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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얼 태권도, 세계속의 태권도원] 1부 태권도 종주도 전북- ② 스포츠화 시작

화려한 발기술 경기화 주도…'대나무 호구' 첫 개발 / 다른지역 때리는 시늉 '끊어치기' 일반적 / 전북은 실제 타격 중시 태권도 기술 앞서가 / 경기규칙·용어 등 전국체전 정식종목 선도

▲ 한국에서 최초로 호구(단일호구)를 착용한 시합. 1961년 5월 12일 일본 대 한국(전주팀)간 친선대회.

전북의 태권도 역사는 우리나라의 태권도 역사이다. 오늘날과 같은 스포츠화 된 태권도가 전북에서 가장 먼저 시작됐기 때문이다. 전북에서 개발된 태권도 기술이 곧 우리나라의 기술이 됐고, 전북에서 적용된 경기규칙이 우리나라 경기규칙의 한 부분이 됐다.

 

전북의 태권도가 경기화(스포츠화)를 선도하게 된 것은 전일섭 관장이 이끄는 지도관이 전주에 자리를 잡은 뒤 다양한 종류의 대회가 자주 열렸기 때문이다. 한·일 교류전 등은 물론 지역내 대회도 적지 않았다. 특히 전주와 군산지역 지도관끼리의 겨루기는 지역의 자존심을 건 치열한 양상을 띠었고,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전주-군산-익산 간 대회로 발전했다.

 

군산시태권도협회 김혁종 고문은 “군산과 전주의 시합이 있을 때면 일주일 전부터 잠을 못 잤다. 전주에서 대회가 열릴 때 전주가 이기면 뒤탈이 없는데, 군산이 이기기라도 하면 버스터미널까지 쫓아 와서 버스를 못 타게 하고 텃세를 부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추억거리다”고 회고했다.

 

체육관별로도 연 2~3차례씩 대회가 열렸으며, 그해의 왕중왕을 뽑는 대회도 있었다. 지도관의 경우에는 전주 본관에서 분관이 분리돼 나가면서 도장별 경쟁의식을 부추기기도 했다(전북뿐만 아니라 서울, 강원, 부산 등의 지도관에서도 운동을 심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운동했던 곳은 전북이며, 지도관은 전북에서 꽃을 피웠다).

▲ 제44회 전국체전 당시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태권도 경기에서 호구를 착용한 모습.1963년 10월(전주고등학교 후정).

전북의 태권도 겨루기는 다른 지역과는 차이가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다른 지역의 태권도에서는 실전 타격이 금지돼 있었다. 때리는 시늉만하고 주먹이나 발이 상대의 몸에 닿기 직전에 멈추는 것(유형환 도태권도협회 회장은 이를 ‘끊어치기’라고 표현했다)이 일반적인 겨루기 방식이었다. 그러나 우리지역에서는 실제 타격으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겨루기가 일반적이었으며, 누적된 타격보다는 단 한방으로 상대를 이길수록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생체연구를 바탕으로 한 일발필살기가 개발되기 시작됐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강도 높은 단련이 뒤따랐다. 유단자와 수련생이 마주보고 횡렬로 서서 상대방을 계속해서 바꿔가면서 하는 겨루기도 하나의 훈련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문창균 원로는 “당시에는 상대를 바꿔가면서 훈련하는데 하루에 한명씩 KO시켜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렇지 않으면 운동을 한 것 같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전북태권도협회 황영택 고문은 “박연희 선수는 양쪽에 철봉으로 기둥을 만들고 가운데를 스프링으로 연결한 기구를 만들어서 수도를 단련했다. 스프링의 강력한 탄력을 이용한 훈련이었는데, 나중에 TBC 방송에 출연해서 차돌을 깨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 같은 선수가 나오게 된 것은 우리지역의 태권도가 그 만큼 적극적인 운동이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 1964년도 제45회 전국체전에서 3단 구분 호구를 착용한 경기.

겨루기 대회가 계속되면서 발기술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발을 이용한 공격의 파괴력이 주먹에 비해 4배가량이나 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점선의 돌려차기, 박연희의 양발 앞차기(일명 따발총 공격), 유형환의 앞차기 등이 이때 나왔다.

 

당시까지만 해도 다른 지역의 발기술은 옆차기와 뛰어차기 수준이었다. 그러나 전북의 기술은 이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상대가 옆차기로 공격하면 돌려차기와 뒤차기로 허를 찔렀다. 또 상대가 뛰어차기를 하면 메치기 기술로 발을 걸어서 쓰러뜨렸다(당시에는 이런 기술이 허용됐고 점수도 부여됐으나 다른 지역선수들은 거의 사용하지 못했다). 상대방은 균형을 잃고 바닥에 내팽겨쳐지기 일쑤였으며, 기가 질려서 더 이상 경기를 계속할 의욕을 잃곤 했다는 게 유형환 회장의 회고다.

 

겨루기 대회를 하다보면 일정한 규칙과 제한이 필요하고, 약속된 용어의 사용이 불가피했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이 오고 상호간의 불신과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전북의 태권도인들은 일찍부터 수신호와 용어 등을 만들어서 사용했고, 이는 초기 우리나라 태권도 경기규칙의 일부가 됐다.

1961년 대한태권도협회가 창설되고 1963년 대한체육회 가맹단체로 가입하면서 그해 10월 전주에서 열린 제44회 전국체전에서 태권도가 처음으로 공식경기로 치러졌다. 이에 앞서 62년 대구 체전에서는 전북과 대구 선수들이 시범경기로 태권도를 겨뤘으며, 이때의 경기규칙 등은 전북의 것을 참고하고 반영했다. 전국체전 정식종목화를 전북이 주도했고, 전북에서 사용하던 수신호와 용어 등을 거의 그대로 사용했다.

▲ 제46회 전국체전 당시 호구(3단 구분)를 착용하고 경기를 치른 모습. 1965년 10월 4일~10일.

전국체전은 또한 호구의 개발을 촉진했다. 사실 호구의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었다. 워낙 격렬하고 과격한 운동이다 보니 그만큼 부상 등 불상사의 위험이 높았다.

 

처음 사용된 호구는 일본에서 검도용이었다(유병룡 원로는 우리나라 선수들이 한일친선경기를 위해 일본에 갔다가 가져왔다고 증언했고, 문창균 원로는 59년에 일본팀이 가져왔다고 기억하고 있다) 태권도에는 잘 맞지 않았다. 검도 호구를 차면 움직임이 둔하여 태권도의 빠른 동작을 할 수 없었다. 또 검도 호구는 칼날을 막기 위한 것으로 너무 단단하게 만들어져 자칫하면 손이나 발가락이 부서지기도 했다.

 

그래서 태권도에 알맞은 호구의 개발이 필요했는데, 많은 고민과 연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대나무 호구였다. 전일섭 관장과 유병용 사범 등이 적극적으로 나섰고, 전일섭 관장의 부인이 바느질을 했다. 신문지로 본을 떠서 입어보고 만들었는데 애초에는 뒷부분이 없이 옆구리까지만 가렸다. 대나무를 쪼개서 세로로 배열하고 솜으로 감싼 뒤 베를 대고 누볐다. 이처럼 만들어진 호구는 대한태권도협회의 승인을 받아 62년 대구체전 시범경기 때 처음으로 사용된 뒤, 63년 전주체전부터 본격적으로 활용됐다.

 

애초에는 위-아래 2단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위험성을 깨닫게 됐다. 대나무가 부러지면서 헝겊을 뚫고 삐져나와 손을 다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특히 2단 호구는 중간에 접혀지는 곳이 명치 부근이어서 자칫하면 장기가 다치는 등 큰 불상사의 위험도 있었다. 따라서 나중에는 2단의 호구를 3단으로 개조했고, 그러다보니 활동성도 훨씬 좋아졌다. 호구에는 페인트로 색깔을 칠했는데, 홈팀은 청색, 원정팀은 빨강색이었다. 전북도태권도협회는 우리나라 호구를 처음 개발한 지역답게 전자호구 도입도 빠르다. 2009년 전자호구가 국제대회에 처음 등장하자 지역에서는 드물게 곧바로 이를 마련해 이듬해부터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전북의 태권도는 우리나라 초창기 스포츠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그 중심에는 전일섭 관장이 있었다. 김혁래 관장이 군산지역 태권도의 대부라고 한다면, 전일섭 관장은 전북도를 넘어 초창기 우리나라 태권도를 이끈 대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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