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904호 '그리스 청동투구' 등 총 7점…대부분 문화교류·유학과정서 들어와 지정
우리나라 보물 제904호는 그리스 고대 청동투구다. 1987년 보물로 지정된 이 투구는 21.5㎝ 높이로, 머리에 썼을 때 두 눈과 입이 나오고 콧등에서 코끝까지 가리도록 만들어졌으며 머리 뒷부분은 목까지 완전히 보호하도록 돼있다.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의 코린트에서 만들어진 이 투구가 어떻게 우리나라 보물이 됐을까?
이 투구는 1936년 손기정이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기념으로 받은 것이다. 1875년 제우스 신전에서 발견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부상으로 수여하도록 돼있었지만 손기정에게 전달되지 않았고, 베를린박물관에 보관돼 오던 것을 1986년 그리스 부라딘신문사가 주선해 우리나라로 오게됐다.
이처럼 우리나라 유물이 아닌데도 우리나라 보물로 지정된 것들이 있다. 문화재청 동산문화재과에 문의한 결과, 우리나라 보물 중 외국에서 건너온 것은 총 7점. 보물 제393호 전등사범종(傳燈寺梵鐘), 제560호 진솔선예백장동인(晋率善濊伯長銅印), 제620호 유리배(琉璃杯), 제624호 유리제대부배(琉璃製臺附杯), 제635호 금제감장보검(金製嵌裝寶劍), 제904호 그리스고대청동투구, 제1095호 봉림사목아미타불좌상복장전적일괄(鳳林寺木阿彌陀佛座像腹藏典籍一括)이다.
전등사 범종은 일제 말기 금속류 강제수탈로 빼앗겼다가 광복 후 부평군기창에서 발견돼 전등사로 옮겨진 것으로, 형태와 조각수법에서 중국종의 모습이 보인다. 종의 몸통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중국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라는 것과 북송의 철종 4년(1097년, 고려 숙종 2년)에 주조됐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의 철제종이 보물로 지정된 유일한 사례로, 중국제 철종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진솔선예백장동인은 중국 한대 이후 이웃나라 왕에게 수여한 도장이다. 중국 진나라때 만든 것으로 경북 영일군에서 청색 유리옥 10개와 함께 출토됐다. 천마총에서 나온 유리배와 미추왕릉에서 나온 유리제대부배는 유리를 재료로 한 유물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서방에서 전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추왕릉에서 발견된 금제감장보검은 삼국시대 무덤에서 출토되는 고리자루칼(환두대도)과 형태와 문양이 다르다. 금제감장보검 같은 형태의 단검은 유럽에서 중동지방에 걸쳐 발견될 뿐 동양에서는 나타나지 않아, 동·서양 문화교류를 상징하는 의미있는 자료다.
1978년 봉림사 아미타불좌상을 개금할 때 나온 목아미타불좌상복장전적일괄 중 1095-5호인 과주묘법연화경(科注妙法蓮華經)은 우리나라에서 간행한 것이 아니라서 확실한 간행년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명태조에 의해 간행된 대보은사판대장경(報恩寺版大藏經)의 영향을 받은 명나라 초기 간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근 개인 블로그 등을 통해 외국 유물이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사례가 떠돌고 있지만, 문화재청 동산문화재과 관계자는 "일괄로 묶인 경우 보물 하나에 100여점이 되는 유물도 있어 일일이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과거 우리나라에서 출토돼 우리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근래 연구에서 외국산의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국보 42호로 지정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木彫三尊佛龕)이 대표적인 예. 불감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나무나 돌, 쇠 등을 깎아 일반적인 건축물보다 작은 규모로 만든 것이다. 목조삼존불감은 보조국사 지눌과 관련돼 있어 한 때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여겨졌었지만 지눌이 당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져온 것으로 기법 등이 8세기 당나라때 작품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외국 것을 우리나라 국보나 보물로 지정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약탈을 통해 들여온 것이 아니라 문화교류나 외국 유학 과정에서 들어와 한국화되거나 우리 역사가 담기게 된 문화재들은 지정해 보호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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