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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0년대 우리영화를 말한다

 

고교시절 영화에 빠져 있던 그를 이해하고 영화관람을 눈감아주던 미술선생님, 의대 대신 일본대학 영화학과를 진학했던 사실을 뒤늦게 알고 '父子의 연을 끊겠다'는 편지를 띄웠던 아버지, 돈이 없어 영화를 제작할 수 없던 그에게 말없이 도와줬던 형님.

 

1920년 전주출생 유심평감독.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인사로 전주를 찾은 그는 전주와 60년이 넘는 그의 영화인생을 풀어 놓았다. 전주에서의 고교시절, 그리고 50년대 후반 이후 10여년동안 국내 영화제작 현장, 그리고 그 후 일본생활 속에서는 '꿈과 영화에 대한 열정, 또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흔적들'로 가득했다.

 

전주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영화학과를 고학으로 졸업, 일본동부영화제작소에서 근무했던 그는 59년 한국에 들어와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전주안과 유인상원장이 그의 조카다.

 

'불멸의 성자', 황정순·김승호·최무룡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출연했던 '대원군과 민비', 외화 '쉐인'과'춘향전'을 접목시킨 '마패와 검' 등도 그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들 영화에 스탭으로 참여했던 장석준, 전조명씨 등은 모두 대종상영화제 수상경력이 있을정도로 한국영화의 중심에 섰던 인물들이다. 50∼60년대 전주는 또하나의 충무로였다는 유감독은 "이강천, 김영창감독 등 당시 한국영화의 주류였던 이들은 대부분 전주에서 영화제작을 했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60년대 후반 일본으로 건너간 뒤에도 꾸준한 작품활동을 했다.

 

유감독은 영화를 공부하는 젊은이들에게 "영화의 기술에만 집착하기 보다는 미술과 음악 등 종합예술인 영화를 위해 기초를 탄탄히 다져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사진촬영후 유감독은 사진기자의 디지털카메라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세상 많이, 그리고 빠르게 변한다"며 환하게 웃었다.

 

유감독은 영화제 끝까지 남아 모처럼 찾은 전주와 젊은 날 고생스럽지만 삶의 희망이었던 영화의 세상에 빠지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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