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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남원 월산리 고분군 출토 갑주 - 전북 동부 산간지대의 가야 문화 알린 첫 유적

▲ 철제투구, 목가리개, 비늘갑옷.

갑주란 전쟁터에서 적의 공격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옷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쟁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닌데, 갑주의 실물자료가 확인되는 때는 삼국시대부터다. 삼국시대의 갑주는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와 몸통을 보호하는 갑옷, 목이나 팔·다리를 보호하는 부속구로 나뉜다.

 

우리는 흔히 '가야'(加耶)하면 '철의 나라'를 떠올린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철제 갑주의 절반 이상이 가야 무덤에서 출토됐다. 하지만 가야인들이 백제나 신라 사람들에 비해 갑옷을 많이 만들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만큼 가야 사회에서 철제 갑주가 차지하는 의미와 위상은 특별했다.

 

전북의 동부 산간지대에서 가야 문화를 알린 첫 번째 유적은 남원시 아영면의 월산리 고분군이다. 1982년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발굴조사 중 유적의 M1-A호분에서 철제 투구와 비늘갑옷, 목가리개가 출토됐다.

 

월산리 고분군 철제 갑주와 부속구의 구성 요소는 기본적으로 직사각형 또는 사다리꼴의 철판이지만, 보호했던 신체의 위치에 따라 그 크기나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각 철판의 곳곳에 뚫려있는 구멍들로 보아 원래는 가죽 끈으로 연결됐다.

 

월산리 M1-A호분의 투구는 세로는 길고 가로는 좁은 사다리꼴 철판들을 머리의 곡선에 따라 연결한 종장판주의 일종이다. 비늘갑옷은 길이 5cm, 폭 3cm 내외 철판인데, 원래대로라면 수백 장이 모여 하나의 갑옷을 이루었다. 목가리개는 착용자의 목을 보호하기 위한 비늘갑옷의 부속구이다.

 

가야에서는 원래 넓은 철판을 가죽이나 못으로 고정한 판갑옷이 유행했다. 5세기 이후 판갑옷을 대신하여 비늘갑옷이 주류를 차지했는데, 방어력이 훨씬 우수한 데다 신체를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가야에까지 파급된 고구려 군사 기술력이 있었다.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399년 가야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다. 광개토왕이 보낸 보병과 기병 5만이 임나가라에 도달했고, 그곳에서 안라인수병을 물리쳤다. 역사학계에서 임나가라와 안라인수병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가야와 고구려의 충돌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가야인들이 고구려군의 발달된 군사 기술력을 확인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이 사건 이후 금관가야를 대신해 소가야와 대가야 세력이 새롭게 부상했다. 또한, 기마전술을 염두에 둔 북방 계통의 철제 갑주가 가야 사회에 확산되기도 했다. 삼실총이나 쌍영총과 같은 고분 벽화에 남아있는 고구려 무사의 갑옷이 가야에서 재현될 수 있었던 이유다.

 

한편, 2010년 (재)전북문화재연구원이 추가 조사 중 M5호분에서 또 다른 모양의 철제 투구가 비늘갑옷과 함께 출토됐다. 이 투구의 정수리 부분에는 높고 폭이 좁은 관모가 있었다. 이같은 형태는 아직까지 거의 알려진 바가 없어 학술적으로도 큰 가치를 갖는다.

 

1500년 전 운봉고원을 호령했던 가야 무사의 특별한 유품들을 국립전주박물관(관장 곽동석)과 (재)전북문화재연구원(이사장 최완규)이 공동 기획한 특별전'운봉고원에 묻힌 가야 무사'(8월26까지 국립전주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만나볼 수 있다. /최경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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