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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들이네요. 전주천 싸전 다리와 매곡교(梅谷橋) 사이입니다. 먼동이 트기 전에 전 펼치려면 한밤중에 나섰겠습니다. 뿔이 몇 개인지, 방망이는 어디 숨겼는지 도통 모르겠네요. 새벽 다섯 시, 어둑어둑 왁자합니다. “엄마 이것도 좀 가져가 잉”, “아따 천 원만 빼랑게” 오가는 말이 다 토막입니다. 콩나물 다듬듯 머리 떼고 꼬리 뗀 말이 귀에 설지 않네요. 맛보라 건네준 시금털털 개살구도 달기만 합니다. 도라지 몇 뿌리 더 얹어주는 손길에 더덕 향기가 따라오고요. 덤이 있고 에누리가 있고 정이 있습니다. 그래요, 삶이 힘들거든 가보라는 새벽 시장에 도깨비들이 붐빕니다. 카드 결제기처럼 입 꾹 다물고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성심으로 살다 보면 금세 좋은 날 오지 않겠느냐, 말없이 말 건넵니다. 일곱 시, 아 그런데 머리에 뿔이 없네요. 고단할 낯들이 대낮처럼 훤합니다. “아따, 새벽부터 언 놈 만날라고 쥐 잡아먹고 왔데여”, 짓궂은 타박만 영락없는 도깨비입니다. 저쪽 한구석에 미처 입이 안 풀린 듯, 초짜가 분명한 빵 도깨비가 보입니다. “만 원어치 주세요”, 봉지 가득 빵빵 담아주는 빵, 단팥빵 한입 베어 뭅니다. 피라미도 뛰고 백로도 모여드는 전주천 새벽 도깨비시장,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도깨비방망이는 없었습니다.
“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당신의 자리가 돼드리리다 피곤한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당신을 편히 쉬게 하리다”. 장재남이 부른 ‘빈 의자’입니다. 콘크리트 길 건너 촉촉한 풀숲으로 가는 지렁이를 누가 밟고 갔네요. 철사토막처럼 꼬부라져 물기 말라가는 반토막이 물음표를 씁니다. 내 갈 곳 어디란 말인가? 나는 왜 항상 밟히는가? 묻고 묻습니다. 빈 의자에 앉습니다. 간밤엔 어둠이 앉았다 갔겠지요? 구구대는 앞산 멧비둘기 소리가 가만 옆에 앉네요. 참새는 콕콕 일찍 여문 강아지풀 씨를 빼 먹고, 개개비는 몽글게 갈대숲에 듭니다. 세내[三川] 물소리가 어제보다 맑습니다. 풀숲에 노란 금계국, 보라 갈퀴나물꽃, 연분홍 메꽃, 빨강 꽃양귀비가 아직은 환합니다. 이른 아침, 많은 이들이 숨을 고르네요. 오늘도 고단한 길 위에 서 있을 다리를 푸는 거겠지요. 통, 통 누군가 징검다리를 건너옵니다. “두 사람이 와도 괜찮소, 세 사람이 와도 괜찮소, 외로움에 지친 모든 사람 무더기로 와도 괜찮소” 흥얼거립니다. “허리가 아프면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이정록의 시구입니다.
채 어둑발 가시지 않은 새벽, 어머니는 동네 우물에서 첫물을 길어 오셨지요. 찬물에 얼굴도 마음도 씻고 맨 먼저 부뚜막 조왕신(竈王神)께 조왕물을 올렸지요. 아련한 흑백 사진 속 일입니다. 아홉 식구 무탈을 빌었습니다. 올망졸망 새끼들 배나 안 곯리면 여한 없겠다, 외우고 또 외웠습니다. 그냥저냥 작년만큼이면 감지덕지라고 싹싹 손을 비볐습니다. 비몽사몽 눈 비비며 오줌싸러 일어나면, “왜 벌써 일어났느냐, 한숨 더 자거라” 하셨지요. 자랑은 아버지 차지요, 근심 걱정은 죄다 어머니 몫이었지요. “수재(秀才) 났다!” 면내(面內)에 소문 자자한 큰아들은 아버지 아들이요 홍역에, 천식으로 골골대는 둘째는 어머니 혼자 낳은 자식이었지요. 숟가락 통에 숟가락이 참 많기도 했습니다. 어느 해 초파일, 명암사에 쌀말이나 시주한 주제넘은 어머니는 할머니 앞에 두어 달 고개를 못 들었지요. 절집 마당에 무지개가 걸렸네요. 저 수백 살 먹은 느티나무처럼 내 새끼들 명 길고 무성하게 해주십사, 간절한 비나리입니다. 열에 다섯은 어머니들의 것입니다.
복사꽃 서둘러 돌아가고 소복소복 수국이 피어납니다. 이팝꽃도 복지개를 못 덮게 수북하고요. 이 꽃 저 꽃 생각할 틈 없이, 변덕스러운 날씨 탓 몇 번에 계절은 또 이름표를 바꿔 달려나 봅니다. 차라리 여름 쪽입니다. 봄은 늘 후회처럼 그림자나 남기고 오는 듯 가버리네요. 어제는 벌써 반소매로 거리가 파릇했습니다. 무작정 나섰습니다. 가는 봄 한나절쯤 붙들고 싶어서지요. 풀밭에 퍼질러 앉고 싶어서였지요. 도심을 벗어나니 아직은 봄 맞네요. 부지런한 농부가 갈아 놓은 텃밭 이랑이 참 가지런합니다. 고추모를 내고, 옥수수를 심고, 고구마 순도 놓겠지요. 뙤약볕 아래 또 겨울을 준비할 테지요. 올해도 말가웃지기가 작기만 할 겁니다. 텃밭 귀에 풋마늘이 알싸합니다. 그래요, 로터리 치며 풋마늘 된장 찍어 두어 사발 막걸리가 입에 달았겠습니다. 봄 꿈인지 옛 생각인지, 바쁠 일 하나 없는 해찰에 등판이 다 노글거리네요. 한나절 봄 끄트머리를 붙들었습니다. 입하(立夏), 금세 떡갈잎 퍼지고 뻐꾹새 자주 울겠지요. 보리 이삭은 패고 꾀꼬리도 소리할 테지요.
간판도 없고 상호도 없었지요. 지도에도 안 나오고 이정표도 없었지만, 청춘들은 약속처럼 모여들었지요. 팔달로 변 전주전신전화국 앞 ‘전다방’, 사시사철 붐볐지요. 주인뿐 아니라 마담도 레지도 없고 테이블도 의자도 없었지요. 오거리 신신 악기점에서 샀을까요? 길 건너 홍지 서점에서 샀을까요? 누구는 나나무스꾸리의 엘피판을 들고 있었고, 또 누구는 소월의 시집을 끼고 있었지요. 오래 기다린다고 눈치 안 주고, 커피 안 시켜 미안하지도 않았지요. 별다방 아니 스타땡땡 카페에 젊은네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날마다 만원입니다. 아마도 길을 놓치지 않으려 이정표를 보는 것일 겁니다. 서너 시간은 기본, 노트북 컴퓨터에 눈을 박고 있습니다. 지름길을 찾는 거겠지요, 밑줄 위에 또 밑줄을 긋고 책장을 넘깁니다. 확신도 없는 답신을 받으려 머나먼 별에 신호를 보내는 거겠지요. 똔 또도똔 또또, 다리를 떨며 발뒤꿈치로 모스 부호를 날리고 있습니다. 사장님 눈총을 피하는 걸까요? 다 돌아앉았습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사월의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시절이 변한 걸까요? 목련꽃은 이미 지고 없습니다. 망토도 안 걸친 마술사가 등장했네요. 수런수런 매화, 산수유 피었다 진 아직 황량한 세상에 숨겨두었던 가슴속 연초록 보자기를 펼칩니다. 엊그제 봄비에 짙어갑니다. 그의 콧바람에 꽃이란 꽃, 아니 꽃 아닌 꽃조차 피어납니다. 동네 어귀 젊은 까치 부부는 종종걸음입니다. 올봄엔 어느 가지에 세 들어 살까, 식구는 몇이나 늘릴까, 깍 깍 깍 의논이 깊습니다. 그녀의 실크 스카프보다 보드란 실바람이 코끝을 스칩니다. 예서제서 펑펑, 팝콘 같은 벚꽃입니다. 신명 난 마술사는 이제 빨간 장미꽃을 피워내겠지요. 입에서 담쟁이덩굴을 끝도 없이 뽑아내겠지요. “사월과 오월을 내게 주면 나머지 달은 모두 네게 주겠다”는 스페인 속담이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이었습니다. 가로등 위에 새 한 마리 앉아 있었습니다. 새해 첫날, 언감생심 멀리 동해바닷가 정동진은 못 가고 아파트 옥상에서 소원을 빌었습니다. 다짐에 다짐한 지 어언 백일이 지났네요. 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던 이성부 시인의 시구가 틀렸다는 걸 이제야 압니다. 3월 다 가도록 봄이 아니었습니다. 서해 바닷물에, 변산 솔바람에, 눈을 씻고 귀를 헹구려 30번 국도에 갔습니다. 영 봄 같지 않은 봄, 길이 어두운 건 나뿐 아니었나 봅니다. 날아가던 새도 잠시 날개 접고 앞길을 가늠하고 있었습니다. 모처럼 하늘이 쨍했습니다. 그저 올려보는 푸름만으로 눈이 맑아졌지요. 뎅그렁 울어주는 내소사 풍경소리에 귀가 트였지요. 생각보다 하늘 품이 참 넓었습니다.
우리는 어제 같은 오늘을 산다. 또 오늘 같을 내일을 살 것이 분명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 AI가 세상을 바꾼다고 호들갑이지만 대개 그저 무딘 일상을 견딜 뿐이다. 현대인들은 저마다의 사정과 핑계로 세상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알아채지 못한다.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실은 세상과 격리된 채 통증만 더 크게 감각 할 뿐이다. ‘한 장의 사진’과 ‘감성적 글’인 <풍경>은 세상의 모습을 보여 줄 것이다. 기계적이고 획일적이고 이분법적 사고에 갇힌 디지털 시대의 현대인들을 아날로그 감성으로 위로할 것이다. 멈춘 듯 반복되는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처마 끝에서 뎅그렁 울리기도 하고 또 소리 내어 세상을 읊을 것이다. 그리하여 풍경(風景)은 풍경(風磬)이요 풍경(諷經)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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