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초(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말끝이 쌉싸름한 여자. 안방 벽에 죽창과 개펄을 그려놓은 여자.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제 여성성을 지우고 싶은 여자. 담배 연기를 배꼽 아래까지 깊게 빨아들이던 여자.
염소 떼 몰고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는 그녀를 못 만나고 뒤를 돌아본다. 산과 산 사이 오목한 곳에 비스듬히 기운 집들이 오종종 모여 있는 동네, 이 너덜겅을 벗어나면 전북 남원시 인월면 소재지가 눈앞일 거라고 연초록 잎사귀에 햇살이 반짝인다. 눈 씻고 봐도 깡촌인, 산자락이나 부쳐 먹는 게 고작일 사람들에 섞여 그녀도 하루 품을 팔았을 것이다.
어떻게 쓰는 게 시(詩)이고 무엇을 써야만 시가 되는가. 이 문제를 붙들고, 현실이냐 미학이냐를 붙들고 골머리 앓고 있을 때 우리는 그녀를 만났다. 부조리한 현실을 도외시한 언어미학은 시의 직무유기에 속하는 반편이 문학이었고, 언어미학을 고려하지 않은 시의 현실적 문제제기 또한 구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쳐갈 때쯤이었다.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전에 자신의 생활 태도가 일상에 누가 되는 것은 아닌지를 먼저 살피던 시절, 신영복 선생이 어떤 글에선가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제자이자 스승이다.”라고 적었는데 그 글귀를 되새겨보던 시절에 그녀는 글판에 샘물같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녀의 시는 농경문화에 뿌리박힌 너나들이의 삶에 관심을 쏟았다. 가난해도 삶의 온기를 잃지 않은 이웃을 아꼈고 살뜰한 언어의 결을 매만지듯 괭이질과 호미질로 양식을 구했으며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의 이치에 닿은 삶의 행위를 시에 담았다. 누구든 존중받을 가치가 있고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는 잣대를 확실히 부러뜨려야겠지만- 입만 열면 정치와 경제를 끄집어내는 말짱 허드렛것들의 치기, 불평등한 현실에 맞서 동료와 결정적인 행동을 보여야 할 때 자신만 쏙 빠지는 노예근성을 그녀의 시는 경멸했다. 대승적 차원이란 말을 입에 달고 범민주적 정의를 내세우다가도, 돈만 보면 전혀 딴 얼굴로 제 잇속에 침이 튀는 일부 지식인의 근천기를 그녀의 시는 단칼에 베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시는 자본 또는 문명의 취향과 거리를 두었다. 엄경희가 문명의 “위장된 편리함과 편안함에 자신을 내어준 자가 치러야 할 대가는 자유의 박탈이다.”(『시인동네』, 2018년 9월호)라고 언급한 대목처럼 그녀의 시는 문명의 이중성에 단호했다. 시 바깥에서 함부로 유랑하는 “너무 낡았다”, “빨리빨리”, “미래에 대한 안목이 근시안적이다.”라는 담론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늘 새롭고 매사 빠릿빠릿하고 미래에 대한 안목이 거시적이라면 이런 삶의 태도는 누구를 위한 것이냐, 문명과 자본에 길들여져 살라고 강요하는 노회한 세력에 소용되는 것 아니냐, 그녀의 시는 냉철했다.
도끼로 손전화를 박살낸 여자. 무한경쟁에 짠지가 되어버린 세상일수록 시가 필요하다고 붓끝을 벼리는 여자. 시의 갱신을 잡곡밥알처럼 꼭꼭 씹어 삼키며 한국시의 미래는 바다 밖 강대국에서 오는 게 아니라 죽창과 개펄의 상상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줄 여자. 된장 풀어 끓인 아욱국같이 어진 사람들에게 목마치는 여자. 장끼가 길게 목 빼는 이 너덜겅을 오가며 제 마음 속 죽간에 글씨 새기듯 시를 쓴 여자. 이맛머리 쓸어 올리며 시의 지도(地圖)를 그려갔을 여자. 오늘도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염소 떼와 더불어 시가 된 여자. /이병초(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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