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밤 전북대 삼성문화회관. 우연히 친구를 만났다. 12년만이다. 자판기 커피를 뽑고, 일주일전에 처음 만난 사람처럼 혹은 일주일만에 다시 만난 사람처럼 건조한 일상을 이야기했다. 아련한 시절의 초상, 탄핵과 선거, 직장과 결혼, 전주와 영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대화. 상대의 말이 지루해질 즈음이면 그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담배 불을 붙였다. 꽤 긴 시간이 흐르는동안 리필 해주지 않는 자판기의 야속함을 탓하며 몇 잔의 커피를 다시 뽑았다. 서로에 대한 예의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음에 만나면 술 한잔하자”는 그렁그렁한 말을 했는지는 벌써 가뭇하다. 친구를 만나기 바로 전에 본 짐 자무시 감독의 '커피와 담배'의 한 장면처럼.
흑백화면과 70년대 감성을 전하는 음악이 시종 손끝을 자극하는 이 영화는 시작부터 '중독'을 보여준다. 테이블에 놓인 다섯 잔의 커피와 꽁초가 수북한 재떨이. 배우들은 담배를 물고 커피를 마신다. 잔을 든 손의 심한 떨림. 카페인에 찌들어 있는 배우들의 눈동자와 손가락, 치아. 우리에게 익숙한 배우 빌 머레이나 로베르토 베니니도 다른 배우과 다르지 않다.
"난 커피를 마실 때만 담배를 피운다네.” "내 어머니와 비슷하군. 커피하면 담배지.” 배우들은 기어이 그들의 중독을 확인시킨다. 너저분한 수다와 냉소적인 빈정거림을 이끄는 매개물은 오직 커피와 담배. 주전자를 들고 생맥주 마시듯 커피를 쏟아 붓거나, 끊임없이 줄담배를 피우거나, 쉬지 않고 커피를 채워주거나, 관심도 없는 일상을 토해낸다. '사촌''쌍둥이''캘리포니아 어딘가''흥분''샴페인' 등 감독이 오랜 세월 제작한 11편의 단편을 모았지만, 이미지는 한결같다. 커피와 담배의 깊은 유혹.
영화는 커피와 담배의 해악을 보여주며 공익성에 대한 예의를 지켰던 두세 편을 빼면 남모르게 유머책을 보고 있는 것처럼 끊임없는 '키득거림'과 속내를 들킨 당혹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최고는 아닐지언정 꽤 근사한 영화임은 분명하다.(27일 오후 2시, 전북대 삼성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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