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는 대한민국의 종주국으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세계적 스포츠로 꼽힌다. 그러나 태권도의 태초는 전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과 발을 이용한 다양한 기술이 계속해 발전하면서 태권도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도장 중심으로 수련하는 태권도는 1940년대 말에서 50년대 초 사이에 시작됐다. 태권도의 태초는 전북에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 태권도의 역사
태권도의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다. 뚜렷한 기록과 문헌이 없다 보니 연구자들마다 해석에 따른 의견이 다양하다. 다만, 베트남의 고딘디엠 대통령이 1957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 장병들의 태권도 시범을 보고 매료돼 시범단을 초청했고, 그 뒤 64년에 우리 정부가 의무부대와 태권도 교관단을 베트남에 파견한 것이 태권도 해외진출의 공식적인 시작으로 알려지고 있다. 태권도라는 명칭 역시 마찬가지다. 통상적으로는 해방 이후인 1950년대부터 태권도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태권도는 일본의 가라데가 아닌 한국 무술인 택견과 연관성이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의견을 내고 있다. 고려의 무예 '수박'과도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전북에서의 태권도 역사는 7~8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반적으로 태권도는 서울에서 시작됐다고 하지만, 전주와 군산을 중심으로 그 영역을 넓혀 나갔다. 지도관은 1950년 초에 군산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군산과 전주 지역 간 겨루기 대회 등 경기가 활발했고, 지도자들 간의 교류도 적극적이었다. 군산에서 전주로 옮긴 지도관은 사범들이 배출됐고, 이들은 도내 시군에 자리 잡았다. 태권도에서 빠질 수 없는 호구는 전북에서 대나무로 처음으로 제작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호구는 대한태수도협회의 승인을 받아 1962년 10월 대구에서 열린 전국체전 시범경기에서 처음 도입됐다.
△ '태권도'의 본향 무주
전북은 태권도의 본향이다. 삼한시대 태권도 발원지이자 무주군 무풍면과 설천면의 덕유산 계곡을 일컫는 구천동은 예전부터 깊은 산골의 대명사로 첩첩산중인 곳이다. 덕유산 국립공원이 자리 잡은 무주 구천동은 ‘구천동’이란 이름과 걸맞게 ‘9000굽이 계곡을 헤아린다’는 말이 있다. 덕유산 상봉에서 신라와 백제의 경계관문이었던 라제통문까지 25㎞에 이르는 계곡은 웅장한 역사를 잘 나타낸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명종 당시 광주목사를 지낸 임갈천이 쓴 <덕유산 향적봉기>에 호국무사 9000명이 수도를 하며 은둔한 곳이라고 해 ‘구천둔(九千屯)’이란 유래가 있다. 태권도원은 무주군 설천면 무설로 백운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설천면은 9000명의 호국무사가 아침에 밥을 짓기 위해 쌀을 씻은 물이 눈(雪) 같이 하얀 내(川)를 이뤘고 백운산(白雲山)은 하얀 복장을 한 선인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그들의 아침밥을 짓기 위해 쌀을 씻은 쌀뜨물로 인해 개울물이 온통 부옇게 흐려질 정도였다고 하니 실로 대단한 광경임을 짐작케 한다. 당시 이웃 마을인 금산에 살던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이 수도를 하기 위해 3년을 약속하고 구천둔에 입산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그런데 약속한 3년이 지나도록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여인은 그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섰고 2년 동안 찾아 헤맸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되돌아갈 정도로 산과 계곡이 험준한 곳이다. 이후 ‘구천둔’이란 지명이 ‘구천동’으로 바뀌게 되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설이 전해진다.
△ 전북과 태권도
전북의 태권도 역사는 우리나라의 태권도 역사이다. 오늘날과 같은 스포츠화 된 태권도가 전북에서 가장 먼저 시작됐기 때문이다. 전북에서 개발된 태권도 기술이 곧 우리나라의 기술이 됐고, 전북에서 적용된 경기규칙이 우리나라 경기규칙의 한 부분이 됐다. 전북의 태권도가 스포츠화를 선도하게 된 것은 전일섭 관장이 이끄는 지도관이 전주에 자리를 잡은 뒤 다양한 종류의 대회가 자주 열렸기 때문이다. 한·일 교류전 등은 물론 지역내 대회도 적지 않았다. 전북의 태권도 겨루기는 다른 지역과는 차이가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다른 지역의 태권도에서는 실전 타격이 금지돼 있었다. 때리는 시늉만하고 주먹이나 발이 상대의 몸에 닿기 직전에 멈추는 것이 일반적인 겨루기 방식이었다. 그러나 우리지역에서는 실제 타격으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겨루기가 일반적이었으며, 누적된 타격보다는 단 한방으로 상대를 이길수록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생체연구를 바탕으로 한 일발필살기가 개발되기 시작됐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강도 높은 단련이 뒤따랐다. 유단자와 수련생이 마주보고 횡렬로 서서 상대방을 계속해서 바꿔가면서 하는 겨루기도 하나의 훈련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전북의 태권도는 우리나라 초창기 스포츠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 태권도와 전북인
전북 태권도는 전일섭 관장으로부터 시작됐다. 전 관장은 1947년 군산에서 연무관의 첫 지관인 '군산체육관'을 개관했다. 전북출신 태권도인들이 미국 등 세계로 진출한 것은 대부분 60년대 중반 이후부터다. 전계배 사범은 미국 정부의 초청으로 1968년 미국에 건너가 태권도를 지도하기 시작했고, 박연희 사범은 일본을 거쳐 73년에 미국에 정착했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돈이 없어 가난한데다 언어소통마저 제대로 안되니 관원모집이 쉽지 않았다. 게다기 일찍부터 미국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던 가라데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 조그마한 덩치의 동양인들을 우습게보고 시비를 걸거나 도전해오는 동네 왈짜들도 적지 않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 시범종목 때는 김제출신의 이상철 사범이 단장, 박연환 사범 부감독겸 코치를 맡아 미국 여자팀이 세계 1위, 남자팀이 2위를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고창출신의 박동근 사범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미국 태권도 대표팀 코치를 맡았으며, 군산출신의 전영인 사범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미국 대표팀 헤드코치를 맡아 미국팀이 금메달을 따내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박동근 사범은 또 93년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대회 미국 대표팀 헤드코치, 94년 미국과 러시아대항 대회 미 대표팀 수석코치, 99년 독일 스투가르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헤드 코치 등을 맡아 지도자로서 이름을 날렸으며, 미국 태권도 고단자회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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