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는 우리나라 초창기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고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에 노력한 공산당 최고 원로였다. 2005년 광복 60년을 맞아 뒤늦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부안군 백산면 출신인 지운은 군산 금호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을 다닌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일본과 러시아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과 코민테른 등 사회주의 활동을 벌였으며 1926년 제3차 조선공산당(일명 ML당) 결성시 책임비서를 맡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두차례에 걸쳐 13년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에는 좌익과 우익의 가교역할을 자임했고 이승만-박헌영 회담을 추진하는 등 통일정부 수립에 노력했다. 하지만 극심한 죄우익 세력다툼과 박헌영과의 노선투쟁, 여운형의 암살 등에 환멸을 느껴 1947년 낙향했다. 선영 옆에 움막을 짓고 꽃과 나무를 벗하며 살았다. 가난이 멍에처럼 따라 붙었으나 이승만 정부 때 입각제의를 받고 친일파와 함께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거물급 사회주의자였기에 그의 활동은 주목되는 바 컸다. 그는 해방 직후 조직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7인의 전형위원으로 참여했다. 당시 예비내각은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여운형, 김규식 외무, 김구 내무, 허헌 법무, 김성수 문교, 김일성 군사위원장' 등이어서 흥미롭다. 또 오늘날 중국의 대부 모택동과는 1921년 4월 상해에서 신우회(新友會) 결성시 만났다. 두 사람은 사회주의에 대해 강한 열정을 갖고 있었고 동갑이어서 친했다고 한다. 또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대한애국부인회 김마리아와의 동지적인 애틋한 사랑은 그가 로맨티스트였음을 보여준다. 그는 허백련 오지호 등 예술인과 교류했고 서예도 수준급이었다.
지난 10일 서울에서 지운의 글씨를 모은 회고전이 끝났다. 모택동 사망시 지은 만사(輓詞)와 1935년 서대문형무소 중병자 감방에서 지은 시 '달도 하얗고, 국화도 하얗고, 내 마음도 하얗다(月白鞠白 我心白)' 등이 전시되었다.
최근 통합진보당 등 진보진영의 한없는 도덕적 추락을 보며 한국 사회주의의 새벽을 열었던 지운의 청교도적 삶을 돌아보게 된다.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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