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인근 고달산 ‘비래방장’
백제부흥 거점 변산 ‘원효방’
진표 수행했던 ‘불사의 방장’
직접 확인하고 생생한 묘사
△청년 이규보, 첫 부임지 전북도를 거닐다
고려시대 대표적 문인 이규보(1168-1241)는 고구려의 웅혼한 기상을 전하는 동명왕편을 기록하여 잊혀질 뻔한 우리 역사의 원형을 전해주었고 8000여편의 시를 남긴 고려 최대의 지식인이다. 그런데 이규보가 전라북도지역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어려서 천재소리를 듣던 이규보는 정작 과거에 4번이나 낙방하고 간신히 22세에 사마시에 급제했지만 10여년 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못해 세상을 한탄하다 32세 되던 1199년 6월 첫 부임지인 전주목에 서기직으로 임명되었다. 따라서 이규보 입장에서 전주는 인생의 첫 출발지로서 또 좌절과 울분에 차있던 마음을 풀어준 희망의 땅이었다. 그 같은 마음을 보여주듯 이규보는 전주목 관할구역인 현재의 전라북도권역에 출장을 다니면서 유려한 글 솜씨로 기행수필인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등 많은 시와 글을 남겨 820여년전 전라북도의 생생한 기록을 전해주고 있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이규보가 전북 지역의 고구려, 백제, 신라 스님들이 머물렀던 사찰들을 찾아 관련기록을 남겨놓은 것이다.
△고구려 평양에서 백제땅 전주로 날라온 ‘비래방장’을 가다
이규보는 전주에 부임하자 전주근처 고달산에 있는 고구려 승려 보덕이 세운 경복사의 비래방장을 찾았다. 비래방장(飛來方丈)은 문자 그대로 ‘날라온 암자’라는 뜻이다. 보덕은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도교를 진흥시키자 제자들을 거느리고 하룻밤새 백제땅으로 날라왔다고 전해졌다. 이 사건은 워낙 유명해 신라시대 최치원도 관련 기록을 남겼는데 이규보는 경복사를 찾아 보덕화상의 초상화도 보고 비래방장에 갔다. 경복사는 우리나라 불교 열반종의 종찰로 그 위세가 고려-조선에 걸쳐 유지되었는데 1597년 임진왜란때 승병의 중심지 역할을 하다 일본군이 파괴하여 지금은 폐사되었다. 현재 완주군 고덕산에 폐사지로 남아있는데 최근 몇차례 발굴을 통해 대형석축 건물지와 ‘경복사(慶福寺)’, ‘중도종(中道宗)’ 등의 명문와가 출토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한강이남지역에 유일한 고구려승려가 만든 사찰이 전라북도에 존재하였으며 670년 고구려 유민들이 대거 전북지역으로 옮겨와 살게 된 배경으로 이 경복사가 상정된다는 점이다.
△백제부흥 거점에 자리한 신라의 원효방
이규보가 찾은 두 번째 승려의 자취는 변산의 원효방이다.
“변산 소래사에 갔는데, …다음날… 원효방에 이르렀다. 높이가 수십 단이나 되는 나무 사다리가 있어서 발을 후들후들 떨며 찬찬히 올라갔는데,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속어에 이른바 ‘사포성인(蛇包聖人)’이란 이가 옛날 머물던 곳이다.” ‘남행월일기’
이규보는 신라의 유명한 승려 원효의 자취를 변산에서 찾았다. 원효는 신라의 대표적 승려로 전국에 많은 흔적이 전하지만 대부분 후대에 갖다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규보가 방문한 변산 원효방은 당시에 이미 원효초상이 모셔져 있어 실제 원효가 왔던 곳임을 알려준다. 현재 개암사 뒤 산 정상 부분에 원효방 흔적이 전하는데 이곳은 앞서 살펴본 백제부흥군 거점인 주류성으로 파악되는 우금산성 지역이다. 문제는 느닷없이 왜 신라 승려 원효가 변산지역에 나타났는가이다. 여기서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함께 등장하고 있는 존재인 ‘사포성인’이다. 사포는 ‘뱀복이’로 불리는 죽은 이들을 사후세계로 데려가는 민간신이었다. 즉, 신라가 백제부흥군을 진압한 이후 원효와 사복을 파견해 진압과정에 죽은 자들을 위한 위무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이 이규보는 원효와 사포의 자취를 찾으며 백제부흥군의 잔영을 추론해 주류성위치비정에 중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백제승려 진표의 불가사의 암자 부사의방
한편 이규보는 원효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진표의 불가사의한 수행암자를 찾았다.
“이른바 ‘불사의 방장(不思議方丈)’이란 것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서 구경하였는데, 그 높고 험함이 원효방의 만배였고 높이 100 척쯤 되는 나무사다리가 곧게 절벽에 걸쳐 있었다. 3면이 모두 위험한 골짜기라, …한번만 헛디디면 다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다리가 와들와들 떨려 내려가기도 전에 머리가 벌써 빙 돈다. 그러나 예전부터 이곳의 빼어난 정경을 익히 들어오다가 이제 다행히 일부러 오게 되었는데, 만일 그 방장을 들어가 보지 못하고 또 진표대사의 상(像)을 뵙지 못한다면 뒤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그래서 어정어정 기어 내려가는데, 발은 사다리 계단에 있으면서도 금방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들어가서 부싯돌을 쳐서 불을 만들어 향(香)을 피우고 율사(律師)의 진용(眞容)에 예배하였다. …그 방장은 쇠줄로 바위에 박혀 있기 때문에 기울어지지 않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바다 용이 그렇게 한 것이라 한다. ‘남행월일기’
백제가 망한 지 100여 년이 지난 8세기 중엽 통일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인 진표(眞表)는 현재의 김제지역 출신으로 ‘송고승전’에는 백제인으로 기록되어 금산사를 중심으로 미륵신앙을 중흥시킨 승려다. 그의 미륵신앙은 견훤과 궁예에게 연결되어 후삼국 시대 새로운 사회의 중심신앙을 마련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진표가 중이 되는 계기를 전하는 다음 내용이다.
“진표는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았다. 12세 때 사냥을 나갔다가 밭둑에서 개구리를 잡아 버드나뭇가지에 꿰었고, 사냥이 끝난 뒤에 가져가기 위하여 물속에 담가두었다. 그러나 집으로 갈 때에는 다른 길로 갔다. 이듬해 봄 다시 사냥을 갔다가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고 그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30여마리의 개구리가 줄기에 꿰인 채 그때까지 살아서 울고 있었다. 지난해의 일을 생각해낸 그는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출가를 결심하였다.” ‘삼국유사’
위 기록에 나타난 진표가 자신이 꿰었던 개구리를 풀어주고 스님이 되었다는 설화는 망한 나라의 백성들은 마치 나뭇가지에 꿰어져 도망가지도 죽지도 못하는 처지에 있는 개구리와 같은 존재로 이들을 종교적인 방법으로 해방시키라는 진표의 사명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된다. 즉, 출가 후 진표는 자신의 소명을 위해 극단적인 고행을 하는데 그 장소로 벼랑 끝에 매달린 바위틈새에서 수행하는 방법을 택한다. 바로 변산 꼭대기 절벽에 암자를 차렸다 하여 이를 불가사의한 암자라는 의미의 ‘불사의 방장’으로 이름하였다.
이같이 이규보는 청년백수를 벗어나 첫 직장지인 전라북도권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꿈을 키웠고 특히, 고구려, 신라, 백제와 연결된 승려들의 자취를 찾아 기록으로 남겨 820여년 전 전북권 역사의 모습을 전해주었다. 특히, 이를 통해 전라북도의 숨은 역사 즉, 삼국시대 백제, 신라, 고구려인들의 역사가 온전히 전라북도로 모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낸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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