, 형식적인 구식 대포만 전시…역사성 체험기회 거의 없어
군산·장항간 동백대교 명칭, ‘진포대첩교’로 바꿔불러야
△고려·조선의 대혈맥, 군산
군산은 우리 역사 전개과정에서 해상교류의 중심 거점으로 자리한 곳이다. 이미 백제, 후백제 및 고려이래 서해안 항로는 대중국 교류의 중심이었다. 특히, 옛 군산진이 있던 선유도일대가 그 중심이었다.
한편, 고려가 건국된 이후 서해안 항로는 나라의 생명줄과 같은 역할이 새롭게 부각되었다. 즉, 고려와 조선왕조의 수도인 개경과 한양으로 국가의 세금과 주요물자수송을 위해 연안항로를 이용하면서 서해안 항로는 이후 1000여년이상 우리 역사에서 국가운영을 위한 생명줄이 되었다. 이때 쌀 생산의 중심지역인 호남평야의 출구로서 부각된 곳이 금강어귀인 군산지역이었다.
군산지역은 고려시대에는 진포(鎭浦)로 불렸는데 고려초 성종이 호족들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남방에 12조창을 두었다. 이때 전라북도권의 중심 거점으로 임피지역의 진성창을 관할한 진포를 조종포(朝宗浦)라 이름하고 1천석을 실을 수 있는 대형선인 초마선(哨馬船) 6척을 배정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성종이 이름을 ‘조종포(朝宗浦)’라 한 것이다. 이는 ‘조정의 으뜸’이란 뜻으로 그 중요성을 반영한 명칭으로 생각된다.
이후 군산은 조선시대에도 가장 중요한 조운의 중심으로 진성창이 2번째로 규모가 큰 23척의 조운선이 유지되었을 정도로 확대 발전되었다. 그런데 이곳이 고려 후기 국력이 쇠해 방비가 약해지자 왜구들이 남해를 거쳐 군산지역까지 진출하여 집중적인 약탈을 자행하는 지역이 되었다.
△고려를 구한 최무선의 진포대첩
조선을 건국한 태조이성계의 역사가 기록된 ‘태조실록’4년조의 기록에는 한 신하에 대한 특이한 기록이 남아있다. 즉, 고려말 현재의 군산지역인 진포에서 화포를 이용해 왜구를 대파한 ‘최무선의 졸기(죽은 신하의 기록)’가 그것이다. 이 기록이 주목되는 것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변방인 함경도지역의 일개 장수에서 고려를 구한 최고의 명장으로 등장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준 최무선에 대한 평가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즉 고려 우왕6년(1380) 9월 남원 운봉지역까지 들어와 고려의 큰 근심이 된 왜구를 토벌한 이성계의 위업은 실상 한달 앞선 8월 현재의 군산지역인 진포에 침입한 왜선 500여척을 모두 불살라 없앤 최무선의 진포대첩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뚜렷이 밝혀 화약발명가 최무선의 역사적 역할이 부각되고 있다.
“최무선이…일찍이 말하기를 ‘왜구를 제어함에는 화약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다. 최무선은…마침내 화약을 만들어 내었다. 또 화포를 만들고…전함의 제도를 연구하여…모두 만들어 내었다.
고려 우왕 6년(1380)인 경신년 가을에 왜선 5백여 척이 전라도 군산인 진포(鎭浦)에 침입했을 때…최무선이 화포를 발사하여 그 배를 다 태워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는 육지에 올라와서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노략질하고 도로 운봉(雲峯)에 모였는데, 이 때 태조가 병마 도원수로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왜구를 한 놈도 빠짐없이 섬멸하였다…이것은 태조(太祖)의 덕이 하늘에 응한 까닭이나 최무선의 공이 역시 작지 않았던 것이다.”
위 기록은 고려의 생명선인 조운항로의 물자를 약탈해 고려의 근간을 위협하던 왜구를 가장 효과적으로 격파한 최무선의 공에 대한 평가이다. 특히, 진포대첩으로 배를 잃은 왜구가 잔악하게 저항할 때 이를 토벌한 태조 이성계의 위업과 대등하게 최무선의 공을 조선 사관들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은 신왕조 조선에 협조치 않고 고려에 충성한 최무선에 대한 당시의 인식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깊다.
△조선에서 꽃 핀 최무선의 화약신병기
우리나라에서 화약과 화기를 독자적으로 제조하기 시작한 시기는 최무선의 건의에 따라 화통도감이 설치된 1377년(우왕 3년) 이후이다. 화약 제조에 성공함으로써 화통도감을 맡게 된 최무선은 곧 화약을 넣어서 발사할 수 있는 화포 제작에 착수하여 다양한 화포를 개발하였다. 이렇게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과 무기는 고려 후기 왜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최선책의 하나였다. 고려군은 최무선의 화약과 화포로 1380년(우왕 6년)의 진포 싸움과 1383년(우왕 9년)의 진도 싸움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칠 수 있었다. 이는 세계 최초로 함선에서 화포를 활용한 전투로서 세계사적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다.
또한 이성계장군이 왕조 교체의 틀을 마련한 운봉지역 황산(荒山)대첩도 화포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왕조 교체후 화기를 이용해 반대 세력이 봉기할까 두려워 집권 직후 화통도감을 폐지해 화약 제조기술은 잠시 침체되었다.
그러나 태종의 장려책과 최무선의 아들인 최해산의 노력으로 재개되고 세종대에는 사정 거리 증가, 연발기능 개발, 화기성능 개선, 사격술 개량 등 화기의 성능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 같은 화약무기의 발달은 왜구의 억제뿐 아니라 여진 정벌과 서북 변경을 개척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계 최초 화포 함선전투가 진행된 군산에서 그 의미와 역사성을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고 그저 형식적으로 전시된 구식 대포만이 그 흔적으로 남아있어 안타깝다.
△식민지 근대로 덮인 진포대첩 역사현장
군산지역은 고려, 조선을 거치며 국가의 생명선 역할을 하였다. 특히, 임진왜란시기 이순신 장군이 ‘약무호남 시무국가’(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없어졌을 것이다)라 하여 호남이 국가 식량의 중요 생산지임을 강조하였는데 그 운송 거점이 군산이었다. 그런데 조선이 식민지화된 후 호남은 일본인들을 먹여 살리는 쌀 생산기지로 전락되고 일본으로 쌀을 실어간 군산은 가장 번화한 식민지 근대도시로 성장하였다.
최근 군산은 ‘근대도시 군산’이란 콘셉트로 식민지 도시의 성격을 활용한 문화관광 전략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막상 고려, 조선의 대혈맥이자 생명줄이었던 군산의 의미와 진포대첩을 통해 극일(克日)한 역사, 쌀 수탈에 항거한 군산지역의 항일(抗日)의 역사 현장과 의미는 보이지 않고 식민지 근대화론적 이미지만이 부각되고 있다.
이제 새롭게 출범하는 민선 7기에는 이 같은 군산의 역사정체성 내용을 새롭게 검토하여 진정한 고려, 조선의 대혈맥 군산의 위상과 역사성이 회복되길 기대한다. 그 첫 사업으로 개통을 앞두고 있는 군산과 장항을 잇는 ‘동백대교’ 명칭을 고려를 구하고 조선개국을 마련한 진포대첩을 기리는 ‘진포대첩교’로 명칭 변경하는 것을 적극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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