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수필] 도심 산책
낮은 산자락의 오솔길도 아니고 동심을 부르는 언덕도 없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도 없고, 언니와 같이 빨래하러가며 부르며 건너던 징검다리도 없다. 종달새 우짖던 보리밭과 메뚜기 뛰놀던 언덕은 오래전 번듯한 도로가 되었다. 하지만 도심 길에도 아름다운 자연은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시선을 붙잡았다. 어제 오후부터 안개비를 동반한 바람이 불더니, 밤새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른 채 맑고 청명한 아침이 밝았다. 오후 한 시에 꽃밭정이노인복지관 부관인 상산복지관으로 어르신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 오전에 한 시간 반 정도 거리를 걸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출근할 남편의 밥상을 차려놓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오늘은 어젯밤 스쳐간 바람과 비의 합작품이 지면에 가득해서 자꾸 시선이 바닥으로 갔다. 막 속잎의 티를 벗고 햇살 좋은 이른 여름을 즐기려던 잎들을 수다스러운 바람이 억지로 따다가 온 지면에 녹색 추상화를 그려 놓았기 때문이다. 깨끗하게 씻긴 회색 블록에 수많은 그림은 갖가지 모양으로 뇌에 상상력을 깨웠다. 조금 구부러진 담장 밑에는 녹색 잎들을 모아 방석인 듯 깔아놓고, 두 다리 쭉 펴고 앉아 무릎 토닥이며 쉬어가라고 유혹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팝나무 밑엔 은하수별처럼 예쁜 꽃잎들이 시집갈 아가씨가 밤새워 수를 놓은 듯 내 걷는 몸짓 따라 살랑거렸다. 조금 더 가다 보니 침엽수 잎이 많이 내렸다. 가지 떠난 침엽수는 노란색에 가까웠다. 여기저기 고르지 못한 틈에도 끼고 갈라진 곳에도 쌓여 낮은 산자락도 되고, 금잔디가 바람에 날리는 언덕도 되었다. 빗물이 흐르는 대로 따르다 멈춘 곳에 속잎들은 잔잔한 파도가 넘실대듯 밀려와 있었다. 그러고도 아직 여백을 채우려는지 바람은 나뭇가지를 자꾸 흔들었다. 신호등을 건너니 벽돌담은 다 지나고, 여러 가지 색으로 옷을 입은 예쁜 모양들로 구부려진 철제 아파트 울타리가 시작되었다. 내일 아침엔 좀 일찍 나와 천변으로 내려가 걸어야겠다. 양 옆으로 이름 모를 잡초들과 갈대가 어우러져 녹색 비단처럼 펄럭이고, 가끔 쑥부쟁이 노란 꽃이 나를 반길 것이다. 바닥엔 클로버 하얀 꽃이 내 발등을 더듬어보려 애쓰며 꽃반지에게 추억을 잊었느냐고 물어도, 번듯한 길 따라 내 발길은 멀어지고 말 것이다. 이토록 계절 따라 변화를 거듭하며 즐거움을 주는 도심 길에 또 한 가지 보너스가 있다. 천변뿐 아니라 도로변 곳곳에 운동기구가 설치되어있어서 간단한 준비운동을 할 수 있다. 나는 두 팔로 중심을 잡고, 허리 돌리기, 파도타기, 공중 걷기를 각각 300번씩 한다. 하고 나면 적절한 온도와 습도로 온몸의 세포가 잠을 깨는 듯 상쾌하다. 이런 즐거움 때문에 나의 도심산책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산책(散策)'의 사전적 의미는 '느긋한 기분으로 한가로이 거닐다'는 뜻이다. 도심의 산책은 그런 의미에서 참 좋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면 근심 걱정도 바람과 함께 날아가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요즈음은 산책을 즐기시는 분들이 꽤 있다. 산책은 여러가지로 바쁜 현대인들에겐 더없이 소중하며 몸과 마음 건강에 모두 좋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앞으로도 천천히 산책을 즐기며 도시의 일상도 둘러보며 마음의 여유도 찾고 싶다. 박유선 수필가는 양지노인복지관 노인·성 상담사, 중·고등학교 성폭력교육 강사, 문화회관·사회복지회관·노인대학의 민요·가요 강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필집 ‘가시꽃’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