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100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께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역. 러시아 군악대의 요란한 팡파르 소리를 뚫고 6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열차에서 막 내려 러시아 군대와 재무상 코코프체프의 영접을 받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총탄을 맞고 쓰러진 것이다.
환영 나온 일본인속에 섞여 있다 총을 쏜 안중근(1879-1910) 의사는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라!(한국 만세)"를 외치며 일본 관헌에 체포되었다.
이토는 하급무사에서 총리대신까지 오른 성공 신화의 인물. 조선 통감부 초대 통감을 지내는 등 침략의 원흉으로 꼽히고 있지만 일본에선 헌법 초안 마련과 의회 양원제 확립, 메이지 유신을 이끈'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었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이날의 총성은 제국주의에 맞서는 아시아 민족주의 운동의 신호탄이었다. 중국의 쑨원은 당시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백세의 삶은 아니나 죽어서 천추에 빛나리"라는 글을 바쳤다.
안 의사는 일본 관헌의 심문과정에서 이토를 죽일 수 밖에 없는 죄상으로 15가지를 들었다. 첫번째와 두번째는 각각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를 거론했다. 이는 백범 김구도 항일투쟁에 나서게 된 동기로 든 대목이다. 이와 함께 정미 7조약, 한국인 학살, 정권 탈취, 군대 해산 등을 들었다.
주목되는 것은 14번째로 동양평화를 파괴한 죄를 주장한 점이다. 이 항목은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동안 집필한'동양평화론'이란 논설과 맞물려 있다. 안 의사는 일본이 러일전쟁의 전리품으로 획득한 뤼순항을 개방항구로 삼아 이곳에 동양평화회의 본부를 두자고 제안한다. 또 은행을 설립하고 3국의 주요 지방에 은행 지점을 내어 공용화폐를 널리 보급, 산업발전을 함께 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EU보다 훨씬 앞선 '블록 경제론'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안 의사는 글씨가 뛰어나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 등 유묵이 보물 제569호로 지정돼 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유해는 구천을 떠돌고 후손들은 어렵게 생활하다 쓸쓸히 죽어갔다. 그의 의거 100주년을 맞아 그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히 일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 아닌가 싶다.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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