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수록 깊어지는 거장의 작품세계 / 눈높이 맞추면 영화가 즐겁다
훌륭한 교사가 그 자체로 좋은 교육과정이라면, 하네케의 필모그라피는 충성도 높은 지프광들에게 괜찮은 커리큘럼이다. 내면의 심연을 고찰하는 커리큘럼으로서 하네케는 사실 친절한 교사는 아니지만, 피할 길 없다.
하네케는 불편하다. 때론 비관적이다. 그는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증상을 깨우지만 도덕과 교훈으로 가르치려 들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제 지프에서 마주할 '성'과 '감독 미카엘 하네케'를 앞두고 예습이든 복습이든 시간표를 짜 본다. 이사벨 위페르의 도발을 보여준 '피아니스트'는 건너뛴다. 아래는 수준별 학습 커리큘럼.
△ 교양 필수 '아무르'= 하네케는 '아무르'를 통해 선수만 알던 감독에서 민간인들도 제법 아는 선생이 되었다. 그러니 영감님의 심연 혹은 미궁 탐색은 아무래도 '아무르'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 그에게 두번째 황금종려상을 안긴 만큼, 명불허전이다.
안락한 조명의 거실에서 프레스토 16분음표의 섬세함을 표현하던 제자의 연주에 기쁨을 표현하던 할매가 이상하다. 경동맥이 막히는 질병이 도둑처럼 찾아온 것. 노인은 존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병은 깊어진다. 미동 없는 하네케의 카메라는 상호의존적이지만 독립적 존재인 독한 할머니의 심지를 닮았다. 반복되던 암전이 아예 어둠일 때, 관객들은 자신의 미래를 생각한다.
영화는 묻는다. 평생 사랑한 아내가 갑자기 '변신'의 벌레가 되어있는 상황에서 사랑의 가치는 무엇인가고. 고독사가 사회문제인 지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지만 노인의 세계는 있을 텐데. 죽음에 대한 준비는 100세 실손보험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 스스로 알아서 노년존재에 대해 고민하라는 것.
△ 교양 선택 '하얀 리본'= 독일의 어느 작은 마을. 순수와 복종, 종교적 엄격함이 주는 불안하고 불쾌한 분위기를 다룬 '하얀 리본'에서 마을 아이들에게 닥쳐오는 끔찍한 폭행 뒤에는 공동체의 비밀이 도사리고 있다. 지역 토호인 남작의 권한 앞에 온 마을이 복종하고 아이들은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내세운 종교 앞에 순종하지만 사실 마을은 광기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침묵 속 아이의 눈을 도려낸 악마는 누구일까. 교사가 진실을 밝히려는 순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청년이 쏜 한 발의 총탄은 세계 제1차대전을 부르고 만다. 남작과 위선적 어른들의 폭력은 거대한 폭력 속에 묻히고 마는 것. 과연 우리는 아이들에게 하얀 리본을 매어주고 있지는 않은지.
△ 전공 선택 '퍼니게임' '히든' '일곱 번째 대륙' = '퍼니게임' 감상은 고문에 속한다. 하네케 자신의 1997년 작품을 2007년 새롭게 복제한 리메이크작. 해질녘, 클래식이 흐르는 별장에 찾아온 잘 생긴 이놈들은 주인장의 다리를 부러뜨리는데, 글쎄, 악마는 흰색을 입는가? 제3세계를 찾아온 유럽인들이 그들은 아니었을까 유추하기엔, 섬뜩하다. 나사를 조이듯 벌어지는 이 레미제라블에 관객은 무력감에 빠진다.
'히든'의 오프닝은 고정된 카메라다. 평화로운 중산층 주택가 화면에는 소리가 없다. 여기 갑자기 소리가 끼어들면서 화면이 리와인드된다. 조르쥬의 집에 자신들의 일상사를 찍은 비디오테이프와 섬뜩한 경고의 메시지가 담긴 그림이 배달되는데. 테잎은 파도가 모래성을 흔들어대듯 부부간의 신뢰를 조금씩 무너뜨린다. 40년 넘게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며 응급의 봉합으로 살아온 조르쥬의 평온한 삶은 사실 프랑스의 치부인 것. 그래, 조르쥬는 '정신 승리' 방법으로 기억을 감추고 조작하는 현대 지식인들의 상징일 터.
'일곱 번째 대륙'은 영감님의 데뷔작. 자동차 세차기 안 소음, 차고가 개폐되는 소리, 도트프린터가 뱉는 기계음, 식탁에서 저작하는 소리 등 이 영화는 소리 백화점이다.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 클로즈업으로 반복되면서 심하다 싶게 잘리는 암전의 시간들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효과를 지닌다.
△ 특강 혹은 과외 '성' = 궁금하다. 세 차례의 약혼을 모두 파국으로 끝낸, 보험국에서 일하다 폐결핵으로 죽은 남자 카프카. 그가 끝내 완성하지 못한 소설 '성'(城)을 영화화한 하네케의 '성'에서 그의 불확실성, 불안, 비이성은 어떻게 형상화될까? 하네케에 중독된 선수에게 오스트리아에서 두 달 전 개봉된 다큐는 아주 따끈따끈한 작품이 될 것이다.
둥글게 둥글게 손뼉을 치면서 환하게 웃으라고 매트릭스 운영자가 고함칠 때, 우리는 링가링가링 춤추는 시늉을 하며 극장에 간다. 왜? 하네케 커리큘럼을 마스터한 우리는, 이제 '선수'니까.
/영화평론가 신귀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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