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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50주년 특집 - 만경강] 만경강의 역사

강의 역사는 곧 우리의 생활사이다. 그만큼 강은 우리의 생활과 밀접하게 닿아있다. 강 마다 오염으로 신음하는 오늘의 첨예한 수질문제도 산업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었다. 그러나 오염 문제가 심각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강은 수질이 아닌 오직 수량의 문제였다.먹는 사는 일 자체가 어려웠던 시절 물 관리를 통해 농사에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강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만경강 역시 이같은 일반적인 우리 강의 변천사를 따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국내 다른 강의 개발 역사와는 또다른 개발사를 갖고 있는 것이 만경강이다. 주변 광활한 평야를 거느려온 만경강은 일찍부터 그 중요성이 인정돼 위정자 마다 선진 수리 사업의 ‘시험’ 대상으로 삼았다.

 

대표적인 선진 수리 사업으로 꼽히는 것이 국내 가장 오래된 저수지인 김제 벽골제다. 백제 비류왕 11년(330년)에 축조된 벽골제는 동진강 수계에 있었지만 만경강 유역 호남평야의 젖줄로 이용되기도 했다.

 

통일 신라시대에도 여러 형태의 만경강 수리 사업이 진행됐다고 이중환의 ‘택리지’는 전하고 있다.

 

벼와 보리를 경작하는 이모작이 조선시대 도입되면서 이앙에 필요한 물을 확보하기 위해 더욱 많은 저수지와 보가 만경강 유역에 만들어졌다. 계속된 수리 사업으로 조선 후기 호남평야 주변 저수지와 보가 수백개에 이르렀다 한다.

 

수리사업의 특성상 많은 비용과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던 만큼 강 개발은 당시에도 관 주도로 이루어졌다. 영·정조 당시 중앙 조정에서 ‘천방수리방법’ ‘제언사목’ 등 공사 기술과 시방서를 출간해 지방 수령들에게 기술적·재정적 문제를 조언하기도 했다. 만경강의 삼례천 제방은 이를 토대로 조선 중기 이후 축조됐다. 삼례천방을 축조하면서 내측 토지가 개간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까지 만경강에 대한 종합적인 개발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공사 기술과 재정이 뒷받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만경강 유역 또한 천수답과 마찬가지로 홍수와 가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기록으로 전하는 수해만도 막대하다. 1589년 한 해에만 3만여 가옥이 침수돼 2백여명이 사망했고, 1854년에는 9백여명이 홍수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근래 가장 큰 피해는 1925년때 홍수로, 2백51호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6명이 익사했다.

 

만경강이 오늘의 모습으로 완전히 탈바꿈한 것은 일제에 의해서였다. 일제가 쌀 수탈을 위해 대대적인 쌀 증산활동을 벌였고, 그 일환으로 만경강에 대한 대규모 수리사업을 벌였다. 1924년 첫 삽을 떠 16간 진행된 수리사업을 통해 만경강은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만경강의 수리사업은 인공제방 축조와 곡류가 심한 부분을 직선으로 바꾸는 직강공사, 댐 건설 등으로 진행됐다. 자연 그대로의 강은 물 흐름의 특성상 곡류천을 이루게 마련이고, 만경강 역시 심한 곡류천이었다. 여기에 제방도 튼실하지 못해 매년 여름이면 홍수 피해를 겪었다. 직강공사와 인공제방의 축조로 만경강 유로는 크게 변했고, 당시 쌓았던 제방이 대부분 오늘날까지 그대로 역할을 하고 있다.

 

인공제방의 축조로 마을이 없어지거나 생활권의 변화 등의 만경강 유역 일대에 변화가 나타났다. 강 내측에 있던 행사리·사천리·신천리 ·유천리·신월리·강리·내포리 등의 마을이 없어졌다. 인공제방으로 익산군 옥산면 목천리의 구만창·동자포와 춘포면 석탄리 등이 강 남쪽으로 들어가게 됐고, 김제군 백구면 삼정리 등은 북쪽으로 가게 돼 행정구역상 많은 불편을 겪다 지난 7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강북 땅은 익산시에, 강남쪽은 김제군에 편입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는 만경강 제방축조와 함께 댐 건설과 관개수로 개설 등의 사업도 병행했다. 그물망으로 되어있던 상류 하도를 관개수로로 개발하고, 유로를 정비했다.

 

만경강 수리사업의 또다른 역사(役事)가 대아댐 건설 사업. 유량이 적은 만경강 물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1923년 전북농조 주도로 대아댐이 건설됐다. 당시 댐 건설에 전국 각지의 인력이 동원됐고, 차량이 없어 탄광용 수수레에다 모래와 시멘트 등을 운반해 건설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아댐(구댐)은 누수 등으로 붕괴 위험이 있어 67년 한 차례 보수공사를 거친 뒤 규모를 늘려 지난 87년 새 댐으로 만들어졌다. 만경강의 또다른 주요 수원인 경천댐은 댐아댐 보다 12년 늦은 1935년 축조됐다.

 

만경강은 농업용수와 생활용수 공급 역할 외에도 교통이 발달하기 전에는 수로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금이야 토사가 쌓이고 물이 얕지만 한 때는 강 상류까지 배가 통할 만큼 물이 깊었다. ‘전주시사’에 따르면

 

고려 멸망 직후 고려의 신하였던 최양이 전주시 대승동(완주군 소양면)에 은거하면서 뜻 맞는 친구들과 봉동읍 구만리 앞 강에서 뱃놀이를 했다 하며, 영조때 전라도 관찰사였던 홍낙인도 전주의 승경(勝景)을 ‘문루에서 바라보니 ... 배와 수레가 함께 닿는구나’라고 읊었다 한다.

 

대동여지도에 나타나 있는 대규모 포구나 나루터만도 고사포·동자포·회포·목천포·춘포·사천진 등 12개나 있어 만경강 수로가 중요한 교통수단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의 세금으로 미곡의 운송로였을 뿐아니라 소금·해물·잡화 등의 생활품들이 이곳을 통해 드나들었다.

 

이같이 중요한 수로로서의 생명을 다한 것이 만경대교의 개통과도 무관치 않을 것 같다. 옥구군 대야면과 김제군 청하면을 잇는 만경대교가 1933년 완공되면서 부안·김제와 군산을 오가는 주요 통로가 됐다. 만경대교는 6.25 전쟁때 폭격을 받아 한 때 통행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54년 복구됐고, 87년 4차선 포장도로로 거듭 태어났다.

 

새만금간척사업과 함께 만경강의 수질오염 문제가 오늘날 새로운 골치거리로 대두됐지만 반세기 전만해도 남의 일이었다. 일제의 치수사업이 이루어지기 전에 익산의 구릉지에서 만경강까지, 그리고 만경대교 부근 탑천 일대 거의 전부가 갈대밭으로 ‘노전백리’(蘆田百里)를 이루었고, 곳곳 배후 습지에 개연꽃이 만발해 ‘옥야홍련’(沃野紅連)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장관을 연출했다 한다.

 

여름이면 봉동 마그네 다리를 비롯, 만경강 유역 곳곳에서 물놀이를 즐겼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오늘날 온갖 생활·산업 폐수로 시커멓게 물들여져 진한 악취를 내는 만경강은 전혀 다른 강으로 와닿을 것 같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만경강은 고우나 미우나 우리의 강이다. 오염된 물을 만든 것이 이기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인간에 의해서였지 강은 어디까지나 피해자일 뿐이다. 새만금간척사업은 만경강을 새롭게 태어나게 할 수 있는 기회다. 2천년 이상 우리와 애환을 함께 해온 만경강이 이제 새만금간척사업의 원만한 추진과 세계적인 생태공원 조성의 또다른 열쇠로 21세기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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