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보다 무서운 무료함 이겨 낼 공간…"그나마 모여서 얘기할 수 있어 덜 심심"
눈발이 날리고 매서운 바람이 살을 엘 기세로 불던 지난 5일 오후, 완주군 상관면 신리부녀경로회관 앞에는 털고무신 등 신발 9켤레가 따닥따닥 붙어있었다. 차가운 바깥바람과 달리 경로당 안은 따스했다. 69살부터 88살까지, 할머니들은 이미 '한판' 벌이고 있었다.
경로당 안에 있는 한 할머니의 말을 빌자면 '만날 쳤사서 도사들'인 할머니들이 닳을 대로 닳은 화투를 들고 민화투 삼매경에 빠져 있다. 한 할머니는 "나는 결속(구경하는 할머니)들이 많아서 먹여 살리려면 좀 따야 혀"라고 넉살을 부리더니 이내 집중력을 높인다. 한 판 돌아가는데 5분 꼴, 기계적으로 패를 맞추느라 서로간의 말은 별로 없다. 다만 한 판이 끝나면 승자에게 10원씩 던져 줄 따름이다. 10점이 나든 50점이 나든 여하튼 한판 판돈은 10원이다.
농촌 할머니들의 아지트인 경로당은 날이 추워진다 싶으면 북적이기 시작한다.추운 날씨가 닥쳐도 어려운 형편 탓에 "혼자 사는디 나지 때(낮) 무슨 불을 때"라는 등 난방비 걱정이 앞서고, "농사일은 진즉에 끝나고 헐 일도 없어"라는 추위만큼 무서운 무료함이 다가오는 농촌의 겨울.
경로당은 '1타2피'의 답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오전 11시부터 몰려들기 시작한 할머니들은 경로당의 심야전기로 구들장을 데우고, 점심은 면사무소에서 지원한 쌀과 집에서 들고 온 김치 등으로 때운다. 오후 3시는 경로당이 가장 붐비는 시간으로 선수 아닌 선수들이 판을 벌인다. 신리부녀경로회관은 이 시간 열댓 명이 어우러져 무료함을 달랜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심하게 낯을 가리는 이들이 아니면 "모다 여기로 온다"는 한 할머니의 설명이다. 먼저 경로당에 온 할머니들이 당번이랄 것도 없이 청소를 하고, 밥을 한다. 나름의 공동체 규율도 선 셈이다. 김상임 할머니(85)는 "지난 3~4월에 2명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가고, 나이 들고 아프니께 요양병원에 가는 할매들도 많어"라고 안타까워하면서 "집에 있으믄 심심헌게 벨 일 없으믄 다들 와서 얘기도 하고, 화투두 치구 시간 보내는 거지"라고 말한다.
농촌 경로당은 대부분 65세 이상 할머니들 차지다. 할아버지들은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소일거리 하거나 동네가게에서 술 한 잔 기울이는 게 삶의 낙이다. 그래도 완주군 상관면 신리는 나은 편이다. 할아버지를 위한 경로당이 따로 있어 매일 십여명이 모여 놀 수 있고, 젊은 할머니들을 위한 경로당도 따로 있다.
"예전에는 부채만들기랑 뭐랑 가르친다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젠 안 와. 할 게 없고 심심하니까 화투치는 거지."
경로당에 와도 심심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우길순 할머니(74)는 "뭐 가르친다고 해도 귀찮아서들 잘 안가"라면서도 "그래도 예전에 누가 올 때가 좀 나았지"라고 말한다.
도시는 노인복지관 등이 곳곳에 있어서 배울 의지만 있다면 무료로 여가활동을 즐길 수 있지만 농촌은 사정이 다르다. 인구의 대부분이 노인이지만 넓은 곳에 산재해 있기 때문에 노인복지관 등은 거리가 멀어, 유일한 문화공간인 경로당에서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군이랑 면에서 냉장고랑, 쌀이랑, 회비랑 주니께 놀만 혀. 근데 요새 노인들이 너무 오래들 살어."
경로당 최고참인 임연순 할머니(88)의 말 속에서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농촌노인들의 무료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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