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함께 걷는 길 – 박서진
낯선 길이다. 4차선 넓은 도로 양쪽으로 자동차가 나란 나란히 주차되어 있었다. 두 구역쯤 걸으니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마당에 잔디가 깔려 있는, 담이 없는 집들이 넓은 도로 양옆으로 늘어서 있었다. 그렇게 많은 데도 똑같은 집은 없다. 차들이 드문드문 다니는 도로에는 아름드리 가로수들이 고풍스러운 자태로 서 있었다. 중간중간 상수리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들을 집어가는 청솔모들의 바지런한 발길이 자주 눈에 띄었다.
언니랑 여동생이랑 셋이 14시간 반 비행기를 타고 간 미국이었다. 막내 여동생이 사는 뉴욕은 한국과 11시간 시차가 나 낮과 밤이 거꾸로였다. 우리는 새벽에 일어나 밥을 먹고 청소를 했다. 냉장고에서 먹다 남은 음식을 정리하고 전자레인지를 닦고 화장실 청소도 하고 옷 정리도 하고 밖에 나와 있는 이불을 빨아서 들여 놓았다. 그리고 나온 산책길이었다.
셋은 그냥 말없이 걸었다. 그런데 언니가 이야기를 꺼냈다. 명선이랑 걸었던 길이야.
그때가 마지막이었네. 동생이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쩐지 내가 걷고 있던 낯선 그 길이 정겹게 다가왔다. 이 길이 내 막내 여동생이 걸었던 길이라니! 내 동생 명선이가 걸었다는 그 이유만으로 모든 정경이 따뜻하게 보였다. 나는 신발을 벗어 들었다. 그리고 맨발로 명선이가 걸었다는 그 길에 뿌리를 내리듯 천천히 걸었다. 명선이는 올 2월에 한국에 나왔다. 뉴욕으로 건너간 지 11년 만이었다. 전주에 사는 언니랑 나는 동생을 보기 위해 엄마가 살고 계시는 서울로 부랴부랴 달려갔다. 명선이는 대문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우리는 명선이를 부를 때 천사라고 불렀다. 배려심 많고 따뜻하고 언제나 솔선수범하며 잘 웃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색을 할 수 없었지만,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얼굴빛이 거의 회색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디 아프니? 내가 물었다. 계속 하혈을 해.
언제부터?
좀 됐어.
병원엔 가봤어?
예약해놓고 왔어. 그동안 나오고 싶어도 불법 체류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못 나왔었다. 두 해 전 영주권자가 되었지만 하는 일이 바쁘다며 나오지 않았다. 네일 가게에서 일해 혼자 두 아이를 교육했던 동생이었다. 나는 스스로 위안을 했다. 설령 어디가 어떻게 아프더라도 착한 내 동생은 치료만 하면 될 거라고.
마침 외국에 나가 있던 남동생도 들어 와 엄마 소원대로 6남매가 다 모여 사진도 찍고 맛있는 음식도 먹었다. 그곳에서 이틀 후 서울에 사는 여동생까지 전주로 데리고 왔다. 착한 동생은 힘없이 웃고 힘없이 말했지만, 아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괜찮아 언니, 아무렇지도 않아. 병원에 가보자고 했지만, 미국에서 간다고 말을 듣지 않았다. 함께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우리 네 자매를 데리고 부안으로 갔다. 부안 해변이 보이는 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고 하섬으로 들어가는 해변 모래사장에서 사진도 찍고 숨차지 않게 달리기도 했다. 그리고 부안 마실길을 천천히 걸으며 사진을 찍고 채석강 주변에서 회도 먹었다.
명선이는 미국에 돌아가서 병원을 갔다. 그리고 자궁내막암이 번져 말기 암이 되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항암 치료 부작용으로 두 번만 받고 방사선 치료를 거듭했다. 하지만 암은 뼈에서 복부로, 폐에서 뇌까지 점령하고 말았다. 언니랑 서울에 사는 동생은 명선이를 보기 위해 5월에 뉴욕으로 건너가서 보름 동안 있다 왔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가보지도 못했다.
명선이는 8월 4일 조카 둘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다. 너무 멀어 장례식에 참여도 못 했다. 이별 준비를 많이 해서인지 그렇게 슬프지는 않았다. 이제 독한 진통제를 먹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될 것이기에.
무엇보다 우리는 하루에 한 번씩 통화했었다. 언니, 변산에 갔을 때 말이야. 우리가 걸었던 그 길이 생각나. 모래사장도 그립고. 동생이 말했다. 내 눈에도 그 길이 선하게 떠올랐다. 신기하게도 영상처럼 함께 걸었던 길이 떠올랐고, 어디서쯤 쉬었는지, 어디서쯤 사진을 찍었는지도 다 기억났다. 언니가 한신코아에 살 때 말이야, 비 오는 날 골목길 기억나지? 기억나고 말고다! 동생이 미국에 가기 전에 전주로 내려왔을 때였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한여름 밤, 우리 네 자매는 우산을 집어 던지고 온 비를 다 맞으며 사람이 안 다니는 골목길을 쏘다녔다. 하늘을 보고 양팔을 쳐들고 사람들에게 누가 될까 봐, 큭큭, 거리며 웃었다. 내가 작가라는 것이 처음으로 뿌듯했다. 길치, 기계치, 몸치인 나는 그 장소, 그 일들은 소소한 것까지 잘 기억한다. 그래서 어려서 우리가 자라왔던 이야기, 막걸리를 받으러 갔던 언덕길 이야기, 뒷산에 가서 삘기를 뽑아 먹던 것까지 하루에 한 시간씩 이야기해줄 수 있었다. 그 부작용이었다. 어차피 2월부터 마음이 잡히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거기다 자꾸만 동생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그건 언니도 서울에 있는 동생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우리는 날짜를 잡았다. 그리고 9월이 되어서야 미국에 온 것이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인생도 길이라고. 명선이가 살았던 길은 길지도 않았지만 그리 평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게 말했다. 언니, 나는 사는 동안 힘들지 않았어. 언니들이 내 가족이 되어줘서 정말 행복했어. 딸이 작년에 미국에서 선생님이 되었고, 아들도 공부하고 있어서 이제야 허리를 펼 시기이니 억울할 법도 할 텐데,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엄마, 하느님이 이모가 너무 애를 썼으니 편히 살라고 데려가신 건가 봐요. 슬퍼하는 내게 아들이 위로해준 말이다. 명선이는 떠났다. 하지만 함께했던 많은 추억이 남아 있다. 나는 새삼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는 치명자산길, 건지산길, 한옥마을길들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해서 좋았던 것이라고. 남편과 문우들, 지인들과 가족이 함께 했기에 아름다웠던 것이라고. 부안 마실길이나 한신코아 골목길을 걸으며 나는 또 명선이를 떠올릴 수 있을 거다.
오늘도 내일도 나는 길을 걸을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한걸음이 더 소중할 것 같다. 함께 걷는 이들이 있기에. /박서진(동화작가)
* 2002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2009년 <대전일보>, <경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2014년 <고민 있으면 다 말해>로 푸른문학상 수상. 동화책으로 <세쌍둥이 또엄마>, <남다른은 남달라>, <변신>, <숙제 해간 날>, <건수 동생, 강건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