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세진 문화비평가·시인
코로나 발생 이후에 ‘먹방(음식 먹는 방송)’이 더 많아진 것 같다. 음식은 문화를 이해하는 핵심 요소이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권에 존재하는 음식들과 그 문화적 연원을 살피기 위해 음식 프로그램을 보지만 모든 프로그램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먹는 양에 집중하는 ‘먹방’은 몹시 불편하다. 오로지 먹기에만 집중하는 먹방을 볼 때마다 묘하게 투우장이 떠오른다. “먹방=투우장”이라는 연상이 뜬금없겠지만, 재미를 위한 생명살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이 먹는 모든 음식은 다른 생명체에게서 왔다. 조미료와 가공식품을 천연식품이 아니라고 기피하지만, 그것들조차 생명체에서 얻어진 것이다. 인간의 미각을 유혹하고, 오래 보존하기 위해 복잡한 추출과 가공 과정을 거칠 뿐이다. 결국, 음식은 다른 생명체의 죽음을 통해서 얻어진다. 살해행위가 있고 나서야 밥상에 오르는 것이다. 음식의 역사에서 조리 과정이 ‘불성(不聖)’과 ‘불결’로 여겨져 생활공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행해진 시기가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지금도 예외는 아니다. 요리가 예술이 되고, 요리사(셰프)가 스타 연예인이 되고, 주방이 예술 생산의 공간이 되었지만, 식재료를 얻기 위한 생명체 살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78억 명이나 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단지 생명체 살해와 가공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주방에는 죽음의 흔적이 최소화된 깔끔한 상태의 재료가 도착하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먹방의 관심사는 ‘많이 먹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보다 최소한 서너 배는 먹어야 관심을 받는데, 그 얘기는 먹방을 위해서 정상치의 서너 배를 넘어서는 생명체 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십 명 분을 먹어치우는 ‘먹기 대회’는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하다.
식물의 경우에는 다른 생명체에게 몸의 일부를 주고 살아남는 방식을 택했지만, 옥수수와 아보카도 재배에서 볼 수 있듯이 현대인이 식물을 대하는 방식은 파괴적이다. 동물에게는 더 가혹하다. 동물은 생명을 대신해서 인간에게서 받을 대가가 전혀 없다.
현대 자본주의 문명의 특징은 ‘과잉’이다. 현대의 모든 상업적 시스템이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에 맞춰져 있다. 한국의 상황을 살피면, 이제 그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했다. 2020년부터 인구가 순감소 국면으로 돌아섰다. 인구 축소는 시장 축소로 이어진다. 시장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과잉’으로 채우는 것은 무모하기도 하고, 지속가능성도 없다.
코로나를 겪으며 ‘과잉’이 얼마나 치명적인 독인가를 깨달았지만, 독이라고 해서 무조건 피할 수는 없다. 파라켈수스(1493∼1541)의 “모든 것은 독이며 독이 없는 물질은 없다. 독이 아닌 것은 그 양이 결정한다.”는 말을 빌려야 할 것 같다. 다른 생명체를 먹는 것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육식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생명과 건강 유지를 위한 음식은 필요악이다. 육식이든 채식이든 넘치지 말자는 것이다.
꼭 필요한 만큼만 먹는 것은 다른 생명체에 대한 존중이고, 코로나와 같은 재난을 피하는 방법이다. ‘적게 먹고, 적게 여행하고, 적게 입는’ 3소 운동이라도 하고 싶다. 음식이 곧 생명체라는 인식을 갖지 못하고, 재난을 통해 깨닫지 못한다면 재난은 분명히 다시 찾아온다. /천세진 문화비평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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