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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64주년][민족의 얼 태권도, 세계 속의 태권도원] 1부 태권도 종주도 전북 ① 전북 태권도의 시작 - 1950년대 초 군산체육관서 시작…전주 지도관서 꽃 피워

군산서 김혁래 사범 미공군 장병 가르쳐 태권도 세계화 선도 / 전주엔 전일섭 관장 '실전적 겨루기' 강조 잦은 대회·기술 개발

▲ 1950년대에 치러졌던 태권도 겨루기 경기 모습

올해는 무주 태권도원이 문을 열었다. 이를 계기로 전북일보는 전북 태권도가 발전해온 역사와 전북 출신 사범들의 해외에서의 활약, 그리고 태권도원의 발전 방안을 모색하는 시리즈를 준비했다.

 

도장 중심으로 수련하는 태권도는 1940년대 말에서 50년대 초 사이에 시작됐다. 서울에서 먼저 문을 연 무도관들이 전북에 도장을 낸 것이 계기가 됐다. 그 이전에 태권도가 어떤 식으로 존재했었는지는 자료로 입증하기 어렵다. 일제 치하 36년 동안 무술단련은 상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술은 곧바로 독립운동의 전투력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이를 엄격히 금지했다.

 

지도관은 1950년 초에 군산을 통해 들어왔다(서울·인천과 같은 해인 1947년에 들어왔다는 주장도 있다). 군산이 도내에서 도장 중심 태권도 수련이 가장 이른 것은 사실인 듯하다. 서울에서 운동을 하던 군산 출신 김혁래 사범이 전일섭 사범(황해도 출생)과 함께 군산시 장미동 군산체육관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관원을 모아 운동을 시작했다. 전일섭 사범이 치안 담당으로 군산 세관에 발령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전일섭 사범은 윤쾌병 박사와 함께 중앙 지도관을 만든 전상섭씨(후에 월북)의 친동생이며, 김혁래 사범의 선배다. 초기에는 ‘전일섭 사범’, ‘김혁래 주장’으로 불렸다.

▲ 군산체육관 앞에서 찍힌 관원 단체사진. 맨 앞줄 왼쪽 두 번째가 김혁래 사범, 그 옆 모자를 들고 있는 이가 전일섭 사범.

군산체육관 건물은 원래 포목점을 하던 가게로, 2층 건물이었다. 1층에서는 역도를 했고, 2층에서는 태권도와 권투, 유도를 했다. 초기 관원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호구지책으로는 힘겨운 형편이었다. 그래도 태권도에 대한 애정 하나로 무도관을 이끌어 갈 수 있었다. 군산체육관에서는 당시 겨루기를 많이 하면서 격파, 품새(형)를 가르쳤다. 운동 선후배의 관계가 엄격해서 나이가 어리더라도 운동을 먼저 시작한 사람을 대접했다고 한다.

김혁래 사범은 태권도의 세계화에 대한 공로자이기도 하다. 전일섭 사범이 전주로 떠난 1950년대 중후반(또는 1952년)부터 군산 미공군기지에서 미군들을 대상으로 15년여 동안 태권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김혁래 사범은 젊은 나이(40대 중후반 또는 50대 초반)에 고혈압으로 쓰러져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미군부대 출근을 준비하며 찬물로 세수하다가 발생한 일이었다. 그 뒤 체육관과 미군부대 교육은 동생인 김혁종 관장(73·현 군산시태권도협회 고문)이 이어받았다. 김혁종 고문은 “형님(김혁래 사범)이 미군 부대에서 가르친 사람만도 수천명”이라며 “김혁래 사범에게 배운 독일 스포츠계의 한 저명인사가 있었는데, 몇 년 전에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런데 이분이 생전에 가족들에게 군산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고, 당시의 추억이 담긴 태권도 유품을 잘 간직해왔다. 유족들이 이를 알고 김혁래 사범 가족에게 유품을 전달해온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군산에서 4년여 동안 활동하던 전일섭 사범은 유수복 도의회 의원(전주)의 초빙을 받아 1954년(52년이라는 주장도 있음) 전주시 고사동에 새로운 도장을 차렸다. 당시까지만 해도 겨루기를 하더라도 실제로 사람을 때리지는 않고 때리는 시늉만 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지도관은 달랐다. 발차기, 정권치기 등 대타(겨루기)를 과감하게 했고, 그 해의 왕좌를 놓고 대회도 치렀다. 호신술도 많이 했다.

▲ 체육관 앞에서 관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전일섭 관장(앞쪽 양복 입은 인물).

1950년대 후반부터 서울에서는 일본에 거주하던 윤쾌병 박사의 주관으로 한·일전 겨루기 시합이 치러졌는데, 전북출신 선수가 한국 대표 선수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서울과 전주에서 격년으로 번갈아가며 대회가 치러지다가, 나중에는 아예 서울과 전주로 분리돼 별도의 대회를 치렀다. 이처럼 겨루기 대회가 잦다보니 기술개발이 활발하게 이뤄졌고, ‘한 방’으로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죽기살기식으로 운동을 했다.

 

창무관은 개성 출신으로 해병대를 제대한 설명희 사범에 의해 1950년 3월 익산의 이리극장 자리에 문을 열었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했으며, 통학생이 많은 지역의 특성으로 인해 중고생 수련생이 많았다. 지도관과 마찬가지로 실제 대련을 중시했으며, 호신술과 실질적인 기술을 많이 보급했다. 60년대 들어서는 고창과 줄포, 흥덕 신림 등 다른 지역에 지관을 두고 운동을 보급했다.

 

청도관은 병무청에 근무하던 현역 중사 박청금 사범이 1950년 전주병무청 창고에서 시작했다. 그 뒤 1955년에 이병무 사범이 경찰서 사범에 위촉된 뒤에는 남원, 김제, 정읍, 순창, 임실, 군산, 부완, 고창, 무주, 진안, 장수 등 도내 각 경찰서에 사범을 파견해 보급했다.

 

처음에는 군인과 경찰을 주요 대상으로 했으나, 나중에 민간인에게도 개방했다. 직장인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격렬하게 하지는 않았으며, 겨루기보다는 품새와 격파 등을 많이 다뤘다. 경찰의 날이나 도의 주요 행사 때 시범도 많이 했다.

 

오도관은 청도관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군부대를 중심으로 보급됐다. 전주에서는 현역 군인인 우종림 관장(현 예비역 소장)이 문을 열었고, 익산에서는 허용 관장이 이끌며 활성화시켰다. 군산은 문한종 관장이 맡았다.

 

무덕관은 철도청 직원인 오용균 관장이 1958년 익산역 내 목욕탕 내 빈공간에서 시작했다. 당시 열차는 석탄을 때는 증기기관차가 끌었기 때문에 역사마다 목욕탕이 있었다. 애초 철도청 직원들을 대상으로 했으나 58년 8월부터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됐다. 60년대 들어서는 삼례와 신태인, 김제 등의 역사에도 관을 열었고, 63년에는 도내에서 처음으로 익산역 앞에 50평 규모의 전용 체육관을 지었다. 품새와 자기방어식 대련 등을 많이 했다.

 

50~60년대 도장들은 공수도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초기에는 일본에 유학을 가서 공수도를 배워온 사람들이 주로 도장을 열었기 때문이다. 태권도 도장들은 관원을 모집하기 위해 전단지를 만들어 전신주 등에 붙이거나 극장 등을 빌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격파 등의 시범을 보이곤 했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전단지도 많이 부착하지는 못했다. 전북태권도계 원로인 문창균 씨(76)는 “전일섭 관장이 이끄는 지도관도 100장 넘게 전단지를 만들기는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도장 내 운동기구도 거의 없어서 역기나 단련봉, 샌드백 정도가 거의 전부였다. 역기는 시멘트를 활용해서 직접 제작하거나 철도 레일 등을 구해다 사용하기도 했다. 군산 화력발전소에 가서 쇳덩이를 구해와 아령 등을 만들어쓰기도 했다고 한다.

 

여름철에는 변산 등으로 극기훈련을 겸한 모서훈련을 갔으며, 여기서는 특강과 호신술, 수중훈련 등이 이뤄졌다. 겨울철에는 줄을 맞춰 시내를 달리는 등 모한운동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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