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8년 4월 ‘민생경제 좀 먹어온 지역 비리사업자를 고발합니다’라는 제목의 진정서가 관계기관에 날아들면서 시중의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이 진정서에는 △탈세 △공정거래법 위반 △호화 사치생활 △조직폭력배의 실질적 자금책 △유명 인사와의 관계 호언 및 위력과시 △아파트건축 비리 등의 내용이 담겨져 있었고 익명의 진정인은 일벌백계 차원의 처벌을 호소한다고 주장했다.
이 익명의 진정인은 “다년간 경찰 정보업무를 취급해 온 사람으로서 도저히 이런 사실을 묵과할 수 없어 구국의 결단으로 현 정부의 관계기관 여러분에게 철저한 조사를 호소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당시 ‘국민의 정부’라는 새 정권이 출범한지 두달도 채 안된 시점에서 이같은 주장이 사실이었다면 그 누구도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진정서는 이에앞서 ‘악질 기업주로부터 부도맞은 영세사업자 7백명’ 명의의 기업주 처벌을 요구하는 탄원서가 시중에 나돈 이후 나온 것으로, 보복성 진정내용이라는 인상이 짙다는 게 당시 일반적 시각이었다.
그러나 ‘아니면 말고’ 또는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의 허위 진정서가 관계기관에 유포될 경우 시중 인구에 회자되고 이는 각종 유언비어 양산과 수사력 낭비, 사회혼란으로 이어지기 마련. 때문에 결코 무심히 넘길 일이 아니며 무고(誣告)성 투서를 배격하자는 운동이 한때 지역사회 일각에서 일기도 했다.
최근엔 어느 사업자단체를 모함하는 익명의 진정서가 나돌아 이 단체의 장이 발끈하고 있는 상태. 이 단체의 장은 “허무맹랑한 얘기들이 대부분이어서 어이가 없을 정도”라며 말도 꺼내기 싫다는 투였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 있을 경우 주장내용을 모두 시인하는 꼴이 돼 고민끝에 수사를 의뢰했고 경찰서장을 찾아가 철저히 조사해 달라고 당부까지 했다. 이 사업자단체의 장은 이 진정서 내용이 허위임에도 불구하고 사업관련 기관에 배달되는 바람에 일일이 해명할 수도 없을뿐더러 해명에 나설 경우 또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게 통례여서 적지않은 신경이 쓰인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사실도 아닌 허위내용으로 가득찬 진정서 한장이 내던져지는 바람에 수사까지 의뢰해야 하는 게 우리 사회현실이고 신용을 무기로 하는 기업인일 경우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조직내 개인간 헐뜯기 양태도 문제. 실력이 뛰어나 우리 사회에 상당히 많이 알려진 한 젊은 교수는 지난 설을 앞두고 1만원 상당의 선물 1백50개 정도를 청원경찰을 비롯해 학내 직원들에게 전달했으나 그후 돌아온 것은 자기에 대한 비방과 시기 등 이른바 헐뜯기의 결과뿐이라는 것을 알고 선물 돌린 것을 후회했다. 순수한 동기에서 나눔의 선을 행하고자 했으나 주변에서는 ‘버릇없는 행동’ ‘이런 형편없는 물건을 보냈다’‘무슨 동기에서 선물을 돌리느냐’는 등 실로 어처구니없는 반응을 나타낸 것. 극히 일부이긴 하겠지만 지성인사회에서 벌어지는 질투와 시기, 끌어내리기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외국에 비해 파벌이 심각한 교수사회와 일반직 직원의 보직인사 및 교수 신규임용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알력과 모함도 비일비재하게 나타나는게 우리 한국사회의 실정이다.
정치판은 어떠한가. 지방선거와 총선 등 역대 선거때마다 거짓말과 모함, 상대방 흠집내기, 무고와 명예훼손, 흑색선전 등 고질병이 도져 치유불능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4.13총선을 앞두고 벌써부터 상대방 비방과 흠집내기, 거짓말과 모함, 한탕주의 폭로전 등이 판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폭로전문가라는 한나라당의 이신범의원은 최근 “김대중대통령의 3남 홍걸씨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대지 1만여평의 6백만달러짜리 호화주택에서 산다”는 의혹을 제기, 파문이 일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다. 그 집은 호화주택지역에 있지도 않았고 집값도 동네에서 비교적 저렴한 편인 것으로 확인됐다.그러나 한건주의 폭로 그것으로 끝이었다.
정치패러다임이 확 바뀌어야 할 21세기에도 이러한 후진적인 양태가 계속된다면 정치선진화는 요원할뿐더러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정치권 스스로의 자성과 제도적 개선책이 마련돼야 할 것으로 촉구되고 있다.
정치판과 집단 또는 개인간 이해관계 때문에 상대방을 모함 또는 비방하거나 흠집내기 끌어내리기성 투서와 진정서를 내는 일이 좀처럼 가시지 않고 있다. 일부 정치인들은 책임도 지지 않고 이해관계인을 진흙탕물로 몰아넣는 일을 매번 선거때마다 되풀이하고 있다.
지난해 도내에서 접수된 고소 고발 진정 등 형사민원은 3만5천5백78건. 경찰이 이같은 민원을 처리하기 위해 몸살을 앓고 있다. 이 가운데 문제는 없는 죄를 있는 것처럼 꾸며 관청에 고발하는 이른바 무고(誣告)다. 지난해 전북경찰청에 접수된 것중 무고로 밝혀진 것이 82건. 98년도 56건보다 46%가 늘어난 건수다. 그러나 공식으로 접수되지 않거나 중도포기 등으로 수사 및 조사를 하지 않은 것 등을 합치면 이 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같이 진정 투서가 많은 것은 익명성 때문. 불법과 비리가 있으면 자신의 이름을 떳떳하게 밝히고 정식으로 사법기관에 고소고발하면 사실여부가 명명백백히 가려지고 처벌이 가능하기 마련. 그런데도 자신을 밝히지 않고 진정서를 내다보니 과장되거나 허위내용이 첨부되게 되고 그것이 침소봉대, 유포되면서 혼란이 초래되게 된다. 대상자는 사실여부를 떠나 자연 타격받을 수 밖에 없고 심한 경우 사업이나 업무, 또는 조직내 인사상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하게 된다고 경찰 관계자는 털어놓았다. 일부 사실로 드러나는 경우도 없지않지만 그것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 허위로 판명이 나 조사할 가치도 없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이같은 무고와 비방, 모함, 상대방 헐뜯기와 깎아내리기 등이 잦아질 경우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사회분열과 혼란이 초래되며 지역이미지에도 먹칠을 하게 될 것은 불보듯 뻔한 이치다. 이와함께 이러한 좋지않은 이미지가 대외에 알려질 경우에는 기업의 투자 및 기관단체 유치 등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불이익이 많아 지역발전에 걸림돌이 된다.
이런 점에서 21세기에는 우리 모두 후진적인 헐뜯기를 배격하고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 만들기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다. 칭찬은 못할망정 모함이나 비방이 난무해서야 선진사회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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