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옥황상제의 셋째 딸 설문대할망(할망은 할머니의 제주어)이 있었다.
하루하루를 무료하게 보내던 할망은 하늘과 땅이 달라붙어 답답한 바깥세상을 몰래 내려다보고는 그 세계를 열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할망은 하늘과 땅을 두 개로 쪼개 놓고, 한 손으로는 하늘을 떠받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땅을 짓누르며 힘차게 일어서자 드디어 맞닿아있던 하늘과 땅이 갈렸다.
땅이 하늘에서 떨어져 나가자 옥황상제는 진노하고, 셋째 딸 설문대할망을 땅으로 쫓아버렸다.
이리하여 인간세상으로 내려온 설문대할망은 치마폭에다 흙을 날라 제주도를 만들었다.
제주 창조(創造)의 여신(女神) 설문대할망에 대한 설화(說話)다.
제주는 화산 활동과 이에 따른 수많은 용암분출로 이뤄진 화산섬이다.
화산 활동을 통해 형성됐기에 제주의 토질은 전체적으로 물 빠짐이 좋은 ‘송이(스코리아·scoria·많은 기공을 가진 화산쇄설물)’로 불리는 화산토 등으로 이뤄져 있다,
이 때문에 제주에 내린 빗물은 대부분을 지하로 스며들어 평상시에는 하천과 계곡은 물이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건천(乾川)이다.
이렇다보니 커다란 호수(湖水), 한강이나 낙동강 등 사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나 시냇물의 낭만적인 풍경은 영화나 TV 등의 매체에서나 감상할 수 있다.
제주의 하천에도 장마나 태풍 등 집중호우 때에는 물이 흐르는 광경을 볼 수 있지만 유유히 흐르는 잔잔한 모습이 아닌 성난 맹수의 포효처럼 커다란 굉음을 내며 주위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 광폭하다.
하지만 이런 제주에서도 잔잔히 계곡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사진 촬영의 명소 진수내
한라산 백록담 아래 흙붉은오름에서 발원해 제주를 찾은 관광객이라면 한번쯤 갔을 사려니 숲길과 삼다수 숲길을 지나 서귀포시 표선면 하천리 해안까지 이르는 제주에서 가장 긴 하천인 천미천(川尾川)의 중간지점인 진수내(川).
제주의 하천과 계곡은 각자의 명칭이 있는데, 그 하천이 지나가는 동네, 지역에 따라 또 다른 이름이 부여된다.
진수내는 천미천이 지나는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의 한 지점에서 불리는 이름이다.
진수내의 뜻은 ‘길다’의 형용사인 ‘긴’의 제주어인 ‘진’에다 수(水), 내(川)가 합해진 이름이다.
이 지역주민이 아닌 일부 제주도민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곳이다.
하지만 유명 커피점을 좋아하고, 아름다운 곳·예쁜 곳을 찾아 사진 찍고 SNS에 게재하는 젊은이들, 그리고 제주를 찾는 젊은 개별관광객 및 결혼에 앞서 웨딩촬영을 준비 중인 예비 신혼부부들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인기 만점인 ‘핫플레이스’다.
제주시에서 표선면을 잇는 번영로 중간지점에 위치한 진수내는 다른 하천이나 계곡과 달리 정장 구두와 면사포 하이힐 차림의 예비 신혼부부가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접근성이 좋다.
우선 내비게이션에 ‘대비(大妃)공원’을 검색한다.
조선시대 인목대비 어머니인 노씨 부인의 유배 생활을 기념하는 곳으로, 공원이라기보다는 한 종중(宗中)의 묘역(墓域)쯤으로 이해하면 된다,
젊은층 사이에서는 대비공원보다 전국 유명 커피 전문점인 ‘B.B’의 입구로 더 알려져 있다.
대비공원으로 진입한 후 대비공원에서 200여 m 더 진입하면 천미천이 품은 보석인 진수내가 등장한다. 주변에 주차할 곳도 충분하다.
주차 공간에 들어설 즈음부터 제주의 다른 하천이나 계곡에서는 볼 수 없는 절경이 펼쳐진다.
동백나무와 복숭아나무, 자배나무, 버드나무 등 진수내를 둘러싼 다양한 나무들 사이로 옥색 계곡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차에서 내려 계곡으로 들어서는 순간 ‘와~’하고 탄성이 절로 난다,
제주 어디를 가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으랴마는, 이곳은 제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풍광이 펼쳐진다.
한라산 백록담이나 정방폭포처럼 웅장하지도 않고, 제주 해안가 기암괴석의 풍광처럼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소박함, 담백함, 은은함, 여유로움이 한데 어우러진 곳이다.
우선 울창한 숲 사이로 잔잔한 파문(波紋)이 장관을 연출한다.
제주의 하천이나 계곡은 물 빠짐 때문에 유유히 흐르거나 물이 고인 모습을 볼 수 없다.
하지만 이 곳은 1970년대 즈음 계곡물을 인근의 목장 등에 이용하기 위해 계곡 허리에 보(洑)를 설치해 물을 가둠으로써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며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물이 있는 계곡과 계곡을 감싸고 있는 나무들 사이로 여유롭게 산책할 수 있도록 주변도 잘 정비돼 있다.
걷다보면 이리 저리 제멋대로 가지를 뻗은 나무들의 모습이 마치 환타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계곡을 가득 메운 물은 시시각각 다른 색깔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파란 하늘빛이 비칠 때는 코발트색으로, 숲이 반영(反影)될 때는 옥색으로. 그리고 물을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잔잔히 이는 물결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진다.
산책로 한 구석에는 동남아 등지에서 볼법한,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오래 된 쉼터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계곡물 위로 얼굴을 드러낸 바위들을 징검다리 삼아 계곡을 건너면 진수내의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울창한 삼나무 숲.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오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숲길이 생겼으며,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울창한 삼나무 숲길을 여유롭게 걷을 수도 있다.
진수내 주위가 이렇듯 아름다우니 누구라도, 아무 곳에서나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 작품이 탄생한다.
이렇듯 다른 곳에서는 감상할 수 없는 진수내만의 숨은 절경으로 몇 해 전부터 웨딩촬영을 나선 예비 신혼부부들의 성지가 됐다.
각 커플마다 각자 촬영감독의 지시에 따라 곳곳에서 포즈를 취하고, 어떤 핫 포인트에서는 여러 예비 신혼부부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는 모습도 쉽게 눈에 들어온다.
심지어 어떤 웨딩이벤트사에서는 작고 예쁜 조각배까지 동원, 계곡물에 조각배를 띄우고, 신혼부부를 태워 촬영하기도 한다.
연인끼리, 친구끼리 계곡 옆에 캠핑용 의자를 펼쳐 놓고 앉아 여유롭게 차 한 잔을 하면서 진수내의 풍광을 즐기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진수내 나무 그늘 아래서 친구들과 고기를 구우며 술잔을 기울이는 어르신들이 술과 안주를 권한다.
자신을 ‘진수내 지키미’라고 소개한 나이 지긋하신 한 어르신은 “수십 년 전부터 이곳을 찾아와 쓰레기를 줍고, 태풍에 부러진 나뭇가지 등을 정비하고 청소하며 관리해오고 있다”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잘 놀고, 놀던 자리만 깨끗하게 정리하고 돌아갔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진수내 구간을 지난 천미천은 조금 더 하류로 흐르면서 ‘녹산폭포’라는 장관을 또 선사한다.
앞서 말했듯 천미천은 건천(乾川)이어서 물이 없지만 장마나 태풍 등 큰 비가 내릴 때면 이 녹산폭포 구간에서는 정방폭포나 천지연폭포 못지않는 장관이 펼쳐진다.
제주일보=조문욱 기자
사진=조문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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