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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⑥ 신경준의 시 다시 알기

순창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 국어·국사·지리·문학·과학에 큰 기여
세조의 계유정란 때 10대조 신말주, 순창 내려와 충절 지켜
여암 신경준의 『시칙』,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 이론서
신경준의 평생 업적 요약하면 ‘백성을 위한 돌봄’의 학문

여암 신경준 초상화.
여암 신경준 초상화.

“누가 장자 앞에서 곤새와 붕새를 말하는가. / 떠벌리기 좋아하는 기이한 글은 말세의 것이라네. / 우리가 어찌 곤충 같은 사소한 것들을 읊는가. / 한번 읊고 한번 웃어 봄잠을 깨려고 한 것일세.” 신경준이 69세(1780) 때 아홉 종의 곤충을 소재로 하여 지은 시 ‘소충십장’의 마지막 작품 ‘총음’이다. 연작시를 쓴 뒤 총괄하여 정리한 작품이다. 미물에도 삶의 이치와 깨달음이 담겨 있음을 은근하면서도 통쾌하게 표현하였다.

전북 순창 출신의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박학지재의 실학사상가로서 국사, 국어, 국토지리와 관련된 수많은 저술활동을 한 발군의 학자였으며, 이교구류(二敎九流)의 회통사상에도 능통했다. 그는 상월선사시집 서문에서 “북이나 비파 등이 오음을 내는 것은 그 중심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30세 이전에 지은 『소사문답(素沙問答)』에 대하여 평생지기 홍양호는 “사물을 관찰한 후에 깨달은 이치를 적은 글”, 남희채는 “우주 간에 드문 문자”라 하였고, 민태훈은 “장자(莊子)와 양주(楊朱)를 다시 살려낸다 해도 반드시 자신들보다 여암이 낫다고 할 것이다.”라고 평한 바 있다.

신경준은 신숙주의 동생 귀래(歸來) 신말주의 10대손이다. 신말주는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형 신숙주와 달리 이에 협조하지 않고 충절을 지켜 설씨(薛氏) 부인의 고향 순창으로 내려와 귀래정을 짓고 거주하였다. 친조부의 영향으로 8세 때 공부하러 상경했다가 9세 때 스승을 따라 강화도에서 3년간 수학했다. 당시 강화도는 양명학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었다.

12세 때 순창에 돌아온 이후 15년 동안 고향에 거주하였고, 18세 무렵까지 주로 고체시와 당시(唐詩)를 배우고 즐겨 지었다. 20세 이후에도 거주지는 순창이었으나 집안의 상(喪) 등의 일로 많은 지역을 돌아다니게 된다. 23세 때 온양에 머물다가 시에 대한 한 소년의 질문을 받고 『시칙(詩則)』을 저술하였다.

33세 때 순창으로 돌아온 그는 10년 동안 고향에 머물다가, 늦은 나이인 43세(1754년) 때 호남좌도 증광초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 같은 해 서울에서 치러진 증광문과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서게 된다. 병자, 정묘 양란 이후 조선은 국가의 총체적 후유증을 극복해야 하는 혼란상이 계속되었다. 이런 시대적 흐름과 요청 속에서 나타난 것이 실학이다. 실학은 성리학의 병폐를 극복하고 유학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려는 실용주의 학문이다. 신경준이 평생 일군 업적을 요약한다면 ‘백성을 위한 돌봄’의 학문이었다.

그는 개방적 태도를 유지하였고, 평생 위민철학의 실천가로서 면모를 보여 주었다. 10대 초반의 어린 시절 접한 양명학은 그를 인간 중심의 인물로 키워내는 데 기여를 했으리라 여겨진다. 위민철학을 익히고 18세기의 실학적 흐름을 견지한 신경준, 그는 주변의 사소한 일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일상 속에서 사리연구하기를 좋아하였다.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고 머물면서 현장의 식물과 곤충에까지 많은 연구를 하였다. 지역 왕래가 많았기에 자연스럽게 도로, 지리 등으로 연구 대상이 확대되었고, 그의 실학적 경향은 국어, 국사뿐 아니라 수레, 의술, 병법, 천문 등 실로 다양한 분야에까지 확장되었고 많은 업적을 남긴다.

 

귀래정(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67호)
귀래정(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67호)

근대 이전까지 우리나라에는 시의 성음, 구성, 본질, 창작 기법 등을 밝힌 본격적인 문학 이론서는 거의 전해온 바 없었다. 그것은 우리말이 아닌 한자로 짓는 한시이기에 중국의 이론서에 의지할 뿐 그다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23세의 신경준이 짧은 기간에 시의 이론서 『시칙』을 저술한 것도 실학자적 태도에서 나오게 된 것이라 하겠다. 시에 대하여 묻는 학동에게 한시의 원리와 작법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려는 의도 자체가 실학적 실천의 한 양상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칙』은 중국 원나라 양재가 지은 『시법원류』와 윤춘년의 『시법원류체의성삼자주해』를 저본으로 하였으나, 여기에 자신의 의도를 추가 반영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시 이론서를 내놓은 신경준의 실천은 다소 늦었으나 우리 문학사에 새 이정표를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 『시칙』의 가장 큰 특징은 구성이 체계적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시의 강령에서부터 시작하여 시의 소재와 방법을 제시하였고, 시중필례(詩中筆例)와 시작법총(詩作法總), 풍격론, 시의 요체인 대요(大要), 시의 형체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중필례’ 14가지 기법 중 ‘공원지례(攻原之例)’ 일부를 인용한다.

“이를 테면 남이 주는 옷이나 음식을 받을 적에 먼저 추워서 떠는 모습과 굶주리는 괴로움을 충분히 말한 뒤에 그 받은 것을 말하면 굳이 감사하다는 글자를 쓰지 않아도 감사하다는 뜻이 절로 다 나타나게 된다.” 이는 ‘감사하다’는 뜻을 전달함에 ‘감사하다’는 말을 쓰지 않고 우회적으로 제시해야 문학적 감동으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시의 은유와 상징을 가르치는 내용이다.

‘시작법총’ 여섯 가지 중 여섯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얽어맨 흔적이 없어야 한다. 상하사방이 쾌활하고 알맞게 되어 조금도 하자가 없어서 마치 도끼나 칼을 대지 않고 만들어진 것처럼 된 뒤에야 시라고 할 만하다.” 다음은 시의 대요(大要)인 ‘사무사(思無邪)’의 끝부분이다. “지금 시를 하는 자는 기습(氣習)이 오만하고 위의가 방탕하여 스스로 시인은 정말 이러하다고 생각한다. 아, 시는 성정을 기르는 것인데, 어찌 도리어 성정을 방탕하게 하는가.”

다른 시 이론서를 참고로 하여 저술한 것이나, 신경준의 『시칙』은 독창성을 지닌다. 『시칙』의 가장 큰 특징으로 구성의 체계성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다섯 개의 도해가 나오는데, 시의 설명에 앞서 도해를 제시함으로써 설명을 합리적으로 전달한다. 둘째, 창작론에서 그가 강조한 것은 독자성과 서정성이었으며, 옛 사람의 시를 통해 방법을 터득하고 ‘자연스러움’의 경지에 들어서야 함을 강조한다. 셋째, 그는 과거 사람의 태도를 답습하지 않고 실질을 추구하는 실용성을 보여준다.

그의 『여암집』과 『여암유고』에는 66제 154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는 고체시(古體詩) 창작을 선호하였고, 당시(唐詩)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송시(宋詩) 풍의 시를 많이 남겼다. 고체시는 자유롭게 표현하려는 그의 개방적 태도에서 비롯한 것이라 하겠고, 취향과 다르게 송시(宋詩) 풍으로 다수 창작한 경향성 역시 감흥보다 사물의 이치를 중시하는 실학적 태도에서 연유한 것이라 하겠다.

백성들의 삶과 지방의 풍속을 소재로 한 작품을 통해 그는 현실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목민관이었고 학자였음을 보여준다. 상대주의적, 평등주의적 시각으로 채소와 곤충을 상세하게 관찰하고 형상화하는 데서 실학자 문인으로서의 면모를 그는 여실히 보여주었다. 신경준이 1765년 황해도 장연현의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영조 임금에게 ‘민은시(民隱詩)’ 10수를 지어 올렸고, 영조로부터 “잘 지었다[善作]”는 평가를 받았다. 다음은 ‘민은시’의 한 편인 ‘습상(拾橡)’의 일부이다.

“아아, 근래 몇 년간 / 비와 볕이 고르지 않아 / 기장 밭이 황폐해졌는데 / 율무 밭에서는 / 무엇을 수확하랴. / 나는 처자식과 함께 / 산골짜기에서 / 도토리를 주워 모아 / 큰 그릇에 가득 채웠다네. / … / 숲속 깊이 들어가려해도 못하는 것은 / 호랑이 표범 흔적 있어서라네. / 어찌 지금 같은 일이 계속 되랴. / 내년에는 풍년 들겠지. / 눈이 한 자 높이로 쌓였으니 / 납일 전에 눈이 세 번 내렸다네.” 고달프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삶을 도토리를 소재로 하여 사실적으로 구체화하였고, 백성들이 풍요롭게 살기를 바라는 목민관의 낙관적 기대가 ‘눈’을 통해 잘 형상화되어 있다.

다음은 ‘첨학정십경‘ 중 두 번째 작품 ‘능실빙수(凌室氷水)’이다. “쪽빛처럼 푸르던 색이 백옥같이 변하니 / 조화옹이 갑자기 바꿔놓은 것이라네. / 겨울에 저장했다 봄에 내보내니 / 성인이 절도(節度)를 생각한 것이라네.” 얼음을 저장하는 능실을 소재로 한 시다. 사물의 현상을 관찰하고 궁구한 결과물로 이용후생 외 삶의 이치까지 담아내고자 했던 그의 평생 업적은 지금도 많은 분야에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그는 지행합일의 이론가요, 실학사상 실천가였으며,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와 손을 내미는 덕이 높은 시인이 되었다.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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