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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인 100년의 삶] 아궁이에서 보일러로

한겨울 초가 지붕 굴뚝에서 모락 모락 피어나는 연기를 보거나, 나무 땔감을 마당 한 구석에 정교하게 쌓아놓은 모습을 보거나, 화톳불을 가운데 두고 옹기종기 모여 할머니의 정겨운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옛적의 기억을 떠올리면 우리들은 문득 따뜻한 고향을 찾은 듯 정겨워한다. 오늘날 이런 광경은 좀처럼 찾을 수 없고, 찾는다 하더라도 도회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산간벽지에나 가야지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나이 지긋이 든 어른들은 몸이 아프거나 피곤하면 아랫목에 등 지지고 누워있으면 시원하다는 말을 한다. 장작을 오래도록 지핀 온돌방 아랫목에 등을 깔고 누워있으면 그만큼 아픈 기운이 사라지고 몸이 개운하다는 뜻이다.

 

손님이 찾아오거나 어른을 안방에 모실때면 으레 아랫목에 앉도록 권한다. 아랫목에 어른이 앉고 윗목에 아랫사람이 앉은 것은 지금도 관례화 되어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이 온돌을 사용한 이래 이어져 온 풍습일 것이다. 오늘날 거실에 소파가 들어오고 구들에서 보일러로 난방기구가 바뀌면서 아랫목, 윗목의 정겨운 개념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지만, 자기보다 윗사람을 모시고 낯선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는 우리 민족의 심성을 읽을 수 있다.

 

우리나라 온돌의 시작은 대체로 삼국시대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청동기 시대 움집에서 구들의 흔적이 보인다고 하지만 아직은 정확하게 검증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 문헌에는 고구려에서 온돌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온돌의 흔적은 고분 벽화에서도 확인된다. 고구려에서는 방의 한쪽에 불을 떼는 아궁이를 설치하고 한 줄의 온돌을 깔아서 그 위에서 누워 자기도 하면서 생활하였다.

 

이후 점차 두줄식으로 바뀌었고, 결국에는 지금과 같이 방 전체에 온돌을 까는 방식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온돌 문화는 점차 남방으로 내려와 고려시대에는 조령지역까지 내려왔고 17세기에는 제주도에까지 구들문화가 확대되었다.

 

전라북도에도 이른 시기부터 온돌문화가 들어와 196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땔감을 구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이용하였다. 특히 가을철이 되면 춥고 긴 겨울 동안에 쓸 땔감을 장만해 놓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장작을 패서 집 한켠에 쌓아놓거나, 주변의 풀들을 베어다가 잘 말려서 갈무리 해놓고, 농사짓고 나온 부산물들을 집 한켠에 쌓아 놓고 겨울철 땔감으로 이용하였다. 심지어는 장례를 치루고 남은 목관까지도 땔감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가져가기도 하였다.

 

이처럼 난방으로 나무와 풀을 이용하다 보니 마을 주변은 민둥산이 되어갔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를 하기 위해서 10리, 20리 떨어진 곳까지 가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논에서 나는 짚은 모두 땔감과 동물의 사료로 이용되어 거름으로 쓸 것이 없어지게 되어 지력은 점차 떨어지게 되었다.

 

또한 산에서 많은 사람들이 산에서 나무를 마구 베어내어 민둥산이 되어가자 정부에서는 산림 감시원을 배정하여 나무를 벨 수 없게 하였다. 만약 산에서 나무를 베어내다가 이들 산림 감시원에게 발각 되면 많은 벌금에 감옥에까지 가게 되었다. 그래서 산에서는 산림 감시원과 땔나무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 숨바꼭질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연탄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196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연탄은 한국 전쟁 기간 중 개발된 구공탄이었다. 정부에서는 당시 장작용으로 나무 남벌이 심각해지자 산림애호 정책의 하나로 구공탄의 사용을 널리 권장하면서 연탄이 주 연료원이 되었다.

 

1970년 6월 15일에 전라북도에 최초로 만들어졌던 교동의 시민아파트도 난방은 연탄이었다. 이로해서 도시의 집집마다 집 한 모퉁이에 연탄을 쌓아놓고 긴 겨울에 대비하는 모습은 너나 할 것 없이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래서 당시는 가을에 겨울내내 쓸 연탄을 확보해 놓으면 그 이상 부러울것이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것은 1966년에 있었던 연탄 파동은 서민들의 애로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해 여름부터 시작된 연탄 기근은 겨울을 앞두고 더욱 심해져 시민들의 겨우살이를 위협했다. 연탄값 인상을 요구하는 생산업자들이 생산량을 줄이자 한두 장의 연탄이라도 사기 위해 주부들은 줄을 이어 차례를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또한 겨울에는 연탄재를 처리하는 것도 커다란 문제였다. 집집마다 대문 앞에 연탄재가 수북이 쌓여 있는 장면은 당시 도시 주택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또한 주부들은 화력이 떨어진 연탄을 갈아 넣기 위해서 한밤중이나 새벽에 일어나야만 하였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연탄가스였다. 온돌 문화가 우리의 전통 난방이었듯이 연탄불을 떼면서 그 열기를 직접 구들을 통해서 보내다 보니 방안에 약간의 틈이라도 있으면 그 틈을 타고 나오는 죽음의 가스는 항상 사람의 목숨을 위협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각 병원에서는 고압 산소 치료기를 들여놓았으며, 식초, 동치미 등 민간요법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7,80년대 연탄가스 사고는 전북일보에도 단골 뉴스로 등장하였다.

 

이 연탄가스 사고를 줄여준 것이 가스를 직접 보내는 방식에서 보일러로의 변화가 이루어 지면서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 근본적인 해결은 1980년대 기름 보일러의 등장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농촌지역의 모습은 약간 달랐다. 1980년대까지도 나무를 이용한 난방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일부 주택에서는 연탄보일러가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주택에서 아직도 전통방식대로 땔나무를 이용하여 난방을 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산간지역을 제외한 김제와 같은 평야지역에서는 땔나무를 구하는 것이 아주 힘들었다. 주변에 산이 없기 때문에 가난한 집에서는 장작을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각종 농사 부산물을 땔감으로 이용하였고, 그나마도 구할 수가 없을 때에는 몇 십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나무를 하러 다녔다. 그리고 땔나무를 마련할 수 있는 약간의 산이라도 있을 때에는 다른 집에서 나무를 해가지 못하도록 지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도시지역에서는 기름 보일러로 바뀌게 되었고, 다시 천연가스를 이용하는 도시가스로 난방을 바꾸게 되었다. 그리고 농촌지역에서도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부엌 개량비를 보조받아 기존의 전통부엌이 이른바 입식부엌으로 바꾸거나, 도시에 나간 자녀들의 도움을 받아 아예 집을 기름보일러를 설치한 양옥으로 바꾸게 되었다.

 

이처럼 사람들이 땔나무를 하지 않게 되자 마을 주변의 산과 들에는 수풀이 우거지게 되자 사라졌던 산짐승들이 다시 돌아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심지어 큰 산 아래에서는 산 짐승들이 민가에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따라서 마을에서 떨어진 논이나 밭에서는 산짐승들의 습격으로 농작물들이 피해를 보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또한 논에서는 기존에 땔감으로 이용하던 볏짚을 그대로 거름으로 이용하면서 지력이 향상되게 되었다. 이 결과 벼들은 병충해를 견디는 힘이 강해지게 되어 그만큼 농약을 적게 치고도 수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난방의 변화는 자연의 변화를 가져왔다. 온돌에서 보일러로 변화됨에 따라 산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되찾았고 인간은 좀더 편한 삶을 유지하지만, 엄청난 화석연료를 소모함으로서 파생되는 각종 대기오염은 오늘날 더욱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그래서 지구와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는 환경보존 단체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는 것이다.

 

/박노석(전라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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