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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18) 2019년 같이사는 대동사회를 꿈꾼 전라도, 북녘을 보듬자

△전라도 1000년, 대한민국 100년으로 이어지다. 2018년은 고려가 전국을 5도양계로 편제하며 전라도(全羅道)를 설치한지 1000년이 되는 해이다. 한편, 2019년은 1919년 3.1. 독립선언을 통해 잃었던 나라의 국권을 되찾은 3.1독립선언 100주년이다. 또 독립선언에 따라 새로운 나라의 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지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여기서 임시정부란 국가의 3요소인 주권국민영토 가운데 주권은 3.1.독립선언으로 회복되었지만 아직 국민과 영토가 일제에 의해 강점되었기 때문에 임시정부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완전 독립을 위한 지난한 여정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완전 독립을 위한 목표와 의지를 나타낸 자랑스러움과 아픔을 함께 품은 명칭이었다. 본란을 통해 필자는 전라도의 역사공간 특히, 전라북도가 고조선의 정통을 이은 마한의 역사가 출발한 곳이며 이를 계승해 고종이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을 총괄한다는 의미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 나라이름이 대한임을 밝혔다. 즉, 전라북도는 대한 국호발상지로서 전라도 천년의 역사공간이 대한의 역사로 계승되었기에 2019년 대한민국 100년의 역사를 더욱 자랑스럽게 맞이할 수 있는 곳이다. △함께사는 세상, 대동사회를 꿈꾸고 이루어 온 전라도 우리 역사를 통해 보았을 때 전라도 천년 그리고 대한 국호 발상지인 전라북도의 역사적 역할은 결국 함께 사는 세상인 대동(大同) 세계를 꿈꾸며 이를 이뤄왔다. 이는 이순신장군이 이야기한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 즉,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라는 단순명료한 언급에서도 확인된다. 즉, 호남은 나라의 곳간으로 백성을 먹여 살리는 기본 토대의 땅이었다. 특히, 전라북도 지역은 지평선이 보이는 광활한 호남평야로 상징되는 들의 농경문화와 서남해 연안 바다의 해양문화, 그리고 백두대간의 마지막 줄기가 내려와 형성된 산간지역이 함께 어우려져 우리 민족이 살아온 산, 들, 바다 공간의 특성과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농경문화에 근거한 나라의 곳간이자 열린 바다를 통한 자유로운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우리 민족을 형성한 핵심적 원형의 역사 즉, 고조선,마한,백제,가야,고구려,신라와 연결된 다채로운 역사가 전라도 권역에서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민족의 실체를 구성한 모든 역사체가 함께 어우러지고 합쳐져 민족의 원형을 구성한 핵심 공간이었다. 결국, 전라도지역은 한민족 원형의 역사 공간이자 민족문화 구현의 땅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가 있다고 파악된다. 이같은 역사 경험은 전라도지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역사의 창조와 대안을 통해 각 시기별 역할을 수행하였다. 즉, 후삼국의 쟁패과정에서 새로운 역사중심을 추구하여 고조선-마한-백제 역사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하였고 이는 후일 고조선-마한정통성에 근거한 대한국호의 발상지로서 귀결되었다. 한편, 고려, 조선시기에는 각 왕조 출현의 실질적 후원의 역할과 발상지로서의 역할을 통해 그 역량을 발휘하였다. 특히, 고려가 국난을 당한 시점에 나주로 왕이 피난하고 조선의 왜호란의 국난시기 전주가 피난수도로 기능해 왕조의 보호 역할을 수행해 그야말로 약무호남 시무국가의 역사적 소임을 수행하였다. 이 같은 전라도 지역의 시대적 소명의식은 대동(大同)으로 표현되었다. 대동이란 표현은 유교경전인 5경의 하나인 예기의 예운편에 기술한 이상사회를 말한다. 예기예운편에 있는 대동세계에 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대도(大道)가 행해지는 세계에서는 천하가 공평무사하게 된다. 어진 자를 등용하고 재주 있는 자가 정치에 참여해 신의를 가르치고 화목함을 이루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을 친하지 않고 자기 아들만을 귀여워하지 않는다. 나이든 사람들이 그 삶을 편안히 마치고 젊은이들은 쓰여지는 바가 있으며 어린이들은 안전하게 자라날 수 있고 홀아비과부고아, 자식 없는 노인, 병든 자들이 모두 부양되며, 남자는 모두 일정한 직분이 있고 여자는 모두 시집갈 곳이 있도록 한다. 땅바닥에 떨어진 남의 재물을 반드시 자기가 가지려고 하지는 않는다.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들은 자기가 하려 하지만, 반드시 자기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간사한 모의가 끊어져 일어나지 않고 도둑이나 폭력배들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을 열어놓고 닫지 않으니 이를 대동이라 한다. 이 같은 대동사회를 희구하는 지역적 특성은 조선사회의 문제가 심화되자 정여립의 대동계로 표출되거나 실학의 원형(유형원)과 완성형(정약용)을 이뤄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근대 동학농민혁명과 현대 광주민주항쟁을 통해 같이 사는 사회에 대한 희망과 목표를 제시하였다. △2019년, 전주비빔밥과 전라도 한정식의 배려 문화로 북녘을 보듬자. 대동사회를 추구한 전라지역의 특성은 전라도를 대표하는 비빔밥과 한정식에 잘 나타나고 있다. 모든 구성원에게 같은 밥을 먹을 수 있게 만든 비빔밥은 적어도 같이 사는 사람에게 인간적인 삶을 위해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의 문제임을 일깨워주는 음식이다. 또한 전라도 한정식으로 대표되는 음식문화는 배려와 나눔의 지혜가 숨어있는 음식이다. 엄청나게 많은 반찬과 음식으로 과연 이 음식들을 먹을 수 있을까? 남은 음식은 어떻하지라는 의문을 들게하는 한정식은 원래 한번만 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전라감영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하는 한정식은 다양한 구성원이 함께 식사하기 어렵자 한상에 차려진 많은 음식을 우리의 물림상 형식으로 순서를 나눠 3번정도 먹게 한 음식문화였다. 즉, 전라감사를 비롯한 윗분들이 먼저 먹고 그 다음 중간 서리들이 그리고 맨 마지막 최하층 나인 등이 음식을 먹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한정식은 처음 먹는 사람들이 나중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아 오히려 가장 나중에 먹는 사람들이 가장 잘 먹을 수 있게 배려한 음식문화였다. 즉, 먼저 먹는 사람들이 뒷 사람을 생각지 않고 좋은 음식을 대부분 먹어버리면 나중에 먹는 사람들은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미움과 증오를 먹지만 나중 사람을 위해 좋은 음식을 먹지않고 남겨두면 나중 사람들은 단순한 음식이 아닌 배려와 사랑을 먹게되는 것이 바로 물림상의 정신이고 전라도의 정신이었다. 결국 전주 비빔밥, 한정식에 숨은 같이 먹고 살기, 함께 배려하며 살기의 정신은 최소한 먹고사는 문제만큼은 함께 지켜주자는 마음의 실천이라고 생각된다. 이같이 모두가 함께 잘 사는 대동세계를 희망한 전라도의 특성은 마치 모든 자식들을 포용해 먹이고 길러주는 어머니의 마음과 역할에 비유할 수 있다. 이제 2019년은 같이 사는 세상을 꿈꾸고 실천한 전라도의 마음을 회복하여 현대사회가 가진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과 이기적 개인주의를 극복하고 미움과 갈등으로 삭막해진 우리 사회의 아픔을 치유하길 희망한다. 나아가 함께 해야 할 우리의 북녘동포까지 보듬는 뜻 깊은 역사적인 새해가 되기를 희망한다. 어머니 전라도의 마음으로.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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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2.27 20:04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17. 조선사회의 변혁과 대안의 땅, 부안 변산

△생거부안(生居扶安)의 역설 변산반도가 위치한 부안지역은 지리적으로 바다와 산, 그리고 평야가 어우러진 천혜의 공간이었다. 즉, 전라북도 남서부에 위치한 부안군은 호남평야의 남서부, 변산반도, 서해상의 섬이라는 세가지 요소로 특징지어 진다. 이 같은 평야, 산, 바다의 세 가지 요소가 복합되어 관련 산물이 풍족해 땅과 바다가 기름져 인심이 너그럽고 생활이 윤택하니, 고려의 문인 이규보는 목재가 풍부해 부안을 일컬어 나라의 창고(천부)라 하여 찬양하였다. 또한 부안은 영조시절 암행어사 박문수로부터 어염시초(물고기와 소금과 땔나무)가 풍부하여 부모 봉양하기 좋으니 생거부안(生居扶安)이로다라는 말로 살기 좋은 곳, 부안이라는 호칭을 들어왔다. 즉, 부안은 평야가 넓을 뿐만 아니라 염전이 발달하여 소금을 통한 고수익을 얻었고 바다가 가까워 풍부한 수산자원도 누릴 수 있었던 풍요로운 고장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천혜의 공간은 실상은 변산의 도적떼와 연결되어 공존하였던 고장이란 특성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특히 영조시기 변산적이라 하여 많은 도적이 변산속에 은거하여 나라의 골칫거리 지역이었다. 이 같이 부안의 풍요로움을 노리는 변산지역의 도적떼는 조선사회의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조선사회는 후기로 갈수록 세금수취의 문란과 신분제 동요로 백성들이 유민화되고 결국 도적으로 전락하였다. 이들은 삶의 한계에 다다라 사회에 수용되지 못하고 도적으로 내몰려 피난처인 변산의 깊은 산속으로 모여들었고 백성이 도적으로 몰락하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자 이러한 문제해결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조선 지식인들의 노력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사회 신분제문제와 대안을 제시한 홍길동전의 무대, 변산 가장 먼저 조선 양반사회가 갖는 문제점을 토로한 존재가 시대의 기린아 허균이었다. 허균은 부안 변산지역과 독특한 인연을 맺었는 데 공주목사 재임시 당시 부안 최고의 기생 이매창(계생)과 정분이 깊어 공주지역을 벗어나 그 일로 파직되었다고 한다. 이 때 부안에 온 허균이 변산 우반동 선계안골 즉, 현재의 선계폭포 근처의 정사암에 머물며 쓴 최초의 한글소설이 홍길동전이다. 홍길동전의 내용은 조선 양반사회의 희생자인 서얼출신 홍길동을 등장시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고 형을 형이라 말할 수 없었던 홍길동이 도둑으로 전락한 백성들을 모아 활빈당을 결성하고 어려운 백상들을 돕다가 조선사회에는 정착할 수 없어 결국 이들을 이끌고 새로운 삶의 터전 율도국으로 떠난다는 내용이다. 결국 홍길동전은 허균이 조선 양반 신분제 사회의 모순과 문제점 해결방식을 국가가 백성을 포용치 못하면 결국 백성은 국가를 떠난다는 엄중한 경고를 제시한 파격적인 소설이다. 또한 주목되는 것은 홍길동전의 집필지가 변산이며 소설에 등장하는 활빈당의 실체가 변산에 웅거한 도적들을 모델로 하였을 것이란 점에서 부안지역이 새로운 변혁을 꿈꾸는 터전이었음을 보여준다. △변산에서 조선의 빈부격차 해결 방안을 제기한 박지원 조선 영정조시대의 대표적 실학자인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실린 허생전은 변산반도를 무대로 빈부격차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가난한 선비 허생은 최고의 갑부 변부자에게 돈을 빌려 양반들의 제사상에 꼭 필요한 과일을 매점매석하여 큰돈을 벌었다. 또 양반의 상징인 갓 만드는 말총을 매점하여 엄청난 돈을 벌었다. 이 때 주위에서 쌀을 매점하여 더 큰 돈을 벌자고 하자 정색하며 과일과 말총은 양반들이 귀신에 제사지내고 허울 좋은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이 모든 것이 양반들에게만 필요한 것이고 일반 백성들에게는 없어도 되는 것이기에 양반의 돈을 벌어도 되었지만 쌀은 모든 백성이 먹어야 되는 것으로 이것을 매점하면 절대 안된다고 호통을 쳤다. 그리고 허생은 벌은 돈을 가지고 당시 가장 많은 도적떼가 모여있는 변산으로 가 도적들에게 돈을 주어 가정을 이루고 소를 사서 모이게 해 새로운 이상향의 땅을 찾아 떠나는 내용이 허생전의 내용이었다. 이는 부자의 여유돈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호구책을 마련해 함께 살자는 박지원의 대안이었으며 그 강상의 현장을 변산지역으로 구성하였던 것이다. △부안에서 조선 개혁의 실체를 만든 반계 유형원 허균과 박지원 사이에 살았던 조선실학의 시조 유형원은 조선 사회가 왜호란이후 피폐화된 상황을 개혁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집안의 사패지인 부안 우반동지역에 우거하며 조선 토지제도와 신분 문제 등 전반에 걸친 개혁 정책을 제시하였다. 개혁의 핵심은 몰락한 농민을 살리기 위해 신분제적 균전제를 주장하였다. 이는 토지를 국가가 몰수해 신분에 따라 나눠주어 먹고 살 수 있는 방편을 마련해주자는 것이었다. 또한 양반신분제 사회의 문제인 노비종모법과 서얼제 철폐를 주장하였다. 이같은 파격적인 주장은 부안지역에 살면서 조선사회의 모순을 목도한 유형원이 대안을 제시한 것으로 개혁안이 수록된 반계수록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0년이 지난 뒤에야 영조에 의해 수용, 유포되어 18세기 조선의 실학사상으로 나타났다. 이 같이 부안 변산지역은 조선사회의 풍요로운 터전이자 한계에 몰린 존재들이 모이는 곳이었고 결국 이들을 포용하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변혁과 대안의 공간이었다. 이 같은 상황은 이들 지역에 존재한 사찰의 분위기와도 연결되었다. 즉, 변산의 내소사와 고창의 선운사 그리고 장성 백양사로 연결되는 공간은 이른바 땡초라는 중들의 거점으로도 유명하였다. 일반적으로 땡초라는 표현은 파계한 승려같은 부정적인 존재를 지칭하는 표현이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못된 부자들을 혼내주고 불쌍한 백성을 도왔던 존재로도 나타나고 있다. 이는 조선사회에서 도적으로 전락되었던 백성 가운데 종교적으로 개심하였지만 과거 의적을 자임하던 기질이 남았던 존재들이 승려로서 의적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던 존재로 활동하였던 사실이 땡초라는 못된 양반들에게는 불한당같은 그러나 일반 백성에게는 도움을 주는 존재로 이 지역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역사적으로 되짚어보면 변산지역은 과거 백제부흥군의 마지막 거점인 주류성이 있었던 곳으로 이러한 백제의 부흥을 꿈꾸며 새로운 대안의 삶과 역사를 꾸려갔던 지역의 전통이 계승된 것으로도 파악된다. 변산반도지역은 현재 천혜의 공간으로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부각되고 있다. 특히, 새만금의 배후공간으로 새로운 가능성이 넘치는 땅이다. 과거의 아픔과 좌절을 새로운 희망과 대안으로 바꾸길 꿈꾸었던 지역의 역사를 바탕으로 이제 같이 살기를 이루는 새로운 가치와 희망의 공간으로 바꾸어야 할 때가 되었다. 특히 2023세계잼버리대회의 개최지로서 부안은 새로운 미래비전의 터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잼버리는 즐거운 놀이, 유쾌한 잔치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새로운 대동사회를 꿈꾸었던 허균, 유형원, 박지원 등 조선 지식인의 꿈이 세계 각지에서 모인 젊은 청년들의 잔치를 통해 부각되길 바란다.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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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2.13 19:59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미래천년 전라도 문화를 만들 전라감영

△천년 전라도문화의 원형 공간, 전라감영 고려시대 전주에서 지방관을 했던 문인 이규보는 전주(全州)는 완산(完山)이라고도 일컫는데 옛날 백제국(百濟國)이다. 인물이 번창하고 가옥이 즐비하여 고국풍(故國風)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백성들은 질박하지 않고 아전들은 모두 점잖은 사인과 같아, 행동거지의 신중함이 볼 만하였다라고 하여 전주를 백제의 수도이자 품격있는 지역으로 평하였다. 이 같이 전주는 고려시대인 1018년 5도양계의 행정체계에서 전라도 명칭이 처음 생긴후 전라도의 으뜸도시로서 역사의 중심에 자리했다. 이후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또 현재의 전라남북도와 광주시,제주도를 총괄한 명실상부한 호남제일성 즉, 전라도 관찰사가 머무는 감영도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같은 역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이 전라감영이었다. 전라감영(全羅監營)은 조선시대 전라도를 다니며 국가행정이 잘 되고 있는지, 백성을 잘 살고 있는 가를 관찰한 관찰사(=감사)가 정무를 보던 관청이다. 조선시대 전라감영이 설치된 시기는 조선초기인 태종연간 이후로 추정되고 있다. 관찰사의 정주 업무 수행에 따라 여러 가지 관아시설들이 건립되고, 감영의 기능 확대에 따라 많은 관아건물이 추가로 건립됨에 감영구역이 형성되어갔다. 전라감영은 1896년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전라북도 관찰사가 관할하는 관찰부로 바뀌었다가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탄과 함께 폐지되고, 그 관아시설은 전라북도청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21년 선화당앞에 2층 633평규모의 전라북도청이 신축되었고 1937년 3층, 630평 공간의 전라북도 산업장려관(구 의회동) 이 신축되어 감영의 면모가 크게 훼손되었다. 1951년 선화당옆 창고화재로 선화당과 전라북도청사가 전소되어 1952년 11월 현재의 3층 1752평의 전라북도청 본청 건물이 신축되었고 1984년 서편부지에 4층의 전북경찰청(2676평) 공간이 세워졌다. 전라감영복원논의는 도청이전과 연결되어 1996년 제기되었고 2005년 7월 전라북도청이 신도심으로 이전하면서 본격화되었다. 2006년 선화당위치 확인을 위한 발굴이 진행되었고 감영복원을 위한 용역이 진행되었다. 특히, 2011년 전주역사박물관의 노력으로 선화당의 정확한 위치가 도면으로 확인되고 전라북도청사 등이 철거되었다. 이후 2016년 전라감영복원을 위한 본격적인 발굴을 통해 선화당과 관풍각, 내아 및 비장청 등 관련 공간이 확정되어 복원공사가 진행되어 2019년 상반기 복원될 예정이다. 관찰사의 통치공간과 연결된 공간이 선화당, 관풍각, 비장청, 내아 등이다. 이와 관련된 공간은 주로 현재 복원이 진행되고 있는 동쪽공간으로 맞은 편인 서쪽에는 아전 등 행정실무 공간이 분포하며 남쪽 공간은 주로 군사관련 공간이 분포하였다. 이와 달리 전주의 문화와 관련된 공간들은 서편 공간에 분포하고 있다. △전라감영, 한국 전통문화콘텐츠의 보물, 세계문화유산의 디딤돌로 만들자 전라감영은 조선왕조 호남지방 최고 행정기구로서 현재의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그리고 제주도를 관할한 행정, 문화, 경제의 중심공간이었다. 특히, 조선왕조 발상지로서 한국 전통문화의 중심도시인 전주를 대표하는 역사문화공간이다. 또한 전라감영은 전라도문화를 대표하는 공간이다. 즉 전주로 상징되는 전라도의 풍류문화와 완영본으로 대표되는 출판인쇄문화와 전주의 부채, 전주한지 등으로 상징되는 지식창출의 본영같은 역할이 감영의 인방, 지소, 선자청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판소리대사습의 발상지로서 전라도문화를 대표하는 예술문화의 중심이었다. 판소리 대사습은 전라감영과 길 하나사이를 두고 있는 전주부영 즉, 지금의 도청과 시청의 통인들이 섣달 그믐에 망년회형식의 잔치를 벌일 때 서로 뛰어난 소리꾼을 경쟁적으로 불러 행사를 하면서 소리꾼의 소리가 어디가 더 좋았다는 것을 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소리경연이 벌어진 전통이 계승된 것이다. 이곳이 바로 서편부지의 통인청이었다. 즉, 전라감영은 정치, 행정 및 지역 경제의 중심 통치공간이자. 군사 경찰 및 사법 행정의 핵심지역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라도 문화가 만들어져 전파된 문화창조 공간이었다. 이들 공간이 서편부지에 대부분 밀집되어 있다. 또한 전라감영은 감사와 관인, 아전, 노비까지 상물림을 통해 함께 밥상공동체를 이루며 음식을 공유하였던 대동의 음식문화 공간이었다. 그리고 도청에 해당하는 감영과 시청에 해당하는 부영의 관인들이 서로 소리꾼을 불러 판소리경연을 통해 문화 주도권다툼을 벌였던 판소리 대사습이 시작된 공간으로 전라감영은 전주의 맛과 멋을 생산하고 소비하였던 공간으로서 한국 전통의 품격과 문화콘텐츠를 대표하는 공간이었다. 또한 지역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한 약재가 매매되던 전주약령시 공간이 감영앞 공간으로 전통의학과 치료공간이기도 하다. 이곳 역시 서편부지에 모두 모여있다. 특히, 고전 소설 콩쥐팥쥐의 무대로서 전라감사의 부인이 된 콩쥐와 이를 시샘한 팥쥐의 후반부 이야기 무대가 내아이기도 하다. 현재 전라감영 복원범위는 선화당과 내아 등 일부 공간에 국한되고 있다. 향후 정문인 포정루와 앞서 언급한 통인방, 의국, 지소, 인출방, 선자청과 함께 등 공간이 확대되면 면모가 더욱 갖춰질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현재 완산경찰서 공간인 ⑥중영은 전라도의 군사, 경찰업무를 총괄하는 공간으로 국가방위와 치안의 상징이란 점에서 현재까지도 계승된 경찰청공간과의 역사적 연계성이 확인된다. 이 같은 공간들이 현재 구체적인 복원계획이 잡혀있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 이제 2019년 조선왕조의 지방 행정공간이었던 전라감영복원이 이뤄지면 왕권 상징의 공간이었던 객사와 서울 종묘와 위격을 같이하는 의례공간인 경기전, 호남 최대 국가교육공간인 향교, 서민생활 공간을 대표하는 한옥마을 그리고 전주부성 공간인 풍남문과 4대성문지, 성벽길 등을 망라한 도시공간유적을 포괄하여 조선왕조 지방행정공간 유적군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한다면 전주의 역사문화적 가치의 의미가 명실상부하게 부각되어 앞으로 미랴 천년 전라도문화를 대표할 공간이 되리라 생각된다. 이제 전라감영 복원을 시작으로 세계문화유산도시 전주를 추진하자. 조법종(우석대 역사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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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01 19:25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전라북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역사와 신화의 땅

△시골출신 이성계, 명궁수로 고려 영웅이 되다. 태조는 어릴때부터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다. 어느 날엔 화살 한발로 까마귀 5마리를 한 번에 잡은 적이 있었다. - 용비어천가- 동녕부의 추장 고안위가 산성에 웅거하면서 항전을 하자?이성계는 편전(애기살)을 이용하여?성의 병사들 얼굴에 70발을 쏴 모두 맞췄다. -태조실록- 고려 말 수도 개경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동북면(현재의 함경도) 시골출신 이성계는 스스로 왕이 되어 새로운 왕조 조선을 세웠다. 그는 뛰어난 체력과 무예, 그리고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전략과 전술로 왕이 될 수 있었다. 이성계는 1335년 화령부(현 영흥)에서 태어나 무예, 특히 궁술에 뛰어나 태조실록과 용비어천가에서도 자주 언급될 정도로 명궁 소리를 들었다. 특히, 고구려 시조 주몽이 도읍한 천혜의 요새터에 자리한 여진족을 공격할 때 편전으로 이들을 제압한 사건은 당시 여진인에게 경외심을 갖게 한 대표 사례였다. 이 같은 고구려의 명궁 전통을 계승한 이성계는 이후 홍건적의 고려침입시 선봉에서 맞서고 여진추장 나하추, 고려반군의 침입때도 궁술로 적장을 쓰러뜨려 고려의 맹장으로 부상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새로운 역사창출의 계기는 전라북도권에서 이뤄졌다. 당시 일본은 남북조 시대의 혼란기로 일부 영주들이 군사를 이끌고 고려나 중국 해안을 침입해 노략질을 일삼았다. 특히, 1380년(우왕 6)에는 아지발도(阿只拔都)등이 이끄는 왜구가 함양과 경산, 상주까지 올라와 노략질을 했는데, 이성계가 이들을 운봉에서 맞아 섬멸해 고려의 영웅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남원 운봉의 황산대첩(荒山大捷), 신화를 만들다. 1380년 8월 최무선의 화포로 왜구 선박 500여척을 대파한 진포대첩은 역설적으로 왜구를 더욱 잔혹하게 만들었다. 앞서 먼저 육지에 상륙한 왜구의 본진은 배를 잃자 독안에 든 쥐가 발악하듯 더욱 기세를 높여 함양, 남원을 거쳐 운봉 인월역에 주둔하며 장차 고려 수도로 북상하겠다며 기세를 높였다. 고려조정은 이때 여진토벌에서 위용을 떨친 이성계장군을 삼도순찰사로 임명해 운봉을 넘어 황산(荒山)에서 왜구를 대적케 하였다. 이때의 전투에서 이성계의 신화가 창출되기 시작한다. 태조가 남원(南原)에 이르니해가 이미 기울었다적장 가운데 나이가 15, 6세 되는 자가 있었는데,흰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며 말달려 돌진하면 향하는 곳은 모두 쓰러져 감히 당해낼 자가 없었다. 아군에서 아지발도라고 부르며 다투어 피했다.아지발도는 갑주, 목가리개, 면갑을 썼으므로 활을 쏠 틈이 없었다. -태조실록- 내가 투구의 꼭지를 쏘아 투구를 벗길 테니 너(이두란)는 바로 쏴라하고는 말을 달려 활을 쏘아 투구를 정통으로 맞히니 투구의 끈이 끊어져 투구가 비스듬히 벗겨졌다. 아기발도는 급히 투구를 바로했다. 태조가 다시 쏘니 또 꼭지에 맞아 드디어 투구가 떨어졌다. 이두란이 쏘아 죽였다. 이에 적의 기세가 꺾였다.드디어 사면이 무너져서 적을 대파하였다.적들이 통곡하는 소리가 1만 마리의 소가 우는 것 같았다.냇물이 다 붉게 물들어 6, 7일 동안 색깔이 변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마시지 못하고노획한 말은 1천 6백여 필이며, 병장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처음에는 적이 고려의 군사보다 10배나 많았는데 오직 70여인만이 지리산(智異山)으로 달아났다. -태조실록- 태조실록에 나타난 전황은 구체적 군사수가 명기되지 않았지만 1만에 달하는 왜구를 10분의1에 달하는 이성계군대 1000여명이 물리친 기적적인 대승으로 전해졌다. 이는 사료에 적이 10배나 많았다는 표현과 1만마리 소의 울음 소리같았다는 것이 연결되어 자연 1만여 왜구를 1000명의 이성계군대가 물리친 것으로 확정된 것이다. 10배의 적을 물리친 것은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구국의 영웅의 역할에 부응한 표현이었다. 이에 더해 이성계의 신적 능력이 추가되어 신화가 더욱 다채로와 졌다. 앞서 신궁의 역량에 더해 하늘의 신도 감복하여 함께하는 존재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즉, 해가 이미 기울은 상황에서 아지발도의 투구를 벗겨 사살한 사건은 신의 도움으로 어두운 밤 달을 끌어올려 아지발도를 활로 맞춰 물리쳤다는 신화로 구성되어 태조의 신격화가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확정하기 위한 기억장치로 관련지명을 바꿔 역사로 정착시켰다. 즉, 왜구를 물리친 인월의 고려시대 표현은 인월(印月)이었다. 이는 부처의 교화가 세상 곳곳에 비친다는 월인천강(月印千江)에서 따온 불교적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후 조선의 기록에서는 이성계 장군이 달을 끌어 올렸다는 의미인 인월(끌인引+달월月)로 바꾸어 태조의 신화를 역사로 정착시켰다. 또한 불을 이용해 화공으로 은신한 왜구를 물리쳤다고 하여 바람시기(혹은 바람세기)라 불렀던 곳을 인풍(引風)이라 하여 신의 도움으로 달을 띄우고 바람을 일으키는 하늘과 소통하는 능력자 즉, 왕과 같은 존재로 이성계장군이 부각되었다. 이를 보다 입증하기 위한 기억장치로 냇물이 (왜구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는 기록은 냇가의 너럭바위에 피가 스며 붉게 되었다는 피바위 즉, 혈암(血岩)으로 명명되었다. 후일 이곳을 지나던 다산 정약용은 자세히 살펴보니 이는 본래부터 붉은 돌이지 피로 물들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라고 간파하고 있었지만 태조신화의 상징물이 되었다. 한편, 아지발도라는 표현은 우리말 아기를 뜻하는 아지와 몽골어로 영웅을 뜻하는 바투가 합쳐진 말로 아기장수라는 고려인의 표현이었다. 즉, 일본이름이 아니라 몽골어 영향을 받은 고려말의 뛰어난 어린 장수라는 표현이었다. 그런데 아지발도를 처음엔 포용하려한 태조의 마음과 어쩔 수 없이 물리친 사실을 강조하여 태조의 포용력과 부하를 아끼는 모습이 극대화되기도 하였고 이후 선조 때, 고종때 태조고사로서 언급되며 일본에 대한 극일적 상징어로 사용되었다. △전라북도권에 퍼진 태조의 신화, 조선의 발상지로 자리잡다. 한편 전라북도 진안 마이산은 태조가 천명을 받은 공간으로 확정된다. 태조 이성계가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있을 때 어느 날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으로 된 자(금척金尺)을 건네 주면서 이 금척으로 장차 삼한 강토를 헤아려 보라.고 한다. 이후 황산의 왜구를 격퇴하고서 개선 도중 이성계는 진안 마이산을 들르게 되는데, 이 산을 본 이성계는 깜짝 놀란다. 산의 풍광이 어릴 적 꿈속의 선인으로부터 금척을 받았던 바로 그 곳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 연유로 마이산은 조선조 창업 때 영산으로 대접받아 태종이 제사지내기도 하였으며 조선창업의 경사와 마이산의 풍광을 노래한 내용이 태조 2년에 제작한 몽금척(夢金尺)악장과 춤이 만들어졌다. 이 같은 운봉의 황산대첩은 전승이후 하늘의 계시를 들었다는 임실의 상이암(上耳庵) 전설과 장수에서는 기도를 드리다가 하늘을 보니 큰 봉황이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는 뜬봉샘 설화 등으로 연결되어 전라북도는 태조신화의 중심이 되었다. 특히, 전주 오목대에서 승전연에서 태조가 불렀다는 대풍가와 이에 대비되는 고려 충신 정몽주의 충절의 시는 그 실체와 역사인식의 특성을 함께 거토해야할 역사자원이다. 이같이 전라북도 전역에 전하는 태조의 역사와 신화는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는 민중의 역사인식이 함께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체계적인 조사와 이를 계승 발전시킬 방안이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 백제-후백제의 터전에서 고려를 이어 새왕조를 창출한 조선의 발상지 공간으로서 전라북도의 위상과 역사적 의미를 체계화하고 미래 역사의 터전을 만들기 위한 방안이 도민과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조법종(우석대 역사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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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04 19:27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진포대첩으로 나라 구한 ‘군산’-왜구 물리치고 일제 쌀 수탈에 항거한 역사현장·의미 살려야

△고려조선의 대혈맥, 군산 군산은 우리 역사 전개과정에서 해상교류의 중심 거점으로 자리한 곳이다. 이미 백제, 후백제 및 고려이래 서해안 항로는 대중국 교류의 중심이었다. 특히, 옛 군산진이 있던 선유도일대가 그 중심이었다. 한편, 고려가 건국된 이후 서해안 항로는 나라의 생명줄과 같은 역할이 새롭게 부각되었다. 즉, 고려와 조선왕조의 수도인 개경과 한양으로 국가의 세금과 주요물자수송을 위해 연안항로를 이용하면서 서해안 항로는 이후 1000여년이상 우리 역사에서 국가운영을 위한 생명줄이 되었다. 이때 쌀 생산의 중심지역인 호남평야의 출구로서 부각된 곳이 금강어귀인 군산지역이었다. 군산지역은 고려시대에는 진포(鎭浦)로 불렸는데 고려초 성종이 호족들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남방에 12조창을 두었다. 이때 전라북도권의 중심 거점으로 임피지역의 진성창을 관할한 진포를 조종포(朝宗浦)라 이름하고 1천석을 실을 수 있는 대형선인 초마선(哨馬船) 6척을 배정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성종이 이름을 조종포(朝宗浦)라 한 것이다. 이는 조정의 으뜸이란 뜻으로 그 중요성을 반영한 명칭으로 생각된다. 이후 군산은 조선시대에도 가장 중요한 조운의 중심으로 진성창이 2번째로 규모가 큰 23척의 조운선이 유지되었을 정도로 확대 발전되었다. 그런데 이곳이 고려 후기 국력이 쇠해 방비가 약해지자 왜구들이 남해를 거쳐 군산지역까지 진출하여 집중적인 약탈을 자행하는 지역이 되었다. △고려를 구한 최무선의 진포대첩 조선을 건국한 태조이성계의 역사가 기록된 태조실록4년조의 기록에는 한 신하에 대한 특이한 기록이 남아있다. 즉, 고려말 현재의 군산지역인 진포에서 화포를 이용해 왜구를 대파한 최무선의 졸기(죽은 신하의 기록)가 그것이다. 이 기록이 주목되는 것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변방인 함경도지역의 일개 장수에서 고려를 구한 최고의 명장으로 등장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준 최무선에 대한 평가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즉 고려 우왕6년(1380) 9월 남원 운봉지역까지 들어와 고려의 큰 근심이 된 왜구를 토벌한 이성계의 위업은 실상 한달 앞선 8월 현재의 군산지역인 진포에 침입한 왜선 500여척을 모두 불살라 없앤 최무선의 진포대첩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뚜렷이 밝혀 화약발명가 최무선의 역사적 역할이 부각되고 있다. 최무선이일찍이 말하기를 왜구를 제어함에는 화약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다. 최무선은마침내 화약을 만들어 내었다. 또 화포를 만들고전함의 제도를 연구하여모두 만들어 내었다. 고려 우왕 6년(1380)인 경신년 가을에 왜선 5백여 척이 전라도 군산인 진포(鎭浦)에 침입했을 때최무선이 화포를 발사하여 그 배를 다 태워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는 육지에 올라와서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노략질하고 도로 운봉(雲峯)에 모였는데, 이 때 태조가 병마 도원수로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왜구를 한 놈도 빠짐없이 섬멸하였다이것은 태조(太祖)의 덕이 하늘에 응한 까닭이나 최무선의 공이 역시 작지 않았던 것이다. 위 기록은 고려의 생명선인 조운항로의 물자를 약탈해 고려의 근간을 위협하던 왜구를 가장 효과적으로 격파한 최무선의 공에 대한 평가이다. 특히, 진포대첩으로 배를 잃은 왜구가 잔악하게 저항할 때 이를 토벌한 태조 이성계의 위업과 대등하게 최무선의 공을 조선 사관들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은 신왕조 조선에 협조치 않고 고려에 충성한 최무선에 대한 당시의 인식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깊다. △조선에서 꽃 핀 최무선의 화약신병기 우리나라에서 화약과 화기를 독자적으로 제조하기 시작한 시기는 최무선의 건의에 따라 화통도감이 설치된 1377년(우왕 3년) 이후이다. 화약 제조에 성공함으로써 화통도감을 맡게 된 최무선은 곧 화약을 넣어서 발사할 수 있는 화포 제작에 착수하여 다양한 화포를 개발하였다. 이렇게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과 무기는 고려 후기 왜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최선책의 하나였다. 고려군은 최무선의 화약과 화포로 1380년(우왕 6년)의 진포 싸움과 1383년(우왕 9년)의 진도 싸움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칠 수 있었다. 이는 세계 최초로 함선에서 화포를 활용한 전투로서 세계사적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다. 또한 이성계장군이 왕조 교체의 틀을 마련한 운봉지역 황산(荒山)대첩도 화포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왕조 교체후 화기를 이용해 반대 세력이 봉기할까 두려워 집권 직후 화통도감을 폐지해 화약 제조기술은 잠시 침체되었다. 그러나 태종의 장려책과 최무선의 아들인 최해산의 노력으로 재개되고 세종대에는 사정 거리 증가, 연발기능 개발, 화기성능 개선, 사격술 개량 등 화기의 성능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 같은 화약무기의 발달은 왜구의 억제뿐 아니라 여진 정벌과 서북 변경을 개척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계 최초 화포 함선전투가 진행된 군산에서 그 의미와 역사성을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고 그저 형식적으로 전시된 구식 대포만이 그 흔적으로 남아있어 안타깝다. △식민지 근대로 덮인 진포대첩 역사현장 군산지역은 고려, 조선을 거치며 국가의 생명선 역할을 하였다. 특히, 임진왜란시기 이순신 장군이 약무호남 시무국가(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없어졌을 것이다)라 하여 호남이 국가 식량의 중요 생산지임을 강조하였는데 그 운송 거점이 군산이었다. 그런데 조선이 식민지화된 후 호남은 일본인들을 먹여 살리는 쌀 생산기지로 전락되고 일본으로 쌀을 실어간 군산은 가장 번화한 식민지 근대도시로 성장하였다. 최근 군산은 근대도시 군산이란 콘셉트로 식민지 도시의 성격을 활용한 문화관광 전략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막상 고려, 조선의 대혈맥이자 생명줄이었던 군산의 의미와 진포대첩을 통해 극일(克日)한 역사, 쌀 수탈에 항거한 군산지역의 항일(抗日)의 역사 현장과 의미는 보이지 않고 식민지 근대화론적 이미지만이 부각되고 있다. 이제 새롭게 출범하는 민선 7기에는 이 같은 군산의 역사정체성 내용을 새롭게 검토하여 진정한 고려, 조선의 대혈맥 군산의 위상과 역사성이 회복되길 기대한다. 그 첫 사업으로 개통을 앞두고 있는 군산과 장항을 잇는 동백대교 명칭을 고려를 구하고 조선개국을 마련한 진포대첩을 기리는 진포대첩교로 명칭 변경하는 것을 적극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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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23 20:02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흙으로 만든 최고 명품, 고려 상감청자 만들어낸 전북 - 왕·귀족들 사용한 명품…자기 본고장 송나라에 역수출

△인간이 만든 최초 발명품, 토기 인간이 만든 첫 발명품 토기는 1만3000여년 전 기온이 따뜻해져 현재와 같은 해안선과 육지의 모습이 만들어졌을 때 새롭게 발명된 도구이다. 인간이 진흙을 불로 구우면 단단해진다는 화학적 변화를 깨닫고 이를 활용해 토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토기는 왜 만들었을까? 교과서적인 답은 저장이다. 안타깝게도 이 답은 중근동 토기의 유래이지 동북아 토기의 유래는 아니다. 최근 고고학적 성과에 따르면 동북아지역은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토기를 만든 지역으로, 불로 음식을 끓이고 삶아 먹을 수 있는 새로운 도구인 토기가 탄생한 곳이다. 즉, 동아시아 지역의 토기는 도토리를 물에 담가 떫은 맛이나 독성을 없애거나 조개류 익혀먹기, 물고기 익히기와 국물, 기름추출 등을 위한 조리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또 음식 저장도구로도 사용되었다. 이 같이 토기는 인간에게 불을 가열해 음식을 조리하거나 곡식이나 가루 등의 식재료 저장 도구로 사용되었다. △토기, 도기, 자기는 어떻게 다를까 토기를 처음 만들 때는 야외에서 장작불에 구웠다. 이같이 노천에서 토기를 구우면 붉은 색이나 갈색계통의 토기가 만들어진다. 이는 흙속의 철분이 산소와 결합에 나타난 현상이다. 굽는 온도는 600~800℃로 토기는 성긴 조직을 갖게 되어 깨지기 쉽고 물을 담으면 물이 배어나오게 된다. 이 같은 토기는 이후 청동기시대까지 큰 변화 없이 제작되게 된다. 이후 철기가 만들어지면서 1000℃ 이상의 온도를 올릴 수 있게 되었고 폐쇄된 가마에서 토기를 굽게 되면서 토기와는 다른 회색빛을 띠고 표면이 훨씬 치밀해져 물이 새나가지 않는 도기가 나타나게 되었다. 도기의 색이 황갈색, 회흑색이 되는 것은 밀폐된 가마에서 고온으로 장시간 굽는 과정에서 산소를 모두 태우고 환원화된 상태에서 재가 섞이고 흙속의 광물인 장석 등이 녹아 조직이 치밀해져 나타난 현상이다. 삼국시대인 백제의 토기들이 사실은 이 같은 고온에서 구원낸 도기류들로 회색의 치밀한 도기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삼국시기에 중국으로부터 전혀 새로운 자기가 수입되었다. 자기란 1300~1500℃ 온도에서 구운 것으로 순도 높은 백색 고령토로 모양을 만들어 가마에서 초벌구이를 한 다음 거기에 장석이 섞인 식물성 잿물 등의 유약을 입혀 다시 가마에서 1250℃ 이상으로 두 번째로 구우면 유리질 표면을 갖는 새로운 자기가 탄생한다. 이 기술은 중국만이 보유한 기술로 수백년 동안 다른 나라에는 전해지지 않은 특급 비밀이었다. 이 자기 기술은 중국에서 개발된 이후 세계에서 두번째로 10세기경 전라도 지역에서 처음으로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푸른 하늘색(비색)의 청자, 전라도에서 만들어지다 고려 청자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자기문화의 시작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즉, 시작시기와 기술개발의 주체 등에 대해 장보고세력에 의한 월주요기술이전, 후백제 견훤에 의한 기술수용설 또는 고려초기 중국의 오월국 붕괴 이후 기술자 이주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중요한 것은 중국 자기 기술이 현재의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수용되어 그 거점이 대표적으로 초기 순청자의 경우 전남 강진과 후기 상감청자의 경우 전북 부안으로 나뉘어 발전하였다는 인식이다. 그런데 최근 전북의 진안 도통리에서 초기 청자가마가 호남 최대규모로 확인되어 주목된다. 특히, 이곳에서 발견된 초기 벽돌가마는 호남 최초의 벽돌가마이자 초기 청자가 국내에서 생산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조성된 것으로 판단되며 한 기의 가마가 벽돌가마에서 진흙가마로 변화된 사례는 우리나라 청자가마에서 확인된 최초로 청자가마의 변천과정과 구조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가마 주변에 있는 폐기장에서는 한국식 해무리굽완, 잔, 잔받침, 주전자 등 다양한 초기 청자와 다량의 벽돌 등 요도구들이 출토되었다. 이는 후백제 시기와도 연결되어 초기 청자수용에 대한 후백제 기원설로 파악될 수 있다는 점에서 향후 연구를 통해 확인된다면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최고의 고려 상감청자, 부안에서 제작 우리나라 도자기 제작기술 중 가장 독창적이면서 뛰어난 것은 청자의 마지막 단계인 고려 상감청자이다. 상감청자는 바탕에 무늬를 새기고 다른 종류의 흙을 메워 넣는 방법으로 나전칠기나 금속공예의 입사기법에서 이전부터 볼 수 있었던 것인데, 이를 고려시대에 도자기에 적용한 것이다. 특히, 고려 상감청자가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곳은 전라북도 부안의 유천리, 진서리이다. 이곳의 도요지는 1963년에 사적 69호, 70호로 지정되었다. 유천리 일대가 고려청자의 대표적 산지였던 것은 좋은 흙과 완성품을 운반하기 좋은 바다길, 그리고 풍부한 연료인 소나무가 많은 천혜의 지역이었다. 부안은 고려청자의 2대 생산지로서 12세기 중엽에서 말엽까지의 최전성기에는 80여개의 가마가 있었을 만큼 대규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도굴되기 시작한 이 곳 가마터는 우수한 파편을 지닌 요지의 퇴적층은 거의 파괴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나온 수백 점의 고려자기는 대부분 일본으로 빼돌려졌다. 유천 가마터에 대한 발굴 조사는 1967년 국립박물관 조사반에 의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이 때 보물 제346호로 지정받은 청자상감진사모란문매병 등 국보, 보물급 문화재 가치를 지닌 청자가 수십 점 발굴되었다. 부안의 가마터에 대한 연구는 지난 이화여대 및 원광대 박물관에 의해 조사 및 가마 유구에 대한 발굴이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바로 부안 유천 도요지에서 생산된 고려 상감청자들은 여타의 도요지에서 생산된 것들 보다 명품들로서 왕이나 귀족들이 사용하거나 대외 선물용으로 사용됐던 최상품이었고 특히, 자기의 본고장 송나라 등 중국에 역수출된 최상품이었다. 이같이 전라북도는 우리나라의 흙그릇이 토기에서 도기로 그리고 자기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가장 최정점인 청자와 상감청자를 만들어낸 지역이다. 이 같은 새로운 기술의 도입에 가장 앞서고 또 이를 발전시켜 종주국을 능가하는 새로운 작품을 창조해낸 역량을 새로운 지역의 미래세대에게 전해 혁신과 창조역량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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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26 20:02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고려문인 이규보, 전북서 삼국시대 자취 찾다 - 첫 관직 나선 전주서 고승들 자취 찾아가 기록으로 남겨

△청년 이규보, 첫 부임지 전북도를 거닐다 고려시대 대표적 문인 이규보(1168-1241)는 고구려의 웅혼한 기상을 전하는 동명왕편을 기록하여 잊혀질 뻔한 우리 역사의 원형을 전해주었고 8000여편의 시를 남긴 고려 최대의 지식인이다. 그런데 이규보가 전라북도지역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어려서 천재소리를 듣던 이규보는 정작 과거에 4번이나 낙방하고 간신히 22세에 사마시에 급제했지만 10여년 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못해 세상을 한탄하다 32세 되던 1199년 6월 첫 부임지인 전주목에 서기직으로 임명되었다. 따라서 이규보 입장에서 전주는 인생의 첫 출발지로서 또 좌절과 울분에 차있던 마음을 풀어준 희망의 땅이었다. 그 같은 마음을 보여주듯 이규보는 전주목 관할구역인 현재의 전라북도권역에 출장을 다니면서 유려한 글 솜씨로 기행수필인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등 많은 시와 글을 남겨 820여년전 전라북도의 생생한 기록을 전해주고 있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이규보가 전북 지역의 고구려, 백제, 신라 스님들이 머물렀던 사찰들을 찾아 관련기록을 남겨놓은 것이다. △고구려 평양에서 백제땅 전주로 날라온 비래방장을 가다 이규보는 전주에 부임하자 전주근처 고달산에 있는 고구려 승려 보덕이 세운 경복사의 비래방장을 찾았다. 비래방장(飛來方丈)은 문자 그대로 날라온 암자라는 뜻이다. 보덕은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도교를 진흥시키자 제자들을 거느리고 하룻밤새 백제땅으로 날라왔다고 전해졌다. 이 사건은 워낙 유명해 신라시대 최치원도 관련 기록을 남겼는데 이규보는 경복사를 찾아 보덕화상의 초상화도 보고 비래방장에 갔다. 경복사는 우리나라 불교 열반종의 종찰로 그 위세가 고려-조선에 걸쳐 유지되었는데 1597년 임진왜란때 승병의 중심지 역할을 하다 일본군이 파괴하여 지금은 폐사되었다. 현재 완주군 고덕산에 폐사지로 남아있는데 최근 몇차례 발굴을 통해 대형석축 건물지와 경복사(慶福寺), 중도종(中道宗) 등의 명문와가 출토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한강이남지역에 유일한 고구려승려가 만든 사찰이 전라북도에 존재하였으며 670년 고구려 유민들이 대거 전북지역으로 옮겨와 살게 된 배경으로 이 경복사가 상정된다는 점이다. △백제부흥 거점에 자리한 신라의 원효방 이규보가 찾은 두 번째 승려의 자취는 변산의 원효방이다. 변산 소래사에 갔는데, 다음날 원효방에 이르렀다. 높이가 수십 단이나 되는 나무 사다리가 있어서 발을 후들후들 떨며 찬찬히 올라갔는데,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속어에 이른바 사포성인(蛇包聖人)이란 이가 옛날 머물던 곳이다. 남행월일기 이규보는 신라의 유명한 승려 원효의 자취를 변산에서 찾았다. 원효는 신라의 대표적 승려로 전국에 많은 흔적이 전하지만 대부분 후대에 갖다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규보가 방문한 변산 원효방은 당시에 이미 원효초상이 모셔져 있어 실제 원효가 왔던 곳임을 알려준다. 현재 개암사 뒤 산 정상 부분에 원효방 흔적이 전하는데 이곳은 앞서 살펴본 백제부흥군 거점인 주류성으로 파악되는 우금산성 지역이다. 문제는 느닷없이 왜 신라 승려 원효가 변산지역에 나타났는가이다. 여기서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함께 등장하고 있는 존재인 사포성인이다. 사포는 뱀복이로 불리는 죽은 이들을 사후세계로 데려가는 민간신이었다. 즉, 신라가 백제부흥군을 진압한 이후 원효와 사복을 파견해 진압과정에 죽은 자들을 위한 위무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이 이규보는 원효와 사포의 자취를 찾으며 백제부흥군의 잔영을 추론해 주류성위치비정에 중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백제승려 진표의 불가사의 암자 부사의방 한편 이규보는 원효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진표의 불가사의한 수행암자를 찾았다. 이른바 불사의 방장(不思議方丈)이란 것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서 구경하였는데, 그 높고 험함이 원효방의 만배였고 높이 100 척쯤 되는 나무사다리가 곧게 절벽에 걸쳐 있었다. 3면이 모두 위험한 골짜기라, 한번만 헛디디면 다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다리가 와들와들 떨려 내려가기도 전에 머리가 벌써 빙 돈다. 그러나 예전부터 이곳의 빼어난 정경을 익히 들어오다가 이제 다행히 일부러 오게 되었는데, 만일 그 방장을 들어가 보지 못하고 또 진표대사의 상(像)을 뵙지 못한다면 뒤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그래서 어정어정 기어 내려가는데, 발은 사다리 계단에 있으면서도 금방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들어가서 부싯돌을 쳐서 불을 만들어 향(香)을 피우고 율사(律師)의 진용(眞容)에 예배하였다. 그 방장은 쇠줄로 바위에 박혀 있기 때문에 기울어지지 않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바다 용이 그렇게 한 것이라 한다. 남행월일기 백제가 망한 지 100여 년이 지난 8세기 중엽 통일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인 진표(眞表)는 현재의 김제지역 출신으로 송고승전에는 백제인으로 기록되어 금산사를 중심으로 미륵신앙을 중흥시킨 승려다. 그의 미륵신앙은 견훤과 궁예에게 연결되어 후삼국 시대 새로운 사회의 중심신앙을 마련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진표가 중이 되는 계기를 전하는 다음 내용이다. 진표는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았다. 12세 때 사냥을 나갔다가 밭둑에서 개구리를 잡아 버드나뭇가지에 꿰었고, 사냥이 끝난 뒤에 가져가기 위하여 물속에 담가두었다. 그러나 집으로 갈 때에는 다른 길로 갔다. 이듬해 봄 다시 사냥을 갔다가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고 그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30여마리의 개구리가 줄기에 꿰인 채 그때까지 살아서 울고 있었다. 지난해의 일을 생각해낸 그는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출가를 결심하였다. 삼국유사 위 기록에 나타난 진표가 자신이 꿰었던 개구리를 풀어주고 스님이 되었다는 설화는 망한 나라의 백성들은 마치 나뭇가지에 꿰어져 도망가지도 죽지도 못하는 처지에 있는 개구리와 같은 존재로 이들을 종교적인 방법으로 해방시키라는 진표의 사명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된다. 즉, 출가 후 진표는 자신의 소명을 위해 극단적인 고행을 하는데 그 장소로 벼랑 끝에 매달린 바위틈새에서 수행하는 방법을 택한다. 바로 변산 꼭대기 절벽에 암자를 차렸다 하여 이를 불가사의한 암자라는 의미의 불사의 방장으로 이름하였다. 이같이 이규보는 청년백수를 벗어나 첫 직장지인 전라북도권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꿈을 키웠고 특히, 고구려, 신라, 백제와 연결된 승려들의 자취를 찾아 기록으로 남겨 820여년 전 전북권 역사의 모습을 전해주었다. 특히, 이를 통해 전라북도의 숨은 역사 즉, 삼국시대 백제, 신라, 고구려인들의 역사가 온전히 전라북도로 모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낸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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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12 19:59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고려 국제무역항 군산도, 한중 교류 역사 빛내다 - 외국 사신단·상단 머문 중세 서해연안 핵심 항구

△한국전통 해양 역사자원 보고 군산도(선유도) 전라북도 지역의 대표적 섬들의 공간인 고군산군도 지역의 중심 섬은 선유도 즉, 과거 고려시대 군산도이다. 이곳은 2018년 다리가 개통되어 이제 새만금 방조제를 통해 자동차로 진입할 수 있는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곳이 900여년 전 고려시대에는 당시 고려 최대의 대중국 국제 무역항이었다는 사실은 거의 모르고 있다. 선유도(군산도)가 역사기록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123년(인종 1년)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이었다. 당시 송나라는 북방의 거란과 신흥하는 여진의 금 등에 의한 압박을 고려와의 외교를 통해 극복하려한 상황에서 서긍은 고려 예종의 조문과 인종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서긍은 송나라 황제 휘종의 명을 받고 고려 항해를 위해 특별 제작한 신주(神舟)를 타고 고려의 도성 개경을 왕래하며 특히, 첫 기착지인 군산도(선유도)를 비롯한 고려로 오는 뱃길과 고려 수도 개경의 정황 등을 상세히 기록한 고려도경을 남겼다. 선유도 지역의 지명 변천을 보면 1123년 남송의 서긍이 쓴 고려도경과 고려사기록에서는 군산, 군산도란 표현이 사용되다가 현재의 선유도지역에 설치되었던 고려시대 수군 본부인 군산진을 조선 세종때 육지지역인 지금의 군산시 진포지역으로 옮기면서 군산 지명도 함께 이동하고 원래 군산도는 옛 지역을 의미하는 고(古)를 덧붙여 17세기 중반이후 고군산으로 불렸는 데 일제강점기 들어 군산(시)와 확실히 구분하기 위해 고군산은 선유도로 개명돼 오늘에 이른다. 이 군산도의 성격은 연안항로 및 대중 해로교류의 거점으로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고려시기 쌀 등을 수송하는 조운(漕運)과 중국 무역선의 기항지로서 번영하였다. 즉, 선유도는 중세시기 서해연안해로에서 핵심항구였다. 조운선의 중간 기착지, 왜구 소탕의 전진기지, 외국 사신단과 상단 등이 머무른 곳이다. 사신단은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동남아 자바국까지 확인된다. 인근 십이동파도, 야미도, 비안도 바다에서 인양된 청자보물선으로도 설명된다. 또한 조선시대에도 중요항구로 활용되었고 특히, 1597년 9월 명량대첩에서 대승한 이순신장군이 일본군의 후속 공격을 피해 선유도로 피신해 머물며 지친 심신을 회복한 공간으로서도 매우 중요한 역사공간이었다. △고려 역사유적의 보고 군산도 군산도(선유도)지역의 해상교역의 거점 기능은 앞서 통일신라시대 완도를 중심으로 한 장보고선단의 활동과 이를 계승한 후백제왕 견훤에 의한 해상교류의 중심지 역할을 계승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변산반도의 가장 돌출된 지역에 위치한 백제 죽막동 제사유적의 존재를 고려할 때 백제 및 그 이전 마한-고조선시기이래 지속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후백제왕 견훤이 서긍이 출발한 항주일대지역에 위치한 오월국과 긴밀히 교류하고 사신 왕래가 있었던 사실을 고려할 때 선유도지역은 전주를 수도로 한 후백제시기에 집중적으로 성장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고려시기 국제 무역항인 군산도(선유도)에는 국제무역항에 걸 맞는 다양한 건물들이 있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고려도경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6일 정해에 아침 밀물을 타고 항행하여 진각(辰刻)에 군산도에 이르러 정박하였다.그 산은 열 두 봉우리가 잇닿아 둥그렇게 둘려 있는 것이 성과 같다.여섯 척의 배가 와서 맞아 주는데접반사 김부식(金富軾)이정사와 부사에게 군산정(群山亭)으로 올라와 만나주기를 청했다. 그 정자는 바다에 다가서 있고 뒤는 두 봉우리가 의지하고 있는데, 그 두 봉우리는 나란히 우뚝 서 있어 절벽을 이루고 수백 길이나 치솟아 있다. 문 밖에는 공해 10여 칸이 있고, 서쪽 가까운 작은 산 위에는 오룡묘(五龍廟)와 자복사(資福寺)가 있다. 또 서쪽에 숭산행궁(崧山行宮)이 있고, 좌우 전후에는 주민 10여 가가 있다./ 고려도경 기록에 의하면 현재 망주봉 동쪽 봉우리의 기슭에 오룡묘가 있는데, 그 북쪽에는 자복사와 동쪽인 샛터마을 일대에는 객관인 관아, 망주봉 서쪽 봉우리 남쪽 기슭에는 군산정과 숭산행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이 고려시대 군산도(선유도)는 국제교류 및 해상교역의 전략적인 거점이자 고대의 해상문화와 동북아 무역 루트에서 중요한 바다의 길목이었다. 군산도는 또한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의 물줄기가 한데 모이는 새만금해역의 해상교통의 중심지로서 특히, 후백제가 오월과, 고려가 남송과 국제교류를 진행할 때 군산도가 국제교역의 거점항구이자 국제외교의 관문이었다. △고려시대 전통선박 문화자원의 활용 따라서 현재 선유도는 단순한 해양관광을 위한 해수욕장과 휴양을 위한 시설 등으로 구성된 단순 해양관광지역이 아닌 중국 및 일본을 비롯한 국제적인 해양대국 백제의 전통을 계승한 고려의 국제무역항에 걸맞는 역사공간과 관련 문화콘텐츠가 활성화된 역사문화 관광지역이 되어야 한다. 현재 군산시와 전라북도에서 관련유적지가 팬션단지로 바뀌뻔한 상황을 막았지만 보다 적극적인 학술조사와 발굴 및 중장기 대책마련이 요청된다. 특히, 엄청난 예산이 투여되고 있는 새만금 개발에서 이같이 소중한 역사문화자원과 관련 내용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이제야 부분적으로 관련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은 깊은 반성을 요하는 부분이다. 특히, 고려도경기록에 나오는 송나라의 신주(神舟)와 고려 접반사 일행이 타고 온 대형선박 대주(大舟)와 순선(巡船), 군산도의 배인 송방(松舫)을 복원해 선유도의 역사성을 부각하고 관광용으로 활용한다면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 및 역사자원의 문화콘텐츠화를 이룰 수 있는 가장 좋은 자원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송방은 군산도의 배이다. 선수와 선미가 다 곧고 가운데에 선실 5칸이 마련되어 있고 위는 띠로 덮었다. 앞뒤에 작은 방 둘이 마련되어 있는데, 평상이 놓이고 발이 드리워져 있다. 중간에 트여 있는 두 칸에는 비단 보료가 깔려 있는데 가장 찬란하다. 오직 정사ㆍ부사 및 상절(上節)만이 거기에 탄다.라고 하여 복원 가능한 고려시기 군산도만의 선박에 대한 문화자원을 보여주고 있다. 이같이 백제-후백제이래 해양역량을 보여주는 군산도의 고려시대 역사유적 공간과 해양 선박 문화자원을 활용한 선유도정비를 통해 전라북도 역사문화 관광자원의 새로운 확산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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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28 19:50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고려의 위기 도운 전라도와 훈요십조의 역설 - 왕 피난하고 왕비 다수 얻은 곳…과연 차별 받았을까

△후백제 왕위 갈등, 고려서도 재현 2018년 올해는 고려가 건국된지 1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즉, 918년 6월 15일 왕건은 태봉왕 궁예를 축출하고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여 나라이름을 태봉에서 고려로 고치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였다. 이때 견훤왕은 10년 연하 왕건의 즉위를 축하하며 사절을 보내는 등 우호적 공존관계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후 양국은 경쟁을 통해 후삼국 통일의 쟁패를 벌이며 927년 공산성 전투에서 후백제의 우위가 확립되었으나 930년 고창(현재의 안동)전투에서 후백제가 패한 이후 역사 흐름의 축은 고려로 이어졌다. 결국 936년 아들 신검의 반란으로 축출된 견훤은 왕건에 귀부하여 스스로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붕괴시키고 9월 8일 황산(논산)의 한 절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 같은 역사전개과정에서 견훤과 왕건은 마치 중국의 천하 최고 명장으로 지칭되었던 항우와 사려 깊은 유방과 대비되는 존재였다. 결국 천하는 포용력의 왕건이 장악하였고 새로운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왕건은 강력한 후백제와의 경쟁을 위해 수많은 세력과 연합해 많은 세력과 혼인하여 29명에 이르는 부인들로부터 25명의 왕자와 9명의 공주를 얻었다. 이는 곧 후백제 견훤이 겪은 후계갈등을 똑같이 겪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케 되었고 이를 대비한 유훈을 남기게 되었다. △고려 태조 훈요십조의 실체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는 익히 알려졌듯이 불교숭상과 풍수지리 중시와 함께 적장자우선 왕위 계승원칙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사실 가장 많은 논란이 된 부분은 제 8조에 나타난 지역차별적 내용이다. 즉, 차현이남 공주강외 지역인재를 등용하지 말라는 내용은 한국사회의 지역 차별인식의 뿌리로 회자되어 많은 논란이 있었다. 특히 이 내용은 조선시대 확대되어 충남 및 전라도 지역에 대한 지역 차별인식으로 활용되었다. 그런데 이같은 인식에 대해 조작설이 제기된 이래 이 문제에 대한 조작 찬성과 반대 입장이 학계에서 다양하게 전개되며 이 사안의 실체에 대한 논란이 학계 및 일반인과 언론에까지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조작설이 나오게 된 역사적 사건을 보면 고려의 위기 상황속에서 충청, 전라인들이 적극 고려를 도왔다는 점에서 이같은 역설적 내용이 과연 역사적 실상일까에 대해 의문이 남게된다. 즉, 왕건의 풍수지리 인식의 사표인 도선국사와 태사인 최지몽, 동진대사 경보는 영암 출신이며 왕건의 2번째 왕후이며 2대 혜종의 모후인 장화왕후 오씨가 나주인이며 왕건의 말년에 함께 산 동산원부인과 문성왕후는 승주(순천 박씨) 태생 박영규의 딸이며 견훤의 외손녀들이다. 또한 고려의 창업 과정에서 왕건을 대신해서 죽은 개국공신 신숭겸은 곡성출신이며 훈요십조를 받은 박술희는 후백제지역인 당진 사람이다. 이 점만 보아도 왕건의 호남인에 대한 기피는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위기의 고려, 충청-전라 도움으로 살아나 고려는 8대 현종시기에 국가 존망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즉, 7대왕 목종의 모친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사통해 낳은 아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당시 거의 유일한 태조 왕건의 친손자인 순(8대 현종)을 강제로 절로 보내 승려로 만들고 뒤이어 암살까지 획책했다. 그러나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 순(현종)은 뜻하지 않게 고려 8대 왕에 즉위하였다. 그런데 즉위직후 강조의 정변을 구실 삼은 거란이 대규모로 침략해 수도 개경까지 함락 당해 급히 나주로 피난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였다. 현종은 태조의 2비의 고향인 나주로 피난하기 위해 공주를 거쳐 삼례역(완주군 삼례)에 도착하였는 데 당시 수행이 전주가 후백제 도읍이었으니 지나쳐 가자하여 전주를 피해 장곡역(완주군 앵곡마을)에 이르러 유숙하고 노령을 넘어 나주에 들어갔다. 이후 왕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개경으로 환도할 때 처음에는 꺼려서 피했던 전주에서 1주일을 머물렀고, 전주사람 박온기의 딸을 궁인(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공주에서는 공주 절도사 김은부의 세 딸을 왕비로 삼았다. 이같이 나주는 피난처였고 전주와 공주에서 각각 1주일여를 머물며 4명의 부인을 얻어 후백제지역 여인들이 왕실의 중심이 되었다. 이같이 전라도지역은 고려 왕실의 수호와 보호역할을 한 지역이었다. △정파갈등에서 나온 지역 차별인식, 역사 실체로 극복하자 현종이 복귀한 개경은 거란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왕실의 역사기록도 모두 사라진 상황이었다. 이에 현종은 역사편찬관을 임명해 사라진 태조이래 7대왕들의 실록을 편찬케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갑자기 훈요십조가 등장한다. 즉, 고려사최제안전에 의하면, (태조의) 훈요는 병란에 분실되었는데, 최제안이 이미 죽은 최항의 집에서 얻어 바침으로써 세상에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훈요십조는 현종이 환도이후 고려 7대왕들의 역사를 새로 정리하면서 갑자기 나타난 기록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독 다른 일반적인 유훈과 달리 특정지역을 차별한 8조항의 내용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내용이었다. 즉, 태조대에 후백제 출신들이 많이 등용된 것을 근거로 이것이 현종대 7대실록을 새로 만들 때 신라계 경주 최씨 집안에서 조작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특히, 현종대에 후백제지역 출신의 왕비가 많아진 것에 대한 대응이 아닐 까라는 추측까지 제기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인식이 고려시대보다 조선시대에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과 이중환의 택리지등에서 강조되어 세상에 유포된 점이 더 큰 문제였다. 특히, 조선후기 노론계에게 피해를 본 남인계가 노론계의 근거인 충청 중남부 및 전북지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이 기록과 연결지어 부각시켰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따라서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는 실제 고려시기에는 그 실체와 의미가 거의 인식되지 못하였으나 오히려 조선후기 당파적 도구로 활용되어 지역적 갈등과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훈요십조의 실체와 조작 여부를 떠나 그 영향은 고려시대와는 관계없는 최근세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부각된 지극히 짧은 시기의 왜곡된 인식이었다. 호남지역은 고려 건국이후 고려의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왕의 피난처이자 다수의 왕비를 배출하여 고려왕실을 든든히 만든 고려의 조력자로서 역사적 소임을 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왕건의 훈요십조는 실체를 떠나 역사적 실상과는 거리가 있는 내용일 뿐이다. 다만 이같은 고려현종의 나주 피난과정에서 그 의미가 중요한 전라북도 지역의 삼례역과 앵곡역은 그 자취마저 잊혀진 채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이 방치된 모습이 매우 안타깝다. 나주에서는 왕건을 기리고 공주에서는 현종의 공주 방문을 부각하고 행사까지 진행하는 상황에서 후백제 역사이후 고려시기 전라북도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파악하는 노력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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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14 19:52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완전한 땅, 후삼국 통일수도 전주 꾸민 견훤왕 - 신앙으로 왕도 보호하고 책으로 지식문화 수도 완성

(견훤왕은) 삼한을 경략하고, 백제의 옛 나라를 부흥하였다. 도탄을 물리쳐내시니 백성들이 편안함을 찾아 모여드는 것이 바람처럼 일어나 원근의 백성이 말이 달리는 것처럼 모였다. /삼국사기견훤전 △견훤왕, 후삼국 통일 수도 전주를 만들다 후백제 견훤왕은 892년 무진주(현재의 광주)에서 거병하고 독자적인 정치행보를 유지하다가 900년 전주로 도읍하여 후백제의 공식적인 출발을 진행하였다. 이 후 936년 신검왕대에 후백제가 망하기까지 전주는 37년동안 후백제의 수도로서 기능하였다. 이 기간은 한 국가의 도성구성과 관련하여서는 충분한 시간으로서 전주의 도시구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기간이 되었다. 특히, 927년 신라 경주를 공격하고 경순왕을 옹립하고 특히, 공산에서 고려군을 대패시킨 견훤은 후삼국 통일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다. 이때부터 견훤은 전주를 통일수도에 걸 맞는 체계를 갖추게 하였으며 화려하고 사치스럽다는 당시 평가가 들 정도로 전주를 꾸몄다. 특히, 신라에서 데려온 여러 분야의 뛰어난 기술자(백공지교자百工之巧者)를 활용한 전주 도성건축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종래 후백제 왕도 전주의 공간에 대해서는 다양한 공간설정과 가능성이 검토되었다. 가장 최근 전주박물관은 전주를 둘러싼 고토성의 흔적과 현재 구도심을 중심으로 한 도성공간들에 대한 기본안을 발굴과 연구를 통해 확인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국가적 목표와 방향이 후삼국 통일이었고 그 지향점이 고구려 옛 영토까지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 같은 목표 구현을 위해 견훤왕은 종교 신앙적 보호체계를 구상하고 이를 실천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유교의 신령한 네 마리 동물 사령(四靈), 전주를 지키다 견훤왕이 후백제 왕도 전주를 지키기 위한 종교신앙적 흔적으로 주목되는 것이 유교의 경전 예기(禮記)에 나오는 네 마리 신령스런 동물인 사령(四靈) 관념이다. 이는 인간을 먹이는 가축의 원형인 기린용거북봉황으로 점차 도성수호의 신령한 상징으로 자리잡았고 도교와 연결되어 도성 방위의 사신(四神)신앙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후백제 왕도 전주를 둘러싼 지명에 이들 명칭이 남아있어 주목된다. 즉, 전주를 둘러싼 산줄기에 부여된 명칭인 기린봉(麒麟峯)의 기린, 용머리고개의 용, 거북바위의 거북, 옛 지도에 표현된 봉황암(鳳凰巖)의 봉황이 그대로 전주에 나타나고 있다. 한편, 이들 대응내용을 살펴보면 기린봉과 봉황암이 서로 인접하여 산림에 위치하는 형세이고 용과 거북은 전주천과 연결되어 연못에 깃들여 사는 형세와 연결되는 지형적 형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사령은 상서로운 동물로서 인간을 먹이는 존재이자 어진 정치를 상징하고 태평성대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이같은 존재가 도시수호 및 구성에 존재한다는 것은 국가통치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이념체계였다. 그런데 이같은 표현은 전주에 적용될 수 있는 시점은 후백제 왕도이던 시기에 가장 가능성이 높다. 결국 견훤왕은 사령신앙에 입각한 관념을 전주의 공간에 대응시켜 후백제 전주를 명실상부한 완벽하고 온전한 최고의 땅으로서 만들려고 하였다. △불교의 사고사찰 배치로 전주를 지키다 전주에는 독특한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는 사고사찰이 존재하고 있다. 먼저 남고사는 창건 당시 남고연국사(南高燕國寺)라 불렸는데 여기서 연국이란 나라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의 말로 산성에 있는 사찰 이름으로 전주를 지키는 남고산성(南高山城)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문헌비고(文獻備考)에 따르면, 남고산성은 901년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쌓았으며 견훤산성고덕산성이라고도 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 동고사는 승암산에 위치하고 있는 데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말 경순왕의 아들이 출가한 사실이 전해져 후백제 견훤과의 관련이 추정된다. 한편, 서고사는 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되어 있는 사찰로 만성동 황방산(黃尨山)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또 북고사란 명칭은 존재하지 않지만 진북동 어은터널과 서신교 사이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진북사(鎭北寺)라는 사찰은 1790년대 경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호남읍지의 전주부에 등장하고 있는데 명칭이 북쪽을 지킨다는 뜻으로 북고사와 같은 개념이다. 이같은 전주를 지키는 4개 사찰의 개념은 전주를 불교적 수호관념을 투영해 보호하려한 불교적 신앙을 계승 발전시킨 견훤왕의 의지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후삼국 최대 서적을 보유한 전주, 문화수도를 보여주다 후백제왕 견훤은 수도 전주를 최대의 지식문화수도로 만든 문화군주였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덕무가 지은 청장관전서에는 전주가 후삼국 시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책을 보유한 지역이었음을 서적이 당한 참변에 대한 기록을 통해 알려주고 있다. 즉, 그는 우리나라에 매우 많은 서적이 있었는 데 이들 3천년 역사중 서적이 사라지게 된 역사상 2대 참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당(唐) 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평정하고는 우리나라의 문물이 중국에 뒤지지 않는 것을 시기하여 동방의 모든 서적을 평양에다 모아놓고 모두 불태워버렸으며, 신라 말엽에 견훤이 완산(完山) (지금의 전주)을 점령하고는 삼국(三國)의 모든 서적을 실어다 놓았었는데, 그가 패망하게 되자 모두 불타 재가 되었으니, 이것이 3천년 동안 두 번의 큰 액(厄)이었다. 이덕무, 청장관전서 ▲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사료에 나타난 서적의 참화 첫 번째 사건은 고구려의 책이 당나라 장수 이적에 의해 불탄 사건이고 두 번째 사건은 견훤이 후백제 왕도 전주에 모은 책이 당한 참화를 설명한 것이다. 비록 서적이 사라진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역설적으로 이 사실은 전주가 우리역사에서 서적의 도시임을 보여주고 있다. 즉, 후백제 견훤왕이 후삼국통일 수도를 꿈꾸며 전주를 화려하게 조성하고 이에 부응하는 학문과 문화도시로서의 품격에 걸맞는 서적을 모아 당대 최대의 도서관을 만들어 기록을 보존한 전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후백제 왕도 전주는 유교의 사령 즉, 기린, 거북, 용, 봉황이 먹이고 지켜주는 도시이자 불교의 사방수호 사찰인 남고사,동고사,서고사,진북사(북고사)가 수호하는 공간이었다. 또한, 견훤왕은 삼국의 모든 책을 전주로 모아 우리나라 최대의 지식문화 수도로서의 위상을 만들어낸 문화군주였다. 또한 당대 최고의 기술자들을 모아 후삼국시기 최고의적 공간구성을 이루어 통일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제 후백제 견훤왕의 의지와 포부가 우리시대로 계승되어 새로운 아시아문화심장, 기록과 지식문화의 수도로서 전주가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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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4 20:06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8. 새로운 가야역사의 거점, 전북 - 고구려 공격에 백제 위축되자 남원·장수로 대가야 세력 확대

△가야, 한국 고대 4국시대 주역 부각 최근 한국 고대사의 새로운 화두로 가야가 떠오르고 있다.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우리 고대사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문헌사료의 절대 부족과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한 왜곡에 의해 가야의 실체와 역사적 위상이 밝혀지지 않은 채 삼국 중심의 한국고대사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이 같은 가야가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이후 급증한 가야유적의 발굴을 통해서였다. 가야 관련 유적은 경상남도를 비롯해 경상북도, 부산광역시, 전라남도, 전라북도에까지 분포하지만 지금까지는 금관가야(김해지역)와 아라가야(함안지역) 그리고 대가야(고령지역)가 있었던 경상도 지역의 낙동강유역을 중심으로 파악되었다. 그런데 전라북도 지역에서도 동부지역 7개 시군(남원, 완주, 진안, 무주, 장수, 임실, 순창)에 690개의 가야유적(고분 448, 제철 129, 봉수 68, 산성 45)이 분포하고 있는 상황이 파악되었고 지난 2월 전북 가야유적으로 남원 두락리유곡리 고분군이 첫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전라북도의 가야역사 진입이 공식화 되었다. △새롭게 부각된 전북지역 가야유적 가야라는 나라 이름의 뜻은 무엇일까? 기록에 따라 광개토왕릉비문에는 가라(加羅), 삼국사기에는 가야(伽倻, 加耶), 삼국유사에는 가락(駕洛) 등으로 다양하다. 가야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를 강이나 호수의 의미로 파악해 낙동강 주변지역의 의미로 보는 견해도 있고 동족을 의미하는 퉁그스어의 칼라(xala) 에서 그 연원을 찾기도 한다. 또 김수로왕의 부인 허왕후의 출신지역인 인도의 불교관련 용어인 부다가야에서 찾기도 하지만 아직 명확한 의미는 모른다. 다만 전국적으로 가야라는 지명이 강변이나 해변지역에서 나타나고 있어 바다나 강변을 의미하는 명칭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종래 가야는 삼국과는 달리 통일된 정치체를 갖지 못해 멸망 때까지 10여개 이상의 개별 소국명이 병렬적으로 존속하고 있었다. 따라서 가야 는 신라 백제와 구분되는 연맹체 국가로 보고 있다. 가야 역사에 대한 기록은 매우 소략하지만, 역설적으로 고고학 자료가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어서 그 문화상의 복원뿐 아니라 역사의 재구성도 시도되고 있다. 가야의 기존 영역은 경남과 경북일대로 보았으나 가야 유물이 낙동강 동쪽 일부와 호남 동부지역, 그리고 전남 광양만, 순천만 일대와 최근에는 전북 남원, 장수, 진안, 임실에서도 확인돼 영역이 상당히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가야영역의 변화와 확산은 고구려의 백제 공략과 밀접히 관련있다. 즉, 400년 광개토왕의 한반도 남부지역 정벌로 김해 가락국세력이 쇠퇴하고 서기 5세기이후 가야의 구심점은 낙동강 서안 경상도 내륙지역으로 옮겨져 내륙의 철산지를 개발하면서 고령의 반파국(伴跛國), 즉 대가야가 성장해 나갔다. 또한 475년 장수왕의 백제공략은 백제가 거의 붕괴될 상황까지 몰렸고 수도를 웅진(공주지역)으로 옮겨 간신히 명맥이 유지되는 시기인 5세기 후반 대가야 세력은 백제의 영향력이 축소된 남원 및 장수 지역으로 영역을 확대하였다. 이는 섬진강과 남강 수계의 교역망을 통해 확산되었는데 5~6세기 전북 동부지역에 가야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세력권이 나타났다. △전북 가야유적 역사적 실체파악 시급 2018년 2월 남원 두락리유곡리 가야 고분군이 전북지역 가야유적으로서는 처음으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42호로 지정됐다. 이 고분군에서는 가야계 수혈식 석곽묘(구덩식 돌덧널무덤)와 백제계 횡혈식 석실분(굴식 돌방무덤)이 확인되었다. 특히, 가야 영역권에서 최초로 청동거울, 금동신발 등 최고급 위세품이 출토되어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또한 남원시 아영면 월산리 고분군에서는 철제 갑주와 등자, 철제 자루 솥 및 금귀걸이와 중국 청자인 계수호(鷄首壺 닭머리 모양 주둥이 가진 주전자)등이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은 5~6세기 가야와 백제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2017년 장수군 동촌리 고분군에서 가야 수장층의 무덤임을 알려주는 마구류 등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토기들은 백제, 소가야, 대가야의 토기류와 혼재된 양상이어서 다른 지역과 교류해온 사실 등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같이 새롭게 확인된 전라북도권 가야유적은 과연 우리 역사 기록속에서 어떤 존재의 역사유물일가 하는 것이 학계의 큰 관심이다. 전북 동부지역은 섬진강 수계인 운봉고원(남원시 동쪽)과 금강수계인 진안고원(무주,장수,진안)으로 공간 구분이 된다. 이중 남원지역은 《양직공도》에서 백제의 주변 소국인 기문국(己文國)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아울러 철을 생산했던 대규모 야철지가 발견된 남원과 가야세력이 직접 운용했던 장수의 봉수유적을 통해 봉수 왕국 장수가야가 고고학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백제와 힘을 겨룰 만큼 강했던 가야문화권의 중심이 대가야가 아닌 장수가야라는 주장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그런데 이들 전북지역 가야의 실체에 대해서 아직 고대사 학계는 명확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기존 가야사를 연구한 학자들은 남원을 중심으로 기문국 등의 존재를 설정하였지만 장수지역에서 새롭게 확인된 가야유적의 실체에 대해서는 유보적 입장이다. 6세기 후반 백제에 복속된 가야세력 등에 대한 지속적인 고고학 유적조사와 발굴 및 문헌사학계와의 긴밀한 연구를 통해 우리 역사의 새로운 화두로 부각된 전북 가야의 실체와 위상 찾기 노력이 요청된다. 이를 통해 더욱 다채로운 전라북도의 역사문화적 토대와 문화자원의 확충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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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26 19:30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⑦ 고구려 부흥의 터전, 전북 - 백제 마지막 왕도 익산에서 고구려 재건 꿈꾼 아이러니

△고구려유민, 백제 왕도 익산에 자리잡다. 663년 백제 부흥의 거점 주류성(전북 부안 우금산성)이 함락된 후 당과 신라는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본격적으로 단행하였다. 당이 중심이 된 고구려 공략은 과거 수 양제나 당 태종 때의 대규모 공격방식이 아닌 지속적인 소규모 전투를 통한 고구려 소모전을 진행하였다. 한편 고구려의 집권세력인 연개소문 사후 연개소문의 장남인 남생이 아우 남건, 남산이 정변을 일으키자 서로 다투다 국내성 등 요동지역 거점을 이끌고 당에 투항해 고구려를 공격하는 선봉이 되었다. 결국 당과 신라의 양면 공격에 의해 분열된 고구려는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붕괴되었다. 고구려는 붕괴되었지만 각 지역에서 고구려 부흥전쟁이 진행되었다. 특히, 668년 황해도지역을 중심으로 검모잠이 주축이 된 고구려 부흥세력은 670년 고구려 마지막왕 보장왕의 조카인 안승을 왕으로 추대해 한성(서울 일원)지역에서 고구려를 재건하고 당과 맞섰다. 한편, 당은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 복속지역 관할 문제로 신라와 대립하다 전쟁으로 비화하였다. 특히, 당은 신라마저 복속하여 삼국 모두를 당의 지배하에 놓고자 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고구려 부흥군은 신라의 원조 하에 지속적인 저항을 진행하였다. 신라 문무왕은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금마저(익산)에 거주하게 하였다. 이후 문무왕 14년(674)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으로 책봉하면서 고구려 부흥세력은 신라에 의해 책봉된 보덕국 체제하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같이 백제의 마지막 왕도 익산은 나라가 망하자 신라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역설적으로 고구려 부흥의 터전으로 바뀐 아이러니한 역사가 전개되었다. △신라와 고구려 유민의 정략적 결과물, 보덕국 백제 땅에 세워진 고구려 유민의 거점 보덕국은 신라의 고구려, 백제유민 지배정책과 당과 일본과의 국제관계를 고려해 탄생된 고도의 정략적 결과였다. 즉, 익산의 백제 도성 관련 시설을 활용하고 금강과 만경강으로 둘려진 익산의지형적 특성을 활용해 고구려 부흥세력이 군사적으로 확대되는 것도 막고 백제세력과도 차단하는 목적으로 이 지역을 활용하였다. 한편, 신라는 과거 고구려와 왜국의 친선 관계를 이용해 신라와 왜 관계 호전을 노렸고 또한 고구려 구토에 대한 지배 연고권과 논리를 마련해 당이 고구려 땅에 만든 안동도호부에 대항하는 근거도 마련하였다. △전라북도에 남겨진 고구려 문화 670년 익산지역으로 옮겨진 고구려 유민들은 15년 동안 보덕국을 유지하였다. 그 사이 신라는 고구려 부흥세력과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이들 고구려 유민에 대한 태도가 변하였다. 특히, 투항세력인 안승과 가족을 경주로 이주시키자 684년 11월 고구려 유민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으나 수개월 진행되다 종식되었다. 고구려 유민들의 반란이 토벌되자 685년 봄 신문왕은 완산주(전주)와 남원소경을 바로 설치하고 대다수 고구려 유민들을 완산주와 남원소경 등 남쪽 지역으로 사민시켜 고구려 유민의 거점을 와해시켰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익산에 보덕성이 군의 서쪽 1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익산에 남은 고구려적 요소로 주목되는 것은 왕궁유적 앞을 흐르는 옥룡천과 관련된 익산 고도리 석인상 관련 기록이다. 왕궁유적 맞은 편에 있는 2구의 석인상은 고려시대 석불입상(보물 46호)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약 200m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선 이 같은 남녀석인상 형식은 고려시대 조성된 불상과도 다른 독특한 형식으로 그 연원이 명확치 않다. 그런데 이 같은 남녀가 개울을 사이에 둔 모습은 은하수를 사이에 둔 견우직녀 모습과 대응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석인상에 견우직녀설화와 유사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즉, 두 석인은 섣달 그믐날 자시(子時, 23시~01시)에 옥룡천이 얼어붙으면 서로 만나 1년 동안의 회포를 풀다가 새벽닭이 울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내용은 전형적인 견우직녀형 설화 내용이다. 주목되는 것은 견우직녀 모습으로 가장 오래된 그림이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확인된다는 점이다. 즉, 광개토왕 18년(408)에 축조된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고분벽화에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견우와 직녀가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어 고구려사회에 견우직녀 설화가 상당히 유포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비록 이들 석인상이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파악되지만 석인상의 연원과 유래가 고구려인들이 보유하였던 견우직녀형 설화인식이 고구려유민들이 이 지역으로 사민된 이후 이곳에 전래되어 유지되었을 가능성을 상정케 한다. 전주지역에 남아있는 고구려 관련 유적은 고구려 승려 보덕의 경복사 유적이다. 이는 고구려 승려가 일부러 완산주 고덕산에 비래방장 즉, 하룻밤새 날아온 것으로 묘사된 곳으로 백제 땅으로 옮겨온 고구려 사찰이 전주지역에 남아있다. 한편 남원지역의 경우 신라에 의해 많은 고구려유민이 사민되어 남원 소경성을 건설하고 남원지역 곳곳에 분산되었다고 추측된다. 특히, 남원의 만복사의 가람배치형태는 비록 고려시대 사찰이지만 가운데 목탑을 두고 동-서-북쪽 3면에 3개의 금당을 배치한 品자 모양 가람구조인데 이는 전형적인 고구려식 가람배치양식이란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또한 통일신라시기 거문고 달인 옥보고는 고구려유민으로 남원 운봉일대 지리산 자락에 은거한 사실이 전해져 앞서 고구려 유민들을 남쪽으로 옮긴 상황과 대응된다. 특히, 옥보고와 관련된 지역이 현재 남원 동편제 소리마을과 접한다는 점은 남원 국악의 뿌리와 고구려 음악문화가 연결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이기도 하다. 또한 고구려 유민들의 흔적은 신라 불교음악과 관련된 쌍계사의 진감선사 혜소(774~850)가 고구려유민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또 고구려인의 혈통적 특성이 남한지역에서 전라북도지역에 가장 잘 남아있어 구리시에 건립된 광개토왕 동상 얼굴 표본을 만들기 위한 샘플로 활용하기 위해 전라북도 익산지역 남학생들 표준 얼굴안을 수집하였던 사실은 결국 고구려유민들이 현재의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분산 배치되어 신라사회에 편입되어 갔으며 그 문화적 영향성은 고려, 조선을 거쳐 현재까지 그 흔적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이 전북 지역 특히, 익산-전주-남원 지역은 백제의 역사와 함께 고구려 유민들이 고구려부흥을 꿈꾸며 새로운 역사의 대안을 찾았던 뜻 깊은 터전이었다. 또한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이후 신라의 역사공간으로 연결되어 삼국의 역사와 문화가 융합되어 가장 한국다운 역사 원형 문화가 이루어진 지역이었다.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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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12 19:31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⑥ 백제부흥·동아시아 국제전쟁의 현장 - "백제를 살려라"…전북,'백·왜 vs 나·당' 결전의 터였다

△백제를 붕괴시킨 태종 무열왕의 죽음을 알린 금마 서기 660년 7월 백제는 나당 연합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백제는 전쟁에 패하였다. 이때 신라와 당의 급습으로 15일만에 패한 백제지역민들은 의자왕과 왕세자 등 왕실과 귀족대신들이 대부분 당나라로 압송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이 전쟁이 단순한 백제 공략을 통한 정치적 복속화가 아닌 백제국가의 완전한 붕괴 전쟁이었음을 확실히 깨달게 되었다. 이후 백제 각지에서 당과 신라군에 대한 부흥전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같은 본격적인 백제의 저항을 상징하는 사건이 금마 즉 익산지역에서 발생하였다. 6월에 대관사(大官寺) 우물 물이 피가 되었고, 금마군(金馬郡) 땅에 피가 흘러서 그 넓이가 다섯 보가 되었다.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상기 사료는 백제를 붕괴시킨 신라 무열왕의 죽음에 대한 기록으로 654년 50세에 왕에 즉위한 김춘추가 백제붕괴 1년 후인 661년 6월 금마 대관사(익산 왕궁리유적에 있던 사찰)의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하고 금마군에 피같은 붉은 물이 흐르는 사건이 소개된 사건과 연결되어 왕이 죽었음을 보여준다. 이 기사는 태종 무열왕의 비정상적 죽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파악되는 데 금마지역의 반 신라적 성격과 백제부흥세력의 적극적 반격의 신호로 파악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당시 왜에서 백제부흥을 위해 원병이 처음 출발한 661년 5월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이 기록은 전라북도권의 백제 유민세력이 본격적인 부흥전쟁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부흥의 현장 주류성, 부안 변산일대 660년 8월 의자왕이 항복한 직후 지방에 남아있던 백제의 세력들은 각 지역에서 백제부흥 전쟁을 전개하였다. 백제부흥전쟁의 거점지역은 임존성(任存城)과 주류성(周留城)으로 양분되었다. 임존성(任存城)은 백제의 서방을 관할하던 곳으로 충남 예산의 봉수산지역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곳은 유명한 흑치상지 등이 중심이 되어 초기에 당과 신라군에 대항하였다. 그런데 백제부흥군의 핵심거점은 주류성이었다. 이곳은 복신과 도침 및 일본에 있다 귀국해 부흥군의 중심이 되었던 왕자 부여 풍등이 함께 활동한 부흥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주류성 위치에 대해 충남 한산 건지산설, 홍성설, 전북 부안 우금산성설 등이 제시되고 있다. 한산의 건지산성을 주류성으로 보는 견해는 주변 지형 등이 역사기록과 부합되지 않는 문제점과 최근 발굴을 통해 축조시기가 고려후기로 파악되어 더 이상 주류성으로 보기 어렵게 되었다. △백제 부흥군 최후 거점 주류성은 부안 우금산성 최근 학계는 지형과 관련 기록의 연결성을 고려할 때 부안의 우금산성을 주류성으로 보고 있다. 일본서기등 사료를 보면 주류성의 위치는 백제부흥전쟁 수행과정에서 바닷가에 위치해 방어와 왜국(倭國)과의 통교에는 유리했지만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지 않아 이후 피성(避城: 현재 김제)으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복귀하였다는 상황이 기록되었다. 따라서 주류성은 김제지역과의 관계도 고려되어야 하며 또한 663년 백제부흥군과 왜 원병이 신라와 당의 군대와 대규모 전투를 행한 백강구와 인접한 곳이다. △동아시아 1차 국제전쟁, 백강전투의 땅 동진강하구 660년 백제붕괴 직후 왜는 백제를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준비하였고 3차례에 걸쳐 각각 1만~2만 7천에 달하는 원군을 보냈다. 특히, 663년 8월 마지막 전투가 치러져 백제-왜 연합군이 신라-당 연합군에 대패하며 부흥전쟁은 종식되었다. 이 전쟁은 동북아 한,중,일의 군대가 최초로 맞붙은 국제전쟁으로 백제가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백제유민이 대거 왜로 건너가 새로운 국가 일본을 마련하고 신라와 당이 고구려를 본격적으로 공격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동북아 역사를 새롭게 구축하게 되었다. 전쟁이 치러진 백강의 위치에 대해서는 금강설, 동진강설, 금강-동진강 합구설 등으로 크게 대비되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앞서 주류성, 피성, 백강구로 연결되는 공간으로 가장 적합한 공간은 이후 675년 당나라의 신라장악 야욕을 꺽은 나당전쟁의 격전지 기벌포와도 연결되는 곳으로 이는 갯벌을 의미하는 계화(界火)를 화(火)의 원발음 불로 읽으면 개불(개벌)과 연결되어 현재의 동진강 하구가 된다. 이같은 동아시아 국제전쟁이 벌어진 백강은 동진강 하구일대이고 주류성의 위치는 부안 우금산성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곳은 김제지역과도 인접하고 당시에는 해수가 더 들어와 섬처럼 둘러싸인 곳으로 특히 산 정상에는 부흥군의 중심인 복신이 머물런 복신굴과 산성 성벽이 여전히 잘 남아 있다.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패하자,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을 위시한 백제부흥군은 일본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일본에 체류 중이던 풍은 661년 1차 일본의 원군을 거느리고 귀국, 복신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격전을 벌여 나당연합군을 위기에 빠뜨렸다. 그러나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여 전권을 장악하려 하자, 풍은 복신을 살해한 뒤 실권을 잡았다. 부여풍은 663년 백강(白江)에서 백제부흥군 및 왜국이 보낸 원병과 함께 나당연합군과 싸웠으나 1000 척의 함선 가운데 400 척이 불타는 대패를 당하자 배를 타고 고구려로 망명했다. 이 같은 지도부의 내분이 부흥운동0을 좌절케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일본서기》에 따르면 663년 9월에 주류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부흥세력은 붕괴되었다. 이때 백제 귀족들은 오늘로서 백제의 이름이 끊어졌으니 조상의 무덤도 다시 찾아뵙지 못하게 되었다며 왜로 망명길을 떠났다. △실패로 끝난 백제의 부흥 전쟁 백제의 부흥전쟁이 실패한 이후 신라 승려 원효와 신라의 토착승려인 사복이 부안 변산 일대에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부안지역의 원효관련 기록은 흥미롭다. 이규보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나타난 신라 승려 원효(元曉)와 관련된 기록은 변산 내소사 인근에 존재하고 있는 원효방을 방문하고 남긴 기록이다. 관련 부분을 보면 원효와 사복이 함께 활동하고 있는 데 사복은 삼국유사에서 죽은 자를 지하세계로 인도하는 존재로 묘사된 존재로 이들의 활동은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거점인 현재의 우금산성인 주류성과 밀접히 관련되었다고 생각된다. 즉, 불교신앙을 통해 극락왕생을 강조한 원효와 토착적 사후세계 인도자인 사복이 함께 백제저항의 거점 지역을 위무하고 포섭하는 방안의 하나로서 이들을 적극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파악된다. 또한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는 신라장군 김유신의 사당과 조선 성종때 이 사당에 땅을 하사했다는 전첩지가 있다. 이는 백제부흥군을 붕괴시킨 후 김유신에게 이 지역을 포상으로 내린 역사의 흔적으로 파악된다. ▲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한편, 1979년 12월 우암산성 아래 개암사에서 별기라는 기록이 발견되었는 데 내용 중 17세기경 만들어진 개암사사적기에 우금산성을 주류성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주류성설을 더욱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같이 최근 국내외 백제관련 연구자들은 백제의 마지막 거점 주류성에 대해 대부분 부안 우금산성쪽으로 입장을 모으고 있다. 또한 이곳은 백제 유민들이 마지막 눈물을 흘리며 백제라는 이름이 사라져감을 아쉬워하며 일본으로 이주해간 곳이다. 따라서 이 같은 주류성으로 파악되는 부안 개암사 뒤의 우금산성에 대한 발굴조사와 학술연구, 지역사 교육과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부각하는 사업 등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를 통해 백제의 마지막 부흥의 꿈과 새로운 백제의 역사를 찾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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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1 19:59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⑤ 새로운 불국토 꿈 꾼 백제 무왕 - 백제 무왕의 익산 천도 입증하는 왕궁리·미륵사지 유적

해양을 통해 성장한 백제의 공식 수도는 한성(서울 강남) ,웅진(공주), 사비(부여)지역으로 《삼국사기》에 전한다. 그런데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로서 공주 부여와 함께 익산지역이 백제의 왕도유적으로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익산지역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유적은 현존하는 백제의 유일한 왕궁인 왕궁리유적과 삼국시대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지 유적이다. 이들 공간은 누가 그리고 왜 만들었을까? △삼국의 왕중 유일한 용의 아들, 백제 무왕 익산지역에 백제의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 존재는 백제의 무왕이다. 《삼국사기》기록에는 법왕의 아들로 나타나고 있는데 《삼국유사》 에는 백제 무왕이 삼국시대 왕들 가운데 유일하게 용(龍)의 자식으로 기록되어 주목된다. 즉, 백제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章)인데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속의 용(龍)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는 것이다. 무왕의 탄생지에 대해서는 익산지역의 금마면 서고도리 연동마을에 있는 마룡지(馬龍池)와 주변 용순리지역 명칭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같은 백제 무왕의 신화적 탄생설화는 신라의 문무왕이 동해 용이 되었다는 사실과 대비되는 내용으로 유일하게 용의 아들로 부각된 것은 용으로 상징된 토착성을 잘 보여준다. △마 캐던 서동, 신라공주의 남편이 되다 한편 무왕은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으로 《삼국유사》에서는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다가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아 사람들이 서동이라 이름지었다.라 하였다. 이 내용을 보면 무왕은 용의 아들이라 하였지만 평범한 시골 청년으로 성장한 존재였고 왕의 후손이란 내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무왕이 범상치 않은 존재로 부각되는 것은 자신의 부인을 얻는 과정 설화이다. 당시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의 미모가 뛰어나다는 말을 들은 서동이 자신의 부인으로 삼기 위해 신라까지 가서 아이들에게 선화공주가 서동과 어울린다는 서동요를 부르게 해 선화가 왕실에서 쫓겨나자 선화를 맞아 부인으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또 현재의 익산지역에 와서 함께 살 때 선화공주가 생계를 위해 내논 금팔찌를 보고 자신이 마를 캐던 곳에 이 같은 금이 많다고 하고 금을 모아 신라왕실과도 관계가 좋아지고 백성들에게도 베풀어 민심을 얻어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서동은 백제에서 신라로 건너가 자신의 부인을 맞이할 정도로 지략과 기개가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고 있으며 금을 통해 신라 및 백제지역에서 명성을 얻었다는 점에서 매우 뛰어난 친화력과 포용력을 가늠케 한다. 특히, 한미한 존재로 묘사된 서동과 선화의 만남은 서동과 신라왕실이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속에서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라 왕실과 몰락한 백제왕실 세력과의 결합일 가능성도 추측케 한다. 한편 무왕의 왕위등극과 관련된 금관련 설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금마지역의 금이다. 사실 전라북도지역의 금자 들어가는 지명을 보면 금마와 함께 금제, 금구 등 금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많으며 특히, 김제의 경우는 금산과 연결되어 사금이 많이 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때 미륵신앙과 연결되어 금은 신화적인 내용이라 하였지만 미륵사에서 멀지않은 왕궁리 유적 공방터에서 금세공 과정의 부스러기 금이 흙속에서 상당량 찾아진 것은 결코 전설이 아닌 사실을 전하는 내용이다. 또한 미륵사지 서탑 발굴시에도 규격화된 금으로 된 시주품도 나와 이 지역의 금산출 가능성을 확인시켜준다. 즉 삼국시대의 이름도 금마저(金馬渚)였던 이곳이 진짜 금이 났던 곳임을 알려주며 이 금으로 무왕은 신라와 백성 모두에게 인심을 얻었음을 알 수있다. 이같이 무왕은 익산지역의 금을 바탕으로 성장한 지방세력이거나 몰락한 왕손 중 익산에서 신라와의 협력을 통해 성장한 세력일 가능성이 보여진다. 이같이 용(龍)의 아들로 신성시된 무왕은 미륵사탑을 세워 익산지역 주민들의 인심을 얻었다. 결국 무왕은 이는 마한의 중심지였던 익산지방 고유의 용신앙과 불교신앙인 미륵하생신앙(미륵불이 내려와 사바세계를 극락으로 만들어 달라고 기원하는 신앙)을 연결하여 고구려신라의 계속된 침략에 국가존망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익산을 국가증흥의 땅으로 삼아 불국토로 탈바꿈하려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무왕, 삼국시대 최대의 사찰 미륵사와 왕궁을 건립해 새 희망을 꿈꾸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과 왕비가 미륵삼존의 출현을 계기로 금당과 탑, 회랑 등을 세 곳에 건립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1980년부터 1994년까지의 발굴 조사를 통하여 미륵사의 배치는 중원과 동서 삼원으로 3개 사찰이 함께있는 구조임이 밝혀졌다. 미륵사 서원에 세워져 있는 미륵사지석탑은 절반 이상 붕괴되어 6층까지 일부가 남아있던 것을 1915년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로 보강한 상태였다. 이 석탑은 본래 9층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규모가 장대하고 석재를 사용하여 목조탑을 표현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의 시원으로서 그 가치가 크다. 미륵사지석탑은 2009년 1월 1층의 제1단 기둥돌 상면에서 사리를 모신 구멍이 발견되고 내부에서 사리장엄과 봉안기록 등 유물이 발견되어 백제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탑은 2017년 남아있던 6층까지의 모습으로 재현되었고 곧 개방될 예정이다. 미륵사의 창건배경은 신라 황룡사(皇龍寺)의 예를 고려할 때 주변국을 복속시키고 미륵불국토를 구현하고자 하는 신앙적인 염원에서 발현된 것이라고 보인다. 또 무왕은 현세에서 부처를 돕는 왕인 전륜성왕(轉輪聖王)에 비유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이 익산은 무왕이 이루고자 한 미륵 불국토의 땅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무왕은 백제를 불교를 통해 신성국가로 중흥하려하였고 이를 위해 익산지역에서 새로운 수도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익산 천도문제는 1970년 일본 교토대 마키타 다이료 교수가 찾아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에 의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그 내용중에 백제 무광왕(무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여 사찰을 만들었는데 그때가 정관 13년(639년)이었다. 때마침 하늘에서 뇌성벽력을 치는 비가 내려 새로 지은 제석정사가 재해를 입어~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지모밀지는 삼국사기에는 지마마지(支馬馬只)라고 했는데 이곳이 금마(金馬)로서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백제 별도로 표현되어 백제 천도설, 별도설, 신도설 등 다양한 입장이 개진되고 있다. 그런데 왕궁유적 등에서 발견된 5부명 인장와와 수부(首府수도를 뜻함) 글자 기와의 존재와 왕궁유적에서 발견된 중국 북조(北朝)시대에 제작이 유행했던 청자편의 발견은 왕궁리 유적이 수도의 왕궁이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600년 무왕이 집권하면서 자신의 출생과 관련있는 익산 금마에 미륵사를 창건하고, 비슷한 시기에 왕궁리 유적에서 보이는 당시의 성벽과 건물터들에 궁궐이나 부속건물을 지어 천도를 위해 새로 도성을 조성하였다. 이같이 백제의 무왕(武王)은 금마로 왕도를 옮겨 백제의 중흥을 꾀하며 당시 미래의 구세주 신앙인 미륵신앙을 백제불교의 주축으로 하고 호국적인 나라의 사찰로 미륵사를 창건하였고, 불교 수호를 자임한 자신의 궁궐의 근처에는 토착신과 연결되는 제석사를 창건해 왕실의 번창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무왕은 익산지역에 백제를 새롭게 중흥시키기 위해 수도를 만들어 옮기고 미륵 불국토신앙과 전통신앙을 결합해 백성들에게 새로운 백제의 희망을 제시하였다.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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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07 20:29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④동아시아 해양국가 백제의 터전 전북 - '나루터 국가'백제, 바다 통해 중국-일본 잇는 허브였다

△해양국가 백제백제(百濟)의 나라이름은 한자로 일백 백(百)에 건널 제(濟)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지와 삼국사기등 사서에서는 백제의 나라이름이 정해지는 과정이 3단계의 변화를 보이며 나타나고 있다. 먼저 중국 기록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맏형 백(伯)자를 쓰는 백제(伯濟)가 마한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서인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시조인 온조가 처음에 한강 남쪽에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나라를 세웠다(十臣補翼) 하여 이름을 십제(十濟)로 정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미추홀로 갔던 형 비류가 죽자 그를 따랐던 세력이 동생 온조와 합쳐지면서 백성이 즐겁게 따랐다하여(백성락종百姓樂從) 백제(百濟)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이들 사료를 정리해 보면 백제라는 나라이름이 만들어지기 까지 백제(伯濟)-십제(十濟)-백제(百濟)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이 명칭들의 변화를 보면 이름의 앞 글자만 으뜸 백(伯)- 열십(十)-일백 백(百)으로 바뀌고 뒷부분의 제(濟) 글자는 계속 유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변하지 않은 글자, 즉, 제(濟)는 건너다라는 동사적 의미와 함께 명사로 나루터 , 포구라는 의미가 있다. 결국 백제라는 나라이름은 으뜸나루터 국가-열 개 나루터 국가-백 개 나루터 국가로 발전한 것이다. 백제가 한강, 예성강, 임진강 및 경기, 충청, 전라지역 서해안 포구세력들을 중심으로 성장해 동아시아 해양 중심국가로 성장한 사실이 국호에 표현된 것이다. 이 같이 백제라는 이름에 담긴 뜻은 현재의 한국-중국-일본 등의 지역을 바다를 통해 연결하는 동아시아 해양 국가임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한성시기 해양국가 백제의 바다제사유적 죽막동유적한성백제이래 해양국가 백제의 모습은 우리나라 최초이자 현존 유일의 백제시대 바다제사 유적인 전라북도 부안 죽막동 유적이 1992년 수성당(水聖堂) 주변 해안초소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면서 극명하게 확인되었다. 즉,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은 서해안에 돌출된 해안절벽에 형성된 해식동굴 옆에 만들어진 유적으로 백제시대 이후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바다 제사가 이어진 유적이다. 국립전주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결과 이곳이 백제시대 이래로 바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왔던 곳임이 확인되었다. 죽막동 제사유적은 수성당을 포함한 공간인데 수성당은 바다여신 개양할미를 모신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개양할미는 키가 매우 커서 나막신을 신고 서해를 걸어 다니면서 수심을 재고, 풍랑을 다스려 어부들이나 이곳을 지나는 선박들을 보호했다고 한다. 바로 이 여신의 원형이 백제이래 바다항해 수호신으로 모셔졌던 것이다. 즉, 백제이래 바다 항해의 안전을 기원한 우리민족의 해양제사유적의 원형모습을 보여준 곳이다.제사유적에서는 3세기 후반부터 마한, 백제, 가야, 왜 토기 및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특히, 신에게 바쳐진 후 인간이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입구 부분을 깨트린 백제의 토기와 무기 등 금속제 유물들이 시대변화에 따라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가야토기 및 왜에서 만든 석제모조 무기와 중국제 초기 청자 등이 나타나 이른 시기부터 백제가 중국 및 가야, 왜 등과 바다를 통해 교역을 진행하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의 병이나 그릇, 고려청자 및 조선 백자 등 바다 신에게 바친 유물들이 나타나 백제 이래 바다 신에 대한 제사전통이 계승되었음을 보여준다.죽막동 유적은 선사시대 이래로 중국이나 북방의 문화가 한반도 남부로 전파되던 해로상의 중요지점이며 특히, 백제시대에는 가야와 왜에 선진 문물을 전해주던 역사를 보여주는 곳이다. 즉, 항해술이 아직 발달되지 못했을 때 연안을 따라 섬이나 육지의 주요지점을 표시 삼으면서 항해시 서해안으로 돌출된 이곳을 항해상의 중요한 지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해식동굴에 파도가 쳐서 나는 소리는 바다신의 노여움을 상징하는 바다 울음소리로서 인간의 경외감을 일으켰다. 이곳은 백제이래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던 바다신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곳으로 해양국가 백제를 지켜준 곳이다.△웅진시기 백제의 바다출구, 익산 입점리유적한편, 1986년 봄에 한 학생이 토끼를 잡다 발견한 익산 입점리 고분유적은 백제가 웅진(공주)와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긴 이후 가장 중요한 대외 창구인 금강하구에 위치해 해양국가 백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 유적은 금강하구 포구인 웅포(곰개나루) 배후의 함라산 자락에 위치해 백제의 해양진출 관문을 통치한 인물의 무덤으로 파악된다.이 고분군 가운데 제1호분은 봉토 밑지름이 약 15m의 규모로 출토된 유물로서는 금동제장신구류금동제신발말재갈철제발걸이토기중국산 청자항아리화살통장식금귀걸이유리구슬 등이 있다.특히 금동제 관모의 모양과 제작수법은 마한세력의 무덤으로 파악되는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이나 일본의 규슈지역의 구마모토현〔熊本縣〕 후나야마고분〔船山古墳〕출토품과 유사하다. 특히, 일본 후나야마고분 출토품이 좀 더 후대의 양식으로 보인다. 또 금동제 신발의 경우 입점리 1호분과 나주 신촌리 9호분, 일본 후나야마고분에서 모두 1점씩 출토되었다. 입점리에서 출토된 신발이 일본 후나야마 출토품보다 신촌리 9호분 출토품에 더 가까운 형태를 보이고 있어 백제에서 하사한 유물임을 보여준다.이같이 입점리고분에서 출토된 관모는 당시 백제와 마한세력 및 일본과의 문화교류를 연구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그리고 이곳에 분포되어 있는 무덤들은 5세기경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로 설명이 가능하다. 먼저 백제에서는 판석으로 만든 돌널〔石棺〕이 6세기 이후에야 유행했는데 입점리고분보다 후대인 일본 후나야마고분에서 그러한 돌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6세기경의 관모와 입점리고분의 것을 비교해 볼 때 입점리고분의 관모는 4세기 이후6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이같이 백제가 한강유역에서 금강유역의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후 금강을 새로운 해양진출 통로로 활용하면서 금강하구의 중요 포구지역인 현재의 웅포지역이 부각되었다. 백제는 이곳에 백제의 지배층을 파견하였고 그 지배층이 죽자 백제의 새로운 무덤양식인 돌방무덤을 만들고 백제 왕실의 하사품인 금동모자와 금동신발 및 마구 그리고, 중국과의 교역품인 청자 등을 함께 부장해 백제의 위용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관련 유물이 마한의 잔존세력 공간인 나주와 백제의 일본 진출 거점인 규슈지역에까지 확산된 모습에서 입점리유적은 백제가 금강을 통해 동아시아 세력과 교류한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으로 파악된다. 이같이 전라북도의 부안 죽막동유적과 익산 입점리 유적은 백제가 바다를 통해 동아시아를 연결해 해양국가로 성장하는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특히, 현재 전라북도가 새만금을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환황해권 중심지역으로 발전하려는 미래전략의 역사적 근거를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현재 부안의 경우 죽막동 유적의 중요성에 부응하는 전시관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고 관련 유적에 대한 안내도 전무한 상황이다. 향후 죽막동유적과 입점리유적 등 두 유적을 연결한 해양백제의 역사를 알리는 체계적인 학술, 교육, 홍보 공간의 마련과 프로그램 마련이 시급히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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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2.22 13:36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③ '대한' 국호 발상지 전북 - 고조선 명맥 이은 '삼한' 총괄해 '대한' 으로 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다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이름은 언제 그리고 왜 대한이란 명칭으로 생겨났을까? 사실 우리가 월드컵 경기 등 국가 행사 때 응원 구호로 외치는 대~한민국! 국호는 근현대사에서 우리 민족이 당한 아픔과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의 역사가 담긴 나라이름이다.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1910년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지 9년 후인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을 통해 나타났다. 즉, 민족대표와 전 국민적 참여를 통해 독립을 선언한 이후 독립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정부를 세우기 위해 국내 및 노령, 중국 등 각 지역의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이 상해에 모여 정부수립을 논의했다.그리고 1919년 4월 10일 임시정부의 첫 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결정했다. 당시 몇 가지 논의안이 있자 신석우 선생이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보자라고 제안하여 1897년 세워진 대한제국에서 황제를 의미하는 제국(帝國)을 민주공화국을 뜻하는 민국(民國)으로 바꾸어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국호를 정했다. 다만 국권을 상징하는 대한명칭에 영토와 국민을 일제에게서 아직 회복 못했으니 임시를 붙여 정부이름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결정한 것이다.임시정부가 사용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이름은 해방 후 1948년 7월 소집된 제헌국회에서 새 나라의 국호로서 대한민국을 정하면서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은 당시 연호를 대한민국 30년으로 표현하였고, 1948년에 처음 발행된 대한민국 관보 1호에는 발행일이 대한민국 30년 9월 1일로 적혀있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였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1987년 개정된 현재의 헌법 전문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계승의식을 명확히 하고 있다.△대한제국, 왜 조선이 아닌 대한을 국호로 정했나?대한(大韓)이란 나라이름의 유래는 1897년 10월 고종이 기존의 나라이름 조선(朝鮮)을 폐기하고 새롭게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선포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 등 국내외 혼란으로 조선왕조의 혼란과 국가적 위기가 매우 커진 상황이었다. 고종은 나라의 독립과 자존을 확립하기 위해 중국과의 예속관계를 단절함과 동시에 황제국가 체제로 일신하는 국가체제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이 상황에서 기존의 국호인 조선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독립성을 부각하기 어렵다고 보아 역사적 명분과 근거를 가진 새로운 국호제정이 필요하였다. 이에 따라 고조선의 역사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조선의 의미를 유지하면서도 보다 독립적인 명칭으로 찾은 것이 마한, 진한, 변한 등 삼한(三韓)을 총괄한 대한(大韓)이란 표현이었다.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의 반조문의 내용을 보면 대한의 의미는 단군의 고조선에서부터 변한, 진한, 마한 즉 삼한을 통일한 고려와 이를 계승한 조선 등을 망라하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다.그렇다면 삼한으로 확산된 한(韓)이란 명칭은 어떻게 나타났을까?△고조선 준왕의 남래와 삼한정통론《삼국지》 동이전 등 중국사서에는 기원전 194년경 고조선의 준왕이 신하인 위만의 정변으로 나라를 빼앗긴 후 남쪽 지역으로 이동하여 한(韓) 왕이 되어 마한을 다스렸고 이후 진한, 변한의 명칭이 생겼다는 기록이 나타나 있다.여기서 한(韓)이란 명칭은 동북아에서 왕을 의미하는 Khan(한<汗>) 또는 크다는 의미의 고유어 한을 한자로 쓴 것으로 파악된다. 바로 이 명칭이 삼한의 한명칭이 된 것이다. 한편 고조선의 준왕이 남쪽으로 이동한 지역에 대해 《제왕운기》를 비롯하여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등 대부분 전통 지리서는 현재 전라북도 익산지역이 고조선 준왕이 남쪽으로 내려 온 지역이라고 전한다.이 같은 사실은 현재 전라북도권 지역에서 한이란 명칭이 시작되어 마한, 진한, 변한 등 삼한의 명칭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그런데 이 사실에 대해 조선후기 학자들은 우리 역사의 정통이 단군조선이래 고조선 준왕을 거쳐 마한지역으로 계승되었다는 마한(삼한)정통론을 주장하여 역사 정통성이 삼한지역에 있음이 강조되었다. 위만이 정권을 장악했지만 이는 불법적인 것으로 정통성은 남쪽으로 이동한 준왕에게 있고 이를 계승한 삼한지역에 역사의 정통이 계승되었다는 것이다.한편 금마 등 익산지역과 함께 만경강을 둘러싸고 있는 전주지역에서 청동기시대 중요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면서 고조선과의 연계성이 고고학적으로도 확인되고 있다.특히, 익산지역의 초기 청동기, 철기 계통 유적과 유물 및 최근 전주 혁신도시 건설과정에서 확인된 청동기, 철기유적은 이들 공간이 만경강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중요 거점지역으로 성장하였으며, 고조선계통 유물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고조선계 유민이 이동한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고조선 준왕의 이동과 한이라는 명칭의 사용, 그리고 조선시대 고조선의 정통성이 삼한지역으로 계승되었다는 삼한정통론 등으로 이어진 계승의식이 있었기에 대한이라는 명칭을 국호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 중심지가 전북이었던 것이다.이를 상징하듯이 고종은 1899년 전주 건지산에 전주이씨 시조의 무덤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대한조경단을 설치했다.이같이 전라북도 지역은 만경강과 동진강을 둘러싼 호남평야를 중심으로 고조선의 정통을 이은 마한의 터전으로서 삼한에서 삼국으로 연결되는 우리 역사 정통의 중심이자 우리의 자랑스러운 나라이름 대한국호의 발상지로서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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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2.01 23:02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② 세계유산이 된 고인돌과 전북의 청동기·철기문화 - 익산-전주지역, 선사-역사시대 잇는 거점 증명

△전북의 고인돌, 세계유산이 되다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선사유적은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에 성행하여 초기 철기시대까지 존속한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으로 정치세력 형성과 국가성립시기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고인돌은 나라에 따라 이름이 다른데, 한국에서는 고인돌(굄돌)로 부르는데 한자로는 한국과 일본에서 지석묘(支받침 지 石돌 석 墓무덤 묘), 중국에서는 석붕(石돌석 棚시렁 붕), 유럽 등지에서는 돌멘(Dolmen) 등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 고인돌은 선사시대 무덤으로 이해되는데 조상신에게 제사지내는 제단이자 신전같은 의미로도 파악된다.흥미로운 것은 전 세계에 존재하는 고인돌 가운데 가장 많은 고인돌이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존재하며 그중에서도 전라북도 지역이 가장 많다. 이같이 한반도에 집중적으로 퍼져 있는 고인돌의 기원에 관해서는 바다를 통해 동남아시아 또는 중국 동북부 지역에서 전해졌다는 전파설과 함께 주변 지역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많다는 점과 축조연대가 이르다는 점에서 주변 지역과 관계없이 자체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자생설이 맞서고 있어 아직까지 뚜렷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이 같은 우리나라의 고인돌 중 전라북도의 고인돌은 예로부터 꽤 유명하였다. 즉, 820여년전인 서기 1200년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는 전주에서 관리를 지낼 때 익산지역을 지나며 일부러 소문이 자자한 익산의 지석묘를 찾아 간 기록을 『동국이상국집』에 남겼다. 그리고 이 기록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고인돌 기록이었다.다음날 금마군(현재 익산)으로 가는 중에 이른바 고인돌(支石)이란 것을 찾아가 보았다. 고인돌이란 것은 세상에 전하기를 옛날 성인(聖人)께서 고여 놓은 것이라 하였는 데 과연 기이한 모습이 매우 신기하였다. 《동국이상국집》고려시대에도 이미 소문이 자자했던 전라북도의 고인돌은 만주-한반도 지역에 집중 분포된 세계 고인돌을 대표하여 2000년 11월 29일, 강화, 화순의 고인돌군과 함께 고창지역의 고인돌군락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기원전 5~4세기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양 최대의 고인돌 집단 군락지인 고창 지석묘군(죽림리, 상갑리 고인돌군)은 고창읍에서 북서쪽으로 약 10㎞ 남짓한 지점에 자리한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야산의 기슭에 큰 군집을 이루고 분포되어 있다. 상갑리의 경우 야산의 남사면 기슭에 약 2.5m 거리에 600여 기의 고인돌이 산줄기 방향으로 분포되어 있다. 도산리의 탁자식 고인돌은 가장 남쪽에 분포되어 있어 그 의미가 자료적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고창의 고인돌군은 전 세계에서도 가장 밀집된 곳으로 대표적인 2가지 고인돌 형태가 공존해 청동기 시대 묘제 양상과 당시 사람들의 사상과 문화 등을 알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같은 유적은 전라북도 선사문화의 특성을 잘 반영한 것으로 이같은 문화를 토대로 마한으로 상징되는 초기 역사의 중심이 전라북도 권역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한국 청동기, 철기문화의 중심 만경강 유역최근까지 진행된 고고학계의 발굴 성과에 의하면 기원전 3세기경 고인돌문화는 쇠퇴하고 중국 랴오닝지역 문화가 한반도지역으로 옮겨오며 새로운 철기문화가 한반도 서해안권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즉, 경기, 충청, 전라의 해안을 따라 마한으로 통칭되는 세력이 형성되었는데 금강유역과 함께 만경강을 사이에 둔 익산-전주-완주지역이 새로운 중심이었음이 최근 발굴 성과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즉, 이 일대에서 석관묘나 움무덤에서 청동검과 청동거울 및 철제무기와 토기, 구슬 등이 출토되며 마한문화의 중심모습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완주 상림리에서 발견된 중국식 동검문화는 만경강으로 연결된 교통로가 선사이래로 많은 문화가 전래된 통로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를 전후하여 중국 전국시대의 철기가 유입되면서 고조선 및 중국계 문화가 전래되면서 이 지역은 마한의 중심으로 성장하였다.전라북도 권역에서 초기 목관을 쓴 토광묘의 중심 분포권은 고조선 준왕의 남래지로 알려져 있는 익산을 중심으로 하는 만경강 유역으로 이 문화세력은 기원전 2세기경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 이후에는 완주 갈동, 신풍, 덕동, 전주 원장동, 중인동, 중화산동 등 만경강 남쪽의 전주완주 일대가 중심이 된다. 이 같은 철기문화의 유입은 고조선 준왕의 남래 및 고조선 유민의 이동으로 촉발되어 마한(馬韓) 성립의 중심으로 익산과 전주지역이 자리하게 된다.한편, 목관을 쓴 토광묘는 기원 후부터는 점차 사라져 무덤주위에 구덩이를 판 주구묘로 대체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목관)토광묘 축조를 담당하였던 세력이 준왕세력이라면 주구묘를 축조한 세력은 토착 마한인들로 볼 수 있으며 준왕세력이 약화되어 사라진 이후에 다시 마한인들에 의해 마한의 묘제인 둘레에 구덩을 파 무덤을 감싼 주구묘가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같이 익산-전주 지역은 전통시대 문헌자료와 1960년대 이래 발견된 익산의 청동, 철기유적 그리고 최근 전주-완주 혁신도시 건설과정에서 발견된 다량의 청동기, 철기유적을 함께 고려할 때 한국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잇는 중요한 거점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즉, 고조선시기 위만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준왕이 신하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온 지역으로 금마지역이 구체적으로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부응하는 기원전 5~2세기경 청동기, 철기유적이 서해안 항로 가운데 만경강유역 공간인 익산-전주-완주로 연결되는 지역에 분포하고 있음이 수십 군데 유적에서 확인된다. 이같이 전라북도의 대표적 강줄기인 만경강 유역 공간은 한국사의 첫 역사를 연 고조선의 청동기, 철기문화가 한반도 중남부로 전해진 첫 공간이며 역사적 기록과 고고학적 유적, 유물을 통해 확인된 마한의 중심으로 호남지역을 대표해 성장한 곳이다.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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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18 23:02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① 프롤로그 - 조선왕조 발상지, 왕도 역사 품은 호남 유일의 공간

2018년은 전라도(全羅道)라는 명칭이 생긴지 1000년이 되는 매우 뜻 깊은 해이다. 천년 전인 1018년, 고려 현종은 기존의 전주일대의 강남도와 나주일대의 해양도 지역을 합쳐 전주(全州)와 나주(羅州)를 잇는 길 즉, 도(道)로 연결된 지역을 포괄해 광역 행정구역인 전라도(全羅道)를 설치했다. 이 명칭이 조선으로 계승되고 현재의 대한민국까지 이어져 현존하는 8도 명칭 중 가장 오래된 천년 전라도가 된 것이다. 전라도 명칭이 생긴 이후 300여 년이 지난 뒤에야 경상도(1314년), 충청도(1356년), 강원도(1395년), 평안도(1413년), 경기도(1414년), 황해도(1417년), 함경도(1509년) 등이 생겨나 전라도 명칭이 타 지역에 비해 300~400년이나 오래되었음을 보여준다.따라서 전라도 천년을 맞이하는 2018년, 전라도 정명 천년의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 역사의 긴 흐름 속에서 전라도 가운데 특히, 전라북도 지역의 역사적 역할과 의미는 새롭게 주목되고 있다.우리나라 역사 전개과정에서 전라도지역은 크게 조선을 먹여살린 호남평야지역(전주익산완주김제정읍)과 한중교류와 연안 항로의 거점 서해안권(군산부안고창), 그리고 새로운 가야 세력의 거점(남원진안장수)과 문화 교차로 역할을 한 지역(무주임실순창) 등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같은 전라도 천년의 역사를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주제로 개관하여 새로운 천년을 조망하고자 한다.△대한국호 발상지 전라북도대한(大韓)이란 나라이름은 1897년 10월 고종이 기존의 나라이름 조선을 폐기하고 새롭게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선포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 명칭은 고종이 나라의 독립과 자존을 확립하기 위해 중국과의 예속관계를 단절함과 동시에 나라를 황제국가 체제로 일신하는 국가체제 변화를 모색하며 선택한 명칭이었다. 이때 고조선의 역사를 계승하면서 독립적인 명칭을 찾은 것이 마한, 진한, 변한을 총괄한 대한(大韓)이란 표현이었다. 그런데 삼한의 출발인 마한이란 명칭은 바로 고조선의 마지막왕 준왕이 전라북도 익산지역에 피난하여 시작된 명칭이었다. 결국 전라북도는 고조선의 정통을 이은 마한의 땅으로 대한(大韓) 국호의 발상지로서 우리 역사의 근간 지역임을 보여준다.△백제중흥, 부흥, 부활의 땅 전라북도백제는 동아시아 해양교류를 통해 문화를 새롭게 창조하고 전파한 해양국가였다. 이 같은 백제문화의 거점인 익산지역은 백제 무왕이 수도를 옮겨 백제의 마지막 왕도가 조성된 백제 중흥의 터전이었다. 또한 660년 백제가 붕괴된 직후 백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부흥군의 핵심 거점인 주류성이 현재 부안 우금산성으로 확인되고 있다. 즉, 부안지역은 백제역사 부흥의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900년 후백제가 전주에 도읍하여 결국 백제는 다시 부활하였다. 이같이 전라북도는 백제의 중흥의 터전이자 부흥의 거점이며 결국 백제를 부활시켜 백제를 살려낸 백제 재창조의 땅이었다.△왕도(王都)의 땅 전라북도900년 견훤은 세력을 키웠던 무진주(현재 광주)에서 수도로서 전주를 선택하여 후백제를 공식 출범시켰다. 37년이란 기간이었지만 전주는 국가의 수도로서 그에 걸맞는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모든 부문의 중심지였다.또한, 전주는 전주이씨의 관향(본관도시)으로서 조선왕조의 원형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특히, 고려말 우왕때 남원 운봉의 황산(荒山)에서 대승리를 거두어 전국적인 명성을 얻어 새로운 왕조탄생의 원동력을 갖게 되었던 전북지역은 태조의 영정을 모신 경기전이 마련되고 조선왕조실록을 모신 사고가 설치되고 임진왜란을 거치며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이 유일하게 보존되어 조선 역사수호의 도시로서 위상을 드높였다. 이같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 후백제 왕도,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전라북도는 왕도의 역사를 품은 호남의 유일한 공간이다.△모두가 하나되어 평등한 대동(大同)과 개벽(開闢)의 땅 전라북도전라북도 지역은 모두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동학 정신이 가장 넓게 유포된 지역이다. 이 같은 특성은 1894년 조선왕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구호아래 동학농민혁명으로 꽃 피워졌다. 이를 통해 우리 역사상 최초로 민주주의적 통치인 관민협치를 실행한 곳이었다. 또한 외세의 침입에 맞서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외치며 분연히 일어난 절의의 땅이었다. 이러한 대동과 변혁의 정신은 종교적으로 계승되어 증산 강일순의 후천개벽과 소태산 박중빈의 정신적 문명개벽으로 발전되어 새로운 세계로의 지향점을 제시하였다.△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전라북도는 앞서 개관한 것처럼 고조선의 준왕이 새로운 나라를 이룩한 곳으로 역사적 위상을 자리하고 있다. 또한 백제의 무왕은 당시 수도였던 사비(지금의 부여)를 떠나 백제를 새롭게 일으켜 세워 새로운 수도를 만든 백제 중흥의 땅이었다. 그리고 660년 백제가 붕괴한 후 663년 백제부흥군이 현재의 부안 우금산성지역인 주류성에서 왜의 지원군과 함께 백제 부흥을 꿈꾸었던 지역이다. 더욱이 668년 고구려가 붕괴한 후에는 고구려 부흥군이 익산지역에 옮겨와 보덕국을 세워 신라와 함께 당과 맞서며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였던 대안과 재창조를 모색한 땅이었다.한편, 통일신라시대 여전히 백제인으로 인식된 승려 진표는 불교의 미래 구세주인 미륵의 이념을 퍼트려 백제유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으며 후백제 견훤은 전주를 중심으로 해양대국 백제의 역사를 새롭게 부활시켰던 곳이다. 또한 고려말 이성계는 새 왕조 창출의 의지를 전주에서 피력해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의 역사성을 극명하게 부여해 주었으며 전봉준을 필두로 한 전북의 사람들은 반역으로 낙인찍혔던 정여립의 아픔을 극복하고 진정한 대동세계를 이루고자 새 역사를 만들었다.또한 진안장수 및 남원 일대 지역은 철기의 생산을 통해 고대국가 성장의 동력을 구성한 공간으로 가야의 중심이자 백제중흥의 기축으로 역할해 한국고대사의 새로운 문화중심으로서 부각된 곳이었다.따라서 전라북도 지역은 고조선이래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과제를 극복하고 대안을 찾아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현장이었다. 이 같은 전라북도의 역사적 전통과 경험은 결국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지역갈등, 남북 통일 및 동아시아 평화와 인류 공영을 위한 역사적 혜안의 터전이다. 이러한 전라북도의 역량을 찾아 새로운 미래 천년 역사를 만드는 창조력을 발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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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0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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