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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명상]목숨 주는 사랑

 

2000년 전 유대사회에 예수라는 인물이 나타나 기존의 지배 질서를 흔들어 논다. 당시의 주류를 장악하고 있었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실험하여 묻는다. "계명 중에 첫 째 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답하기를 "첫째는 온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 두 계명이 예수님 이전 온 율법의 전부라고 선언한다. 율법주의자들의 율법관은 이 핵심적인 '사랑'이 없이 법률로 선과 악을 구분하여 사람들을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을 꼬집는다. 그리고 예수님은 새로운 계명을 제자들에게 준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은 그 사랑의 모범으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준다. 제자들에게 이웃들과 이 목숨 주는 사랑을 하라고 가르치시며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며 "그 계명을 지키면 나(예수)와 친구라”고 한다. 예수 자신의 반열에 오르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이 말씀들을 받아드리기 전에 예수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이 행복한가?에 대한 물음이 첫 번째 해결해야할 과제이다.

 

예수의 삶과 예수를 죽인 당시의 지배자의 삶, 그리고 이것저것 모르고 의식주 해결하는 일에 평생을 아등바등하며 사는 소시민의 삶, 이 세 종류의 삶을 벗어나는 인생이 별로 없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이 되어 세상을 등지고 사는 삶이 예외적으로 있긴 하다. 어느 가수의 노래대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을'만큼의 세월을 보낸 나의 결론은 예수의 삶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생자체를 고(苦)라 한다. 그래서 불교의 구원(해탈)은 잘해봐야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는 이 고통의 윤회(輪回)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했나보다.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없는 것인가? 예수는 그 길을 제시한다. 그 길은 '사랑'이다. 고양이가 쥐를 좋아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친구를 위해 목숨을 주는 사랑의 방법이다.

 

이 원리가 양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새로운 질서를 세워준다. '죽임'과 '불신'의 원리가 아닌 '사랑'과 '신뢰'의 질서이다. 그 일을 몸소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는 이 세상의 구원자와 친구가 되어 세상을 구한다. 그런 삶이야말로 최고의 기쁨이지 않겠는가? 내가 친구를 위해 목숨까지를 주기로 작정했는데 무엇인들 못주겠는가?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자가 누리는 평안은 세상(돈, 권력, 명예 등등)이 주는 것 하고는 다르다. 이 사랑의 능력자들에 의해 세워진 새로운 질서가 전일화 된 사회가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이 '목숨주는 사랑'을 품은 자는 이미 그 안에 천국이 있어 영원히 빼앗기지 않을 기쁨을 충만히 누리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정치, 사회, 문화, 대학, 종교 등 모든 영역에서 '목숨 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이미 있어 세상이 나날이 천국을 향해가고 있음에, 내가 그 사역(使役)에 포함되어 있다고 믿기에 난 참으로 행복하다.

 

/양진규(세누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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