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4-12-11 17:39 (수)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오목대
일반기사

[오목대] 명성황후 - 장세균

1895년, 일본인들에 의해 살해된 명성황후 시해 사건 전모와 시해사건에 관련된 범인들의 후손들이 110년 만에 한국을 찾아 사죄하는 모습을 담은 특집 뉴스가 지난달 24일 밤, 아사히 TV를 통해 일본 전역에 방송되었다고 한다. 일본 자민당 60년 집권의 종식과 더불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방송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다.

 

외교 관계에 있는 이웃나라 왕비를 무참히 난자(亂刺) 살해한 일본은 세계 역사에도 없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국력이 쇠약미미(衰弱微微)했던 조선은 그런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1894년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전리품으로 중국의 요동반도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극동(極東)에서 남하정책을 펴던 러시아가 일본의 팽창을 두려워하여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다시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이것을 "삼국(三國)간섭"이라고 한다.

 

일본은 할수없이 국제압력에 굴복, 요동반도를 중국에 반환했다. 이런 상황에서 청나라의 후원을 기대할수 없게 되자 고종(高宗)이 의지할 곳은 러시아뿐이라고 판단했다. 이것을 "인아거일책(引我拒日策)"즉 아라사를 가까이 하고 일본을 멀리한다는 것인데 여기에서 아라사란 러시아를 말한다. 박정양, 이범진, 이완용, 등을 등용하여 친러내각을 출범시켰다.

 

일제는 명치유신(明治維新)이후 30년간 조선의 정복을 주장하는 정한론(征韓論)을 펴왔고 조선에서 러시아에게 주도권을 뺏길것을 염려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와 한판 전쟁을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친(親) 러시아 중심인물이라고 생각된 민비를 제거하기로만 일본은 결정하였다.

 

민비 시해에 참가한 병력은 일본인 30명, 경찰 10여명, 조선군 훈련대, 일본수비대로 구성되었다. 1895년 8월 20일 동쪽 곤녕전에는 고종과 왕세자가 있었고 서쪽 옥호루(玉壺樓)에는 명성황후가 있었는데 이때 궁녀 3명과 함께 시해되었다. 이때 흉도(胸徒)들은 명성황후의 시체를 숲속으로 운반한 뒤 장작더미위에 올려놓고 불을 질렀다고 한다.

 

이런 처참한 광경은 미국 공사관의 보고와 영국 공사관의 보고에 적시되어있다. 다시한번 국력이 약한 민족의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장세균 논설위원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