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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얼 태권도, 세계속의 태권도원] 1부 태권도 종주도 전북-③전북을 빛낸 선수들

장점동 '날아서 양발차기' 상대선수 '기겁' / 문창균, 뛰어넘어 옆차기시범 탄성 절로 / '따발총 기술' 박연희, 日 코치 매료 / 최영렬, 경희대에 태권도 학과 최초 개설 / '장신' 최권열, 긴 다리로 가슴 공격 탁월

▲ 1966년 경희대에 진학한 전북출신 선수들이 대통령기 단체전에서 3연패라는 금자탑을 세운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영렬, 유기대, 다섯번째 유형환 선수.

우리지역에서는 태권도의 겨루기(대타)를 중시함에 따라 일찍부터 여러 가지 종류의 대회가 많았다.

 

특히 지도관에서는 전주와 군산 지역간 교환경기가 활발했다. 김혁래 관장도 직접 대회에 참가했으며, 김 관장은 팔 전체 부위를 단련한 방어 기술이 뛰어나 상대가 공격을 하다가 지칠 정도였다고 한다.

 

1956년에는 서울 창경원에서 서울과 전북팀이 겨루기를 했는데, 전북팀은 전주역에서 밤 10시에 기차를 타고 10시간 걸려서 서울에 도착한 뒤 경기를 치르고 당일에 내려오는 스케줄이었다. 이처럼 피곤한 상황에서도 전북팀은 오히려 서울팀보다도 우수해 이 대회를 통해 김혁래, 장점동, 최동진, 이승완 등이 중앙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장점동의 주특기는 점프하여 양발차기로 요즘 프로스포츠 K1에서 일부 선수가 사용할 정도의 고난도 기술이었으며 투지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최동진은 작은 체구지만 힘과 펀치력에서는 매우 파괴력이 있었고 겨루기 기술도 다양했다고 전해진다. 전주상고와 전북대를 졸업하고 해병대에서 선수생활을 했으며, 안기부 감찰실에 근무했다. 전주고 주장 출신 이승완은 1962년 전북인 최초로 4단을 받았으며, 전북종합체육관 사범을 맡아 63년 전주에서 열린 제44회 전국체전에서 전주고가 우승하는데 기여했다.

 

1961년 5월에는 전주공설운동장에서 도내에서는 처음으로 한일 격투기 경기가 열렸으며, 이는 뒷날 한일전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대회에는 한일 양쪽에서 20명씩 참가했는데, 겨루기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연무시범도 있었다. 이때 문창균은 여러 사람을 나란히 엎드리게 하고 그 위로 뛰어넘어 옆차기 시범을 보여줬는데, 일본인들이 이를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한다. 문창균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전주상고 3학년때부터 도장에 나갔으며 전북대 법대 58학번이다.

 

이 당시 우리지역의 태권도는 전북을 단일팀으로 하고 전북을 제외한 우리나라 전체를 상대팀으로 하더라도 결코 밀리지 않을 만큼의 우수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는 63년과 66년에 일본에서 열린 한일전에 파견하는 우리나라 대표선수 선발 결과만을 봐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 1961년 5월 전주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한일 격투기 경기. 이는 뒷날 한일전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63년에는 일본 동경에서 열린 일본권법회와의 한일전에 참가할 한국 대표팀 10명을 처음으로 뽑았는데, 주장인 이승완(전 국기원 원장)과 이문성, 황대진, 최영렬, 안대섭, 조점선 등 전북출신이 6명을 차지하고 있다. 이중 이문성과 황대진은 대표선수로 선발되긴 했지만 병역문제로 인해 실제로 일본땅을 밟지는 못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병역을 필하지 않은 남성이 해외에 나가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전해지는데, 자신의 아들이 일본에 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황대진 선수의 아버지가 부랴부랴 서울에 찾아왔다. 이승완 주장 등과 함께 다방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처음으로 커피를 마시게 됐다. 한 사발을 쭉 들이킨 황대진 선수의 아버지는 다방 종업원을 부르더니 “이봐, 여기 서너 사발씩 더 갖다드려”하고 말했다고 한다. 시골에서 마시던 막걸리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66년 제2차 국가대표 선발전은 지금의 선발전처럼 엄격한 체계를 갖춰 진행됐다. 국가대표 1, 2차 선발전을 통과한 선수와 그해 최우수 선발전 우승자가 최종전에서 맞붙어 각 체급별 대표를 선발했다. 모두 14명의 대표를 뽑았는데, 박동근, 최동진, 박연희, 유기대, 유형환, 최동진 등 6명이 전북출신이었다. 박연희는 이 경기에서 일명 따발총으로 불리는 화려한 앞차기 기술로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여 곧바로 일본 코치로 초청을 받았다. 동아일보 66년 12월 28일자 4면에는 한국 원정팀이 일본 관서대팀을 7-5로 이겼다는 소식과 함께 이긴 선수들의 이름이 올라있는데, 이들 7명중 4명이 전북 출신이다(박동근, 박연희, 안대섭, 유형환).

 

이에앞서 1964년에는 전일섭 관장과 유병룡 사범의 제자인 최영렬(전 경희대 학장), 유기대(전 전북태권도협회 회장) 등이 경희대에 진학하여 당시 우리나라 체육의 산실인 한국체육관 태권도부에서 운동했다. 또 66년에는 유형환과 최권열 등이 경희대에 진학하여 선배들과 합류하면서 경희대가 대통령기 단체전에서 3연패라는 금자탑을 쌓게 됐다.

 

김제 만경중학교 출신의 최영렬은 고등학교때 태권도에 입문했으나 열심히 노력해서 빠른 성장을 보였다. 1965년에는 전국체전 스타플레이어로 중앙일보에 소개됐고, 66년부터 70년까지는 대통령배 전승이라는 대기록을 남겼다. 그는 또 1983년에 최초로 경희대학교에 태권도학과를 개설하여 학과장을 맡게 되는 등 후진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오늘날 경희대 태권도의 명성은 이처럼 전북출신들이 그 길을 트고 기반을 다졌다고 할 수 있다.

 

최권열은 김제 진봉 출신으로 키 183㎝의 장신이었다. 긴 다리를 이용해 발바닥과 뒤꿈치로 상대의 가슴 부위를 주로 공격하는 무적의 선수였으며, 서울에서 교장으로 퇴임했다.

 

경희대 출신의 유기대, 유형환, 최권열, 최동진 등은 그 뒤 해병대에 입대해 대통령배 대회 5연패의 신화를 이루었으며, 이때 해병대의 초대 코치를 맡았던 사람이 바로 전북인 이승완이었다.

 

이처럼 초창기 전북출신 선수들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됨에 따라 후배들인 이상철, 이형노, 양동철, 박연환(박연희의 동생) 등이 서울 소재 우석대(현 고려대)에 진학해 막강 전북태권도의 전통을 빛내게 되었다.

 

이 같은 선배들의 화려한 전통은 그 뒤에도 면면히 이어져 태권도가 시범경기로 치러졌던 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임실 오수 출신 김종석이 헤비급에서 은메달을, 94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12회 아시안게임에서는 진승태(플라이급. 한국체대)와 정광채(웰터급, 한국체대)가 각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98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13회 아시안게임에서는 남자 72kg급의 김병욱과 67kg급의 감남원, 여자 59kg급의 이지은이 각각 금메달을 따냈다. 김종석은 87년 전국체전 미들급에서 금메달을 획득, 전북체육회가 선정한 우수선수에 뽑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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