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이맘때쯤, 전철 옆 좌석에서 임신한 새댁이 긴 통화를 하고 있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겨울 김장을 마친 친정엄마에게 김치를 얻으러 주말에 가겠다는 딸은 가는 길에 무엇을 사갈까 살갑게 묻는다. “보쌈 해 줄 테니 그냥 와서 먹기만 해라”라는 수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마치 전화기에도 수육 냄새가 풍기는 듯했다. 친정엄마가 돌아가신 지 35년. 집에 돌아가는 길에 무엇을 사갈지 엄마에게 물어본 지도 그렇게 오래되었다.
날이 추워지고, 김장의 계절이 왔다. 오늘 아침 유치원의 아이들은 김장 활동으로 신이 났다. 양념과 김치 속을 버무리면서 마치 빨간 클레이나 찰흙 놀이를 하는 듯 무아지경이다. 평소 빨간 음식은 맵다며 입에도 대지 않던 민지 조차 오늘은 “아, 매워! 아, 매워!”를 외치면서도 자신이 버무린 김치를 기어이 먹는다. 아이들에게 김장하는 날은 그야말로 행복한 김치day다.
아이들에게 김치 활동은 배추에 소금을 뿌리고, 씻고, 양념을 바르는 모든 과정이 놀이이며 새로운 경험이다. 몇몇 아이는 “이거 엄마랑 집에서 다시 하고 싶어요!”라며 반짝이는 눈으로 말한다. 담임 선생님은 양념을 버무리던 아이들의 손길을 보며 “이렇게 집중하는 건 오랜만이네요!”라며 웃는다. 비닐 장갑에 빨갛게 양념 묻은 고사리 손을 바라보며 아이들은 서로를 놀렸고, 자신이 만든 김치로 저녁에 가족과 함께 먹을 생각에 설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김치는, 특히 이 계절의 김장김치는 항상 친정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서러운 음식이다. 신혼 초, 김치를 혼자 담가보겠다고 애쓰다 번번이 실패를 했었다. 왜 그리도 배추를 절이는 게 어려운지, 깜빡하는 순간 배추는 흐느적 늘어지기 일쑤였다. 산더미처럼 쌓인 잘못 절인 배추를 버릴 때의 난감함은 김치를 한가득 안겨줄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큰동서에게 함께 담가보자고 제안했지만, 동서는 “겨울 양식은 친정엄마가 다 해 주신다” 라며 웃으며 거절했다. 친정엄마의 손맛을 자랑하는 동서가 부럽기도 했지만, 한두 포기라도 더 얻고 싶어 애교 섞인 농담도 해보곤 했다. 감칠맛 나는 동서네 김치는 항상 적은 만큼 더 소중했고, 그 맛은 내 친정엄마의 부재와 겹쳐 유난히 아쉽게 느껴지곤 했다.
그 후 김치는 내게 평생 가슴 시린 음식이 되었다. 아무리 시어 터진 김치라도 버리지 못하고 그릇 귀퉁이에 붙은 양념까지 탈탈 털어 먹었다. 김치 거죽에 핀 흰 곰팡이도 발라내고 물에 우려내어 볶아 먹었다. 신혼 초에는 김치 한 통 받는 조건으로 옆집 할머니 손녀의 과외선생이 되기도 했다. 맛있는 김치 한 통을 얻기 위해 태양초 고추 열 근을 선물한 적도 있었다. 나는 김치 한 통에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해졌고, 김치를 건네주는 사람에 대해 언제나 한 없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물질이 흔해지고 맛난 음식이 넘쳐나도 김치는 나에게 그런 대상이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절인 배추 팝니다’라는 문구가 당연시 되는 세상이 되었고. 슈퍼마켓과 온라인에서 브랜드별로 각종 김치를 판매하는 시대가 되었다. 가족의 구조가 변화하며 김치를 직접 담그는 모습도 많이 사라졌고, 누구나 빠르고 손쉽게 김치를 살 수 있게 됐다. 나 역시 서울로, 외국으로 가족이 흩어져 있던 세월이 많아 지금은 예전보다 김치를 먹는 일도, 양도 줄어 몇 년 치 김치를 묵은 채로 김치냉장고에 고이고이 모셔놓고 있다.
김치를 함께 담그던 풍경이 사라진 것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식탁의 시간도 줄어든 것 같아 아쉽다. 가족이 모여도 각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기 바쁜 요즘, 엄마들은 더 외로운 세상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배추는 다섯 번 죽어야 비로소 김치가 된다’는 말이 있다. 땅에서 뽑혀 뿌리를 잘릴 때 한 번, 칼로 나뉠 때 두 번, 소금에 절여질 때 세 번, 양념으로 버무려질 때 네 번, 사람에게 먹힐 때 다섯 번 죽는다는 이야기다. 우리네 어머니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숱한 산고 끝에 자식을 낳고, 가슴 아픈 일들을 견디며 아이를 키우고, 자신의 음식을 아껴 자식의 입에 넣으며 살아온 어머니들. 그들의 인생은 김치처럼 숱한 수고로움을 겪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초겨울, 김장하기 좋은 날이 왔다. 오늘 유치원 아이들은 신나게 만든 김치를 집으로 가져갔다. 어쩌면 오늘 저녁, 아이들의 집에서도 김치 이야기가 꽃필지 모른다. 그와 함께, 나도 친정엄마가 보내주신 김치 한 조각을 맛보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봐야겠다는 상상을 한다.
오늘따라 “맛있는 거 해 줄 테니 몸만 오그래이” 하는 친정엄마의 정겨운 목소리가 듣고 싶은 그런 날이다.
△안장자 수필가는 영남대학교 교육학박사와 영남이공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대한문학 동시부분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군산하랑유치원 원장으로 재직중이며 군산시 아동정책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