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불교의 특징은 대승불교이면서 통불교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수많은 보살과 부처가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중생의 고뇌와 아픔이 너무나도 다양하게 많기 때문이다.
병들어 신음하는 사람에게는 병을 낫게 해주는 약사여래가 있어야 하고, 죄를 많이 짓고 지옥문을 향하여 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장보살이 있어야 하며, 시련과 역경속에서 간절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는 관세음 보살이, 지혜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문수보살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불교에서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구분 지어 보지는 않는다.
부처란 깨달은 중생이요, 중생은 아직 깨닫지 못한 부처하고 흔히들 말하고 있다.
부처가 될 성품이나 자격은 누구든지 이미 다 갖추고 있다는 것이 불교의 정설이며 전문적인 용어로는 여래장(부처의 씨앗)사상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불교는 철저하게 절대 평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신분의 귀천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귀족 출신의 제자들이 출가하였을 때 "신분의 귀천은 태어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적이 있다. 누구든지, 아무리 천박하고 못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음 한번 바로 먹고 참회와 서원의 수행을 열심히 하면 누구든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발심을 하여야 한다.
올바른 사고, 뚜렷한 신념,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치관을 바꾸어 정립하는 것을 발보리심, 즉 발심이라고 하는데 처음 먹은 마음으로 정각에 이르는 날까지 변함 없이 수행하는 것을 다른 말로는 보살행이라고도 한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살행을 하여야만 하며 보살행의 구체적인 내용은 육바라밀과 십바라밀로 말하기도 한다.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베풀고 나누며, 정의롭게 자기 도리를 다하고자 최선을 다하며, 도가 성취되는 그 날까지 모든 어려움을 능히 참고 견디면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 안정과 평화가 깃든 자유로운 삶을 실천하여 모든 이웃들이 이익과 안락을 누릴 수 있도록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곧 진정한 의미의 보살행인 것이다.
이웃들에게 모든 공덕을 남김없이 희향하는 것이 곧 자아완성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대승불교의 모든 경전은 한마디 글자도 다르지 않게 강조하고 있다.
우리들의 삶 속에 대자유, 절대평등이 깃들 수 있는 길은 자리(自利)가 아닌 이타(利他)임을 대승불교는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지금, 곧 여기에서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아서 매사에 정성을 다하는, 혼이 깃든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정덕스님(군산 서수면 상주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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