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다가서기】
올해는 고려시대인 1018년 ‘전라도’라는 이름이 탄생한 지 1000년이 되는 해이다. 전라도 1000년 역사의 중심지인 전주는 후백제의 도읍지이자 조선왕조의 발원지로서 많은 역사· 문화적 자산이 남아 있는 왕도(王都)이다.
천년고도 전주의 역사는 후백제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후백제 37년의 역사와 견훤 왕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전주 시민의 관심도 많지 않다.
아이들이 교과서를 통해 접하는 후백제의 모습은 어떨까?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서 다루는 후백제의 역사는 한 쪽 남짓한 분량이며 견훤왕의 모습조차 고려와 싸우다 결국 고창(안동)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왕위 계승 문제로 맏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갇히는 불운한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승자(고려)의 편에서 후백제와 견훤왕의 모습이 그려진 탓일 것이다.
조선 영조 때 쓰여진 ‘동서강목’에 따르면 후백제는 백제의 옛 땅을 남김없이 차지해 신라와 고려보다도 강력했다고 기술했다. 또한 미국 켄서스 대학의 허스트 3세 교수의 ‘고려왕조 창건 속 인물들’이라는 논문에는 ‘견훤은 상당한 군사적, 도덕적 힘을 가지고 있었던 백제인으로 운명의 뒤틀림이 없었다면 10세기 한국은 견훤에 의해 통일됐을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로 후백제가 막강했음을 말해준다.
세계적으로 문화지수가 높은 도시들의 공통점은 지역민들의 높은 문화자긍심이라고 한다. 지역민들 스스로 자신들의 역사문화를 높이 평가하고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며 나아가 문화를 즐긴다.
천년고도, 문화의 도시 전주 시민으로서 후백제 역사를 제대로 평가하고 더욱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에 후백제의 역사가 담긴 기사를 통해 그 흔적을 찾아보고자 한다.
【신문 읽기】
<읽기 자료1>읽기>
신앙으로 왕도 보호하고 책으로 지식문화 수도 완성
- 완전한 땅, 후삼국 통일 수도 전주 꾸민 견훤왕
신라서 건축 기술자 데려와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꾸며
신령스러운 동물 배치하고 동서남북에 사찰 세워 수호
후삼국 최다 서적 모아 문화 수도 이루려
△ 견훤왕, 후삼국 통일 수도 전주를 만들다
후백제 견훤왕은 892년 무진주(현재의 광주)에서 거병하고 독자적인 정치행보를 유지하다가 900년 전주로 도읍하여 후백제의 공식적인 출발을 진행하였다. 이 후 936년 신검왕대에 후백제가 망하기까지 전주는 37년 동안 후백제의 수도로서 기능하였다. 이 기간은 한 국가의 도성 구성과 관련하여서는 충분한 시간으로서 전주의 도시구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기간이 되었다. 특히, 927년 신라 경주를 공격하고 경순왕을 옹립하고 공산에서 고려군을 대패시킨 견훤은 후삼국 통일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다. 이때부터 견훤은 전주를 통일 수도에 걸 맞는 체계를 갖추게 하였으며 화려하고 사치스럽다는 평가가 들 정도로 전주를 꾸몄다. 특히, 신라에서 데려온 ‘여러 분야에 뛰어난 기술자’를 활용한 전주도성건축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종래 후백제 왕도 전주의 공간에 대해서는 다양한 공간설정과 가능성이 검토되었다. 가장 최근 전주박물관은 전주를 둘러싼 고토성의 흔적과 현재 구도심을 중심으로 한 도성공간들에 대한 기본안을 발굴과 연구를 통해 확인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국가적 목표와 방향이 후삼국 통일이었고 그 지향점이 고구려 옛 영토까지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 같은 목표 구현을 위해 견훤왕은 종교 신앙적 보호체계를 구상하고 이를 실천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 유교의 신령한 네 마리 동물 사령(四靈), 전주를 지키다
견훤왕이 후백제 왕도 전주를 지키기 위한 종교 신앙적 흔적으로 주목되는 것이 유교의 경전 ‘예기(禮記)’에 나오는 네 마리 신령스런 동물인 사령(四靈)관념이다. 이는 인간을 먹이는 가축의 원형인 기린·용·거북·봉황으로 점차 도성수호의 신령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도교와 연결되어 도성 방위의 사신(四神)신앙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후백제 왕도 전주를 둘러싼 지명에 이들 명칭이 남아있어 주목된다. 즉, 전주를 둘러싼 산줄기에 부여된 명칭인 기린봉의 기린, 용머리고개의 용, 거북바위의 거북, 옛 지도에 표현된 봉황암(鳳凰巖)의 봉황이 그대로 전주에 나타나고 있다.
한편, 이들 대응내용을 살펴보면 기린봉과 봉황암이 서로 인접하여 산림에 위치하는 형세이고 용과 거북은 전주천과 연결되어 연못에 깃들여 사는 형세와 연결되는 지형적 형세를 보여주고 있다. 사령은 상서로운 동물로서 인간을 먹이는 존재이자 어진 정치를 상징하고 태평성대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이 같은 존재가 도시수호 및 구성에 존재한다는 것은 국가통치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이념체계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표현이 전주에 적용될 수 있는 시점은 후백제 왕도이던 시기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 결국 견훤왕은 사령신앙에 입각한 관념을 전주의 공간에 대응시켜 후백제 전주를 명실상부한 “완벽하고 온전한 최고의 땅”으로서 만들려고 하였다.
△ 불교의 사고사찰(四固寺刹) 배치로 전주를 지키다
전주에는 독특한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는 사고사찰(四固寺刹)이 존재하고 있다. 먼저 남고사는 창건 당시 남고연국사라 불렸는데 여기서 ‘연국’이란 나라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의 말로 산성에 있는 사찰이름으로 전주를 지키는 남고산성에 자리하고 있다. ‘문헌비고’에 따르면 남고산성은 901년 후백제의 견훤이 쌓았으며 견훤산성·고덕산성이라고도 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 동고사는 승암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말 경순왕의 아들이 출가한 사실이 전해져 후백제 견훤과의 관련이 추정된다.
한편, 서고사는 ‘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되어 있는 사찰로 만성동 황방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또 북고사란 명칭은 존재하지 않지만 진북동 어은터널과 서신교 사이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진북사(鎭北寺)라는 사찰은 1790년대 경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호남읍지’의 전주부에 등장하고 있는데 명칭이 북쪽을 지킨다는 뜻으로 북고사와 같은 개념이다.
이 같은 전주를 지키는 4개 사찰의 개념은 전주를 불교적 수호관념을 투영해 보호하려한 불교적 신앙을 계승 발전시킨 견훤왕의 의지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 후삼국 최대 서적을 보유한 전주, 문화 수도를 보여주다
후백제왕 견훤은 수도 전주를 최대의 지식 문화수도로 만든 문화군주였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덕무가 지은 ‘청장관전서’에는 전주가 후삼국 시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책을 보유한 지역이었음을 서적이 당한 참변에 대한 기록을 통해 알려주고 있다.
사료에 나타난 서적의 참화 첫 번째 사건은 고구려의 책이 당나라 장수 이적에 의해 불탄 사건이고 두 번째 사건은 견훤이 후백제 왕도 전주에 모은 책이 당한 참화이다. 비록 서적이 사라진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역설적으로 이 사실은 전주가 우리 역사에서 서적의 도시임을 보여주고 있다. 즉, 후백제 견훤왕이 후삼국통일 수도를 꿈꾸며 전주를 화려하게 조성하고 이에 부응하는 학문과 문화도시로서의 품격에 걸맞는 서적을 모아 당대 최대의 도서관을 만들어 기록을 보존한 전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후백제 왕도 전주는 유교의 사령 즉, 기린, 거북, 용, 봉황이 먹이고 지켜주는 도시이자 불교의 사방수호 사찰인 남고사, 동고사, 서고사, 진북사(북고사)가 수호하는 공간이었다. 또한, 견훤왕은 삼국의 모든 책을 전주로 모아 우리나라 최대의 지식문화 수도로서의 위상을 만들어낸 문화 군주였다. 또한 당대 최고의 기술자들을 모아 후삼국시기 최고의 공간구성을 이루어 통일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출처 : 전북일보 2018년 5월 25일 20면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출처>
<읽기자료 2>읽기자료>
전주지역 후백제 유적지도 완성
- 시·문화유산연구원 현장정밀지표조사 성곽 등 34곳 발굴도
전주지역 후백제 역사문화를 체계적으로 복원하기 위한 유적지도가 완성됐다.
전주시는 이 유적지도를 통해 보다 체계적이고 정확한 후백제 역사문화 유적 발굴과 복원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전주시는 후백제의 궁성 및 도성으로 추정되는 노송동 등 전주 지역에 산재해 있는 후백제 유적에 대한 정밀지표조사를 토대로 문화유산 지도를 완성했다고 14일 밝혔다.
조사를 진행한 전주문화유산연구원(원장 유철)은 물왕멀과 기자촌, 동고산성, 남고산성, 무릉마을, 왜망실, 황방산, 어은산, 다가산, 완산칠봉을 비롯해 전주부사에 기록된 후백제 추정 산성터와 산성 내부 등 500만평을 답사하고 지역주민들과의 면담조사 등을 통해 후백제 유적 34곳을 새로 찾아냈다.
신규 발굴된 유적지는 남고산성 추정 행궁지 등 성곽유적 12곳과 황방산 건물지 등 건축유적 6곳, 우아동 와요지 등 생산유적 5곳, 무릉 추정 왕릉군 등 분묘유적 6곳, 옥녀봉 유물산포지 등 생활유적 5곳이다.
시는 남고산성 내의 추정 행궁지에서 후백제때 사용됐던 초석이나 기단석과 기와가 수습돼 후백제시대의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아중저수지 인근 무릉고분군의 경우 인위적으로 만든 대형 분묘형태로 조성돼 있으며, 산 정상부에서는 정연하게 배열된 숯이 발견됐다는 주민들의 제보도 나왔다.
생산유적인 왜망실의 우아동 와요지에서는 수많은 기와편과 가마벽체편 등이 발견됐으며, 네모 형태의 관아전돌편(길이25cm, 두께6cm)도 확인됐다.
시는 이번 정밀지표조사 결과를 토대로 유적의 성격 등을 밝히기 위해 연차별로 발굴 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며, 무릉마을 고분군을 비롯해 도성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대한 시굴조사도 시행할 계획이다.
전주시 문화관광체육국 관계자는 “전주가 후백제의 왕도라고 하지만 왕도로서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아 구체적인 유적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조사하는 사업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정밀지표조사를 통해 기초자료가 확보된 만큼, 앞으로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유적복원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출처 : 전북일보 2017년 8월 16일 5면 백세종 기자>출처>
<읽기 자료3>읽기>
후백제 문화유산 체계적 관리 필요하다
후백제의 유적지인 전주 ‘동고산성’이 관리 소홀로 방치돼 정비가 시급하다. 동고산성은 ‘전라북도 지정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된 전북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면서 전주지역에 산재한 후백제 유적지 가운데 견훤왕궁지로 알려진 중요한 유적이다. 후백제의 왕도로서 찬란한 문화유산을 간직한 동고산성이 우거진 잡초와 잡목들에 가려 진입로와 유적지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중략)
전주는 900년부터 936년까지 37년간 후백제의 왕도(王都)로서 후삼국시대 격동의 중심지이자 찬란한 역사문화를 펼쳤던 후백제의 역사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동고산성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쌓은 산성으로 추정되고 후백제 시대와 관련된 국내 유일한 성으로 알려져 역사적으로도 인정받은 중요한 문화재다. 전주시가 역사에서 잊혀온 후백제 역사문화를 체계적으로 복원하려고 본격적인 발굴조사에 나서겠다면서 유적 관리가 허술하다면 앞뒤가 안 맞는 일이다.
후백제 문화유적 발굴조사도 중요하지만 발굴된 기존 유적을 소중하게 관리하고 나아가 전주시민들이 소중한 문화유산을 살펴보고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본이다. 특히 동고산성은 한옥 마을을 비롯해 치명자산 성지 등이 인접해 있어 전주시민은 물론 전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관광 명소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주시는 동고산성을 10월 말까지 정비하도록 하겠다고 밝혔으나 동고산성 뿐만 아니라 전주지역에 산재한 후백제 문화유적에 대한 종합적인 관리가 필요하다고 본다.
<출처 : 전북도민일보 2017년 10월 18일 15면 조민희 기자>출처>
【생각 열기】
▶ <읽기 자료 1> 을 읽고 후삼국 통일 수도 전주를 만들기 위한 견훤왕의 흔적을 정리해봅시다. 읽기>
▶ <읽기 자료 2> 에서 어려운 용어를 찾아 쉬운 말로 바꾸어 기사를 다시 써 봅시다. 읽기>
▶ <읽기 자료3> 을 읽고 ‘동고산성’의 역사적 가치를 이해하고 후백제 문화유적을 보호· 관리하는 방안을 생각해봅시다. 읽기>
【주제 관련 더 보기】
-후백제 도성, 궁성과 내·외성 3중 구조/전북도민일보 2014.10.30. 김미진 기자
-왕건보다 무덤 초라하지만 그는 꿈꿨다, 마한의 부활을/전남일보 2018.10.5. 김형주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실장
-“전주에 후백제 세운 견훤대왕, 본격적으로 기려야”/전북일보 2018.10.15. 천경석 기자
【생각 더하기】
▶ 후백제 역사와 견훤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써 봅시다.
▶ 전주시민은 물론 전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후백제 역사를 알리기 위한 방법을 제안해봅시다.
【학생 글】
역사에서 잊혀진 후백제 왕 견훤
우리학교는 후백제와 연관이 깊다. 바로 이곳이 후백제의 도읍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학교에서 후백제와 견훤에 대해 배우고 있다. 그래서 견훤의 고향 문경 상주에도 다녀오고 논산에 있는 견훤왕릉도 다녀왔다. 또한 학예회에서는 견훤의 꿈이라는 연극을 만들어 발표회도 진행했다.
그런데 견훤의 고향인 문경에는 견훤을 기리는 사당이 있었고 논산에는 견훤의 무덤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후백제의 도읍인 전주에는 견훤을 기리는 사당 하나 없다. 왜 그럴까? 내 생각은 이렇다. 고려와의 싸움에서 패배해 멸망하여 그저 역사의 패자로 남아있기에 사람들이 관심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초등교과에도 견훤에 대한 내용은 고작 한 장 밖에 없었고 왕건과의 싸움에서 진 패자로 적혀있다. 많은 사람이 견훤에 대해 관심이 없고, 성격이 나쁜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다르다. 견훤은 한낱 농부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신라의 부패한 정치와 그로 인한 백성들의 굶주림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견훤은 신라의 군인이 되고 전라남도 순천 지방에서 세력을 일으켜 후백제를 세워 왕이 되었다.
당시 고려의 궁예나 왕건과 대적할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으며, 전라북도의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부강한 나라였다. 그렇기에 고려 왕건과의 싸움에서도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공산전투에서는 왕건을 죽기 직전까지 내몰았고 고려의 신숭겸 장군을 비롯한 여러 장수를 죽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왕건이었다.
병산전투에서 견훤은 크게 패하고 왕자들의 반란으로 금산사에 감금되나 금산사에서 빠져나와 평생을 싸웠던 왕건에게 항복한다.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자신이 부숴야했었던 비참한 견훤의 최후를 생각해볼 때 안타깝다. 이처럼 견훤은 공산 전투 이외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우리는 패자로만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부패했던 신라를 바로잡고 새롭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나라를 세웠던 견훤 또한 당시를 호령했던 큰 인물임에 틀림없다. 우리 지역유산인 견훤에 대해 관심을 갖고 다른 관점을 갖고 공부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박산 전주 동초등학교 5년
고고학을 통해 후백제의 존재를 찾아내자
올 한해 후백제 견훤에 대해 많은 것을 공부하였다. 나는 왜 우리가 후백제 관해 공부를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았다. 그 이유는 견훤이 우리 마을 노송동에 궁성을 지었고, 후백제의 역사가 전주에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올해 이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었는데 전 학교에서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 후백제의 역사에 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에는 전북대박물관에 가서 후백제의 절이었던 봉림사지의 삼존불 불상을 보았다. 삼존불 모두 머리가 없었다. 왜 불상의 머리가 없을까?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설명을 해주셨다. 당시 불교가 유행하여 후백제의 땅 전라북도에도 불교유적이 많이 있었는데, 고려가 후백제를 무너뜨리면서 후백제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중요한 유적을 없애거나 파괴했다는 것이었다.
전주 동고산성에 올라 유일하게 남아있는 후백제 궁성 유적을 살펴보았는데 여기저기에서 천년전 기와를 찾을 수가 있었다. 보물찾기를 하는 마음으로 특별한 기와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비극 중 하나가 삼국의 책을 모아놓은 전주사고가 불타버린 것이라고 한다. 후백제의 역사가 불태워져서 기록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땅속에 묻혀 있는 흔적과 유물을 통해 과거의 흔적을 많이 찾아낼 수가 있다.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많지 않은 후백제의 역사가 고고학을 통해 많이 밝혀졌으면 좋겠다. /이태현 전주 동초등학교 5년
/제작=윤지선 전주 양지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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