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어둑, 망설이던 길입니다. 입동 지나자 기다렸다는 듯 무서리가 내렸네요. 늦잠 자는 손녀가 보았더라면 눈이다, 눈! 호들갑을 떨었겠습니다. 풀숲 강아지풀은 이미 누릿하고, 하얗게 센 억새도 반 너머 타버렸네요. 한둘 희미한 기생초, 개망초꽃에 눈길을 주다가 봅니다. 화사했던 길가 꽃밭이 텅 비었네요. 마리골드와 봉숭아 대가 가지런히 뽑혀있습니다. 푯말 아니었으면 꽃밭인 줄 모르고 지나칠 뻔했습니다.
‘대한노인회 삼천3동 꽃밭 가꾸기 팀’ 어르신들, 풀숲의 돌멩이를 골라내고 잡초를 뽑고 꽃밭을 일구며 꽃 시절을 회상했겠지요. 내 집에만 말고 천변에도 마리골드를 피워, 세상 아직 향기롭고 환하다고 길 가는 이들에게 이르고 싶었겠지요.
마리골드 울 삼아 봉숭아를 심으며 먼먼 고향 집을 불러냈을 테지요. 언니였을까요, 누님이었을까요, 돌절구에 꽃잎을 찧어 손톱 끝에 매어주던 그리운 시절이 환했을 테지요. 봉숭아 꽃대인 듯 마음 붉어져서 괜스레 주위를 살폈겠지요.
세상은 왔다가 갑니다. 꽃도 시절도 사람도 피었다 지지요. 환하게 피었던, 폴폴 향기롭던 자리 텅 비었으면 이젠 꽃밭 아닐까요? 돌아가는 것들의 뒤는 깔끔해야 한다는 듯 빈 꽃밭에 무서리 짙습니다. 꽃대를 뽑으며 내년엔 무슨 꽃을 피울까, 궁리에 한나절이 짧았을 겁니다. 손톱 끝 꽃달 살피며 먼 시절을 불러냈을 겁니다. 그런데 9월 어느 날 콕콕 봉숭아 꽃씨를 주워 먹던 비둘기는 어디에다 똥을 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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