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국가가 중요한 행사나 사업을 하면서 그 과정을 빠짐없이 기록해 행사가 끝난 뒤 결과를 정리하여 책으로 편찬했다. 이것을 '의궤'(儀軌)라고 한다. '의궤'에는 행사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과정, 담당 관청들 간에 주고 받은 문서, 참여하는 자들의 명단, 사용된 물품, 비용 등이 빠짐없이 기록해 조선시대 정치·사회·문화·경제 등 각 분야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의궤'는 '의식(儀式)'과 '궤범(軌範)', 두 단어가 합쳐진 말로 특히 궤범은 '어떠한 일을 판단하거나 행동하는데 본보기가 되는 규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종합 보고서의 기능을 가진 의궤가 왜 '본보기'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까. 의궤는 단순히 과정과 결과를 수록한 책의 기능에 멈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이후에 유사한 국가 행사나 사업이 있으면 이것을 시행하는데 참고자료가 되어 시행착오 없이 행사를 치르게 하는 하나의 모델로서 기능을 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궤를 통해 조선시대 체계적인 국가운영시스템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조선 왕실의 의궤는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렇다면 '외규장각'은 어떠한 역할을 하였을까. 조선 22대 왕 정조는 즉위한 해인 1776년 규장각을 정식 국가기관으로 발족하였다. 규장각은 왕들의 글과 글씨, 왕실 인장, 왕실 족보와 같은 중요한 자료를 보관하는 일종의 왕실도서관의 역할을 했다. 이후 정조는 1782년 강화도 행궁(行宮)에 규장각의 분관(分館)과 같은 성격을 띈 외규장각을 설치해 창덕궁에 있던 왕실 관련 자료를 옮겨 보관하도록 했다. 바로 이때 규장각에 보관되었던 왕이 보던 어람용(御覽用) 의궤(儀軌)가 강화도로 옮겨졌다. 그야말로 외규장각은 조선 왕실 문화의 보고(寶庫)였던 것이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외적의 접근이 어려운 곳이라고 판단되었던 강화도에 1866년 프랑스군이 침입하였다. 이른바 병인양요라 불리는 사건으로, 프랑스군은 조선군의 반격으로 퇴각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강화도 행궁을 비롯한 외규장각 건물이 소실되었다. 외규장각에 보관되었던 왕실 관련 자료들도 이때 대부분 재로 변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철종 연간 외규장각에는 7000여 권의 책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하니 이때 불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만,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에 있던 의궤를 골라 프랑스로 가져가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하였다. 이 의궤를 '외규장각 의궤'라고 하는 것이다.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외규장각 의궤는 중국 도서로 분류돼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는 또 한 번의 수난을 겪어야 했다. 1975년 재불학자인 박병선 박사에 의해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된 이후 정부와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총 297권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다른 나라에 있어야 했던 소중한 우리 문화재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왕이 보던 의궤가 선조들의 고향 전주에 찾아왔다. 25일까지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조선왕실의 위엄, 외규장각 의궤'에서 외규장각 의궤가 간직한 뜻 깊은 의미를 함께 나누어 보았으면 한다.
황지현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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