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산은 내가 태어난 고장의 명산이면서 내 노년의 삶과 놀이터다. 결혼 전 짧은 직장생활 외엔 살림만 하던 주부가 21C들어 처음으로 시행한 문화관광해설사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가는 삶을 그 무엇에 비교할 수 있으랴. 마이산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과연 있었을런지.
조선 태조가 왕이 되기 전, 선인으로부터 왕권의 상징인 금자(金尺)를 받는 꿈을 꾸는데 그곳이 마이산으로 전해진다. 당시 고려 장수이던 이성계는 그 꿈을 꾼 얼마 뒤 남원 운봉까지 쳐들어온 왜군을 크게 이긴 후 개선 길에 특이한 봉우리를 만나는데 그 모습이 마치 꿈속에서 받았던 금자를 뭉텅이로 묶어 놓은 것 같아 속금산(束金山-금자를 묶어놓은 산)이라 명하고 돌아간 12년 뒤 조선을 개국하게 된다. 이후 결코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마이산을 형상화한 일월오봉도를 항상 용상 뒤에 두어 든든한 울타리로 왕을 지키는 왕의 상징물이 되었다는 등 역사와 야사, 전설과 설화가 어우러진 갖가지 이야기 속에는 청실배나무도 함께한다.
청실배나무 이성계 고려 말 장수 시절 시간만 나면 전국 명산을 돌며 기도를 했는데 마이산에도 들러 기도의 증표로 심었다는 돌배나무 일종인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다.
은수사(銀水寺) 배나무 옆에는 사찰명의 유래가 되는 맑은 우물이 있다. 그 우물 뒤로 수마이봉이 위용을 자랑하고 그 바로 아래는 신라 시대부터 나라에서 제를 올리던 제사 터로 지금까지도 매년 군민의 날 전날 산신제를 올리고 있는 신성한 자리다. 그 아래 우물과 그 옆 배나무라면 옛이야기 속 풍경이 떠오르고 배나무의 장수(長壽) 이유가 그럴듯하지 않은가. 이런 청실배나무와 나와의 인연은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엮은 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전국대회 수상이다. 상금과 함께 자신감과 자부심 그리고 열망 등 내게 참 많은 것이 주어졌다.
사오정, 오륙도라는 빠른 정년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표현하는 신조어가 떠돈 지 오래다.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삼포 세대를 넘어 집 장만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해 오포 세대라는 젊은이들의 실상이 안타깝기만 하다. 정년을 하고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로 아직은 더 일하고 싶은 나이 많은 젊은이가 주위에는 너무 많다. 남편도 그중 한 사람이다. 35년 직장생활이 즐겁기만 했을 리 없는데 퇴직 후 내 출근길을 도우며 정류장에서 부러운 듯 배웅하는 모습이 짠할 때가 많다. 내 하는 일과 일터가 그래서 더 고맙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새로운 사람들과 만남과 소통은 삶의 활력이 되면서 걷는 그 길은 바로 자연스러운 내 운동장이 된다.
“엄니 어디 가요?”/“속꼼산(마이산)에”/“왜요?”/“니(너) 잘되라고 빌러”
말을 아끼며 바쁘게 집을 나서던 어머니는 나들이 차림에 쌀자루였겠지, 작은 보퉁이 하나 머리에 이고 계셨다. 가지각색으로 피어나던 꽃들 이울고 나뭇잎 차츰 무성해지는 사월 초파일이면 연례행사로 이어지던 어머니의 마이산 행이었을 텐데. 칠십이 멀지 않은 내가 아직도 건강히 일과 놀이를 즐길 수 있는 이 축복과 고마움에 예닐곱 살 때쯤이었을 그날의 짧은 대화 속 정경을 자주 떠올린다. 마이산에 다녀온 그 날 밤 어머니 꿈속에서 날 위한 목자(木尺) 하나 받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모자라면 채우려 노력하고 넘치면 덜어내는 여유, 마이산은 그런 마음의 여유로 꿈을 꾸며 사랑을 생각하는 이야기 동산이다. 거기에 각자의 사랑 이야기 한 자락 넓게 펼치거나 걸쳐놓아도 탓하거나 흉보는 이 없는 너르고 편안한 나의 놀이터다.
* 이용미 수필가는 ‘수필과비평’으로 등단하여 현재 마이산 문화해설사로 활동 중이다. 수필집 「그 사람」외 2권을 펴냈으며, 행촌수필문학상과 진안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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