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벼 대신 말라비틀어진 벼만 남아
벼멸구 활동하기 좋은 환경⋯농가 비상
"지원도 좋지만 벼멸구 잡을 대책 필요해"
"벼농가는 가을만 보고 살아요. 올해 농사도 잘돼서 한 달만 기다리면 대박 날 줄 알았죠. 나름대로 희망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퍼질 줄 몰랐어요."
다 된 밥에 '벼멸구'가 뿌려졌다. 벼멸구 한 마리에서 시작된 일은 논 전체로 펴졌다. 수확을 한 달 남짓 앞둔 전북 들녘에 황금빛의 벼 대신 말라비틀어진 벼만 남은 이유다.
올해 폭염이 이례적으로 9월까지 이어지면서 벼멸구가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졌다. 벼멸구는 볏대의 즙액을 빨아 먹어 벼를 고사시킨다. 피해를 보면 벼는 잘 자라지 않거나 심하면 말라 죽는다.
25일 찾은 순창군 구림면 들녘도 황금빛이 아닌 갈색빛을 띠었다. 가을이면 장관을 이루는 황금 들녘은커녕 정상곡만 있는 들녘 하나 찾기 어려웠다. 군데군데 멀쩡해 보이는 정상곡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벼멸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농사지은 지 20여 년 된 박남주(53)·김수미(49) 부부의 논 4만 평도 벼멸구 떼가 습격해 초토화가 됐다.
박남주·김수미 부부는 "8월 말부터 벼멸구가 보였다. 그때는 거의 티가 안 났다. 초록빛의 논에 살짝 노란색이 비치는 정도였다. 영양분이 없어서 그런 줄 알았다. 벼멸구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기온이 내려가지 않아 3세대까지 번식이 이어졌다. 정말 말할 수 없이 번졌다"고 설명했다.
벼멸구가 넓게 퍼지기 전부터 포기(벼) 하나라도 잡아 보자는 심정으로 약제를 살포했다. 볏대 아래에 서식하는 벼멸구를 위로 올리려 드론으로 한 차례, 가스 영향으로 위로 올라온 벼멸구를 잡으려 한 번 더 약을 줬지만 역부족이었다. 번식 속도가 너무 빨라 약제로 효과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 부부는 "지나가던 다른 벼농가 사장님이 약제 살포하는데 약 해도 안 되는데 왜 하냐고 했다. 벼농가 입장에서는 포기할 수가 없다. 일단 뭐라도 해 봐야지 않겠나. 그래서 약제비가 들어도 했다. 예방을 했어야 하는데 늦었다"고 이야기했다. 농약 안전 사용 기준에 따라 수확 2주 전에는 방제를 마쳐야 해 계속해서 약제를 살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벼멸구 피해에 벼가 쓰러진 구역은 기계가 들어가서 작업을 하기 어려워 일일이 수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정상적인 논 1필지 작업 시 50분이 소요된다면 피해 논은 낫으로 베야 해 한나절이 걸린다는 게 부부의 설명이다.
이들 부부는 벼농사에 더해 소 140두를 사육 중이라 타격이 더 컸다. 매년 수확 후 볏짚을 소 먹이로 줬는데 벼멸구 피해를 본 볏짚은 소 먹이로도 줄 수 없어서다. 이미 소 먹이로 줄 볏짚을 주문했다.
부부는 "안 들어가도 되는 지출이 생겼다. 구림면에서는 벼농사지으면서 소 키우는 사람이 많은데 다들 비상이다. 벼멸구 피해 커지기 전에 수확하면 참 좋은데 그렇게 하기에는 벼가 안 익었으니 방도가 없다. 그렇다고 익을 때까지 기다리면 다 주저앉을 텐데 어떻게 하겠나"고 했다.
부부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올해뿐 아니라 앞으로 기온이 더 올라갈 내년, 내후년 걱정이 앞서서다.
"앞으로 더우면 더 더웠지, 춥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더우면 벼멸구가 활발해져요. 내년에는 벼멸구 안 오라는 법 있나요. 또 다른 해충도 올 수 있는데 그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는다는 법은 없잖아요."
이들은 약제·방제비 지원도 좋지만 매년 습격할지도 모를 벼멸구를 잡을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부부는 "지금 와서 방제를 하는 것은 사실 너무 늦었다. 앞으로 기후 재난이 계속될 텐데 대책을 세워야 한다. 만약에 대책 없이 계속해서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농사지으면 어떻게 살겠나"고 토로했다.
한편 22일 기준 전북에서는 도내 중산간부를 중심으로 2707ha의 벼멸구 피해가 조사됐다. 14개 시·군 중 전주시와 완주·무주군을 제외한 11개 시·군에서 발생했다. 도는 피해 최소화를 위해 예비비 5억 원을 긴급 편성하고 피해 논과 주변 지역에 방제를 위한 약제 구입비와 살포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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