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전주 전국체전 때 정식 종목…'금빛 발차기' 이어져
60년대 학교 체육으로 퍼지기 시작
최권열 5년·양동철 등 3년 연속 우승
조현호 4번·조점선 최동진 등 3번'金'
70년대 우수 선수·지도자 역외유출
90년대 중반부터 여자부도 금메달
2000년대에도 유망주 꾸준히 나와
1963년 전주에서 열린 전국체전부터 태권도가 전국체전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태권도가 도장 중심에서 점차 학교체육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물론 초기에는 학교에 전문적인 지도를 두고 가르친 것은 아니며, 체육관의 지도사범이 관원들 중에서 자의적으로 학교별 팀을 만들어 각종 대회에 출전했다. 또 일부학교에서는 태권도에 관심있는 교사들의 주도로 체육관의 사범들이 학교에 파견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특히 김제 만경고는 1966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학교체육 정규시간에 태권도를 가르쳐 많은 훌륭한 선수들을 배출하게 됐다.
전국체전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적을 남긴 사람은 전국체전 5년 연속 금메달리스트인 최권열(68)이다.
최권열은 만경 출신으로 지도관에서 운동을 했는데, 65년 광주에서 열린 46회 대회에 고교생으로 출전해 라이트급 우승을 차지한데 이어 66년년부터 69년까지는 미들급 우승을 차지했다. 이러한 동일체급 연속 우승은 전국체전 역사에서도 극히 찾아보기 힘든 경우로, 최권열은 69년에 전북도체육회가 선정한 최우수 선수상을 받았다.
전일섭 관장의 전북종합체육관 1기생들인 문창균, 조점선, 최동진 등도 전국체전을 빛냈다. 옆차기가 주특기인 문창균은 63년 전주에서 열린 44회 대회에서 전북대팀의 우승을 이끈데 이어 이듬해 45회 인천체전에서 라이트급 우승에 올랐다.
또 양발차기의 달인 조점선은 전주체전 일반부에서 금메달을 따낸데 이어 45회 인천체전과 46회 광주체전에서 미들급 금메달을 추가했다. “미들급인데도 마치 플라이급처럼 날렵했다”는게 조점선에 대한 문창균 원로의 회고이다. 경찰에 투신해 30대때까지 각종 대회에 출전했다.
최동진은 44회 전국체전에서 전북대 우승에 이어 45회 인천체전과 46회 광주체전, 48회 서울체전에 플라이급으로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47회 체전에서는 플라이급 3위를 했다.
63년 전주 체전에서 고산중팀으로 금메달을 목에 건 유형환은 전주공고에 진학한 뒤 46회와 47회 체전에서 고등부 밴텀급으로 우승했으며, 48회와 49회 체전에서는 일반부로 출전해 동메달과 은메달을 추가했다.
유형환과 함께 고산중 팀으로 전국체전 금메달리스트인 이형노는 고등부로 출전한 48회와 일반부로 출전한 49회, 50회 체전에서 페더급 금메달을 추가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운동을 시작한 장수 출신 미들급 임재봉은 46회 체전 은메달에 이어 48회 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익산 창무관 출신의 조현호(70)는 44회 전주체전 일반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데 이어 45회와 47회, 49회 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냈고, 48회 체전에서는 은메달을 획득했다.
양동철은 68년 서울에서 열린 49회 대회에서 고기부 밴텀금 금메달을 따낸데 이어 50회와 51회 대회에서 플라이급 금메달을 추가했다.
무덕관 출신의 안영빈은 50회와 52회 대회에서 페더급 금메달을 따냈고, 김제농고를 졸업한 라종열은 51회 대회 라이트급 은메달에 이어 52회와 56회 대회에서 라이트급 금메달을 따냈다.
69년 11월 24일자 경향신문은 69년도 태권도 우수선수 16명을 선발한 기사를 싣고 있는데, 그 이름 중에는 양동철과 이형노, 손주몽 등 전북출신이 포함돼 있다. 손주몽은 73년 부산에서 열린 54회 전국체전 고기부 플라이급 우승자이다.
헤비급 서동현은 71년과 72년(52~53회)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낸데 이어 이듬해에는 동메달을 추가했다.
70년대 중반 들어서는 우리지역 우수 선수와 지도자의 역외유출이 가속화되고 있는 가운데 75년 대구에서 열린 56회 전국체전에서 선수 빼돌리기 사건이 발생했다. 일반 중기부 페더급 결승에 진출한 전영인이 결승전을 앞두고 갑자기 잠적해 기권패했는데, 이는 전영인이 소속된 인천체전(인천체육전문대)의 학장이 전영인의 출전을 막았기 때문이었다(당시 전북은 종합 3위를 놓고 경기도와 막판까지 치열한 접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인천체전이 경기도에 소재하고 있었다). 도민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사회문제화되자 백인엽 인천체전 이사장이 전주로 찾아와 사과하고 학장의 사표를 받기에 이르렀지만, 전국체전에서 지역간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재근은 78년 인천에서 열린 59회 체전에서 고등부 페더급 은메달을 따내더니 60회와 61회 대회에서는 미들급에서 금메달을 추가했다.
82년 경남에서 열린 63회 대회에서는 일반부 페더급에 출전한 고봉수(현 전북태권도협회 전무이사)만이 유일하게 금메달을 따냈으며, 고봉수는 이듬해 인천체전에서 라이트급에 출전해 금메달을 획득했다.
63회와 64회 고등부에서 은메달을 따냈던 최상진은 69회 웰터급에서 금메달, 72회 대학부에서 은메달, 73회 대회에서 동메달을 따냈다.
권기문은 83년 인천에서 열린 64회 대회 대학부 밴텀급 금메달과 67회 대회 페더급 은메달, 69회 대회 밴텀금 은메달을 따냈으며, 김종석(원광대)은 64회와 66회, 68회 대회 금메달과 67회 대회 은메달을 따냈다.
64회와 66회 대회에서 고등부 동메달을 딴 함준은 69회와 73회 대회 은메달, 75회 대회 동메달, 76회 대회 금메달을 추가했다.
윤철은 69회 대회 금메달, 71회 대회 은메달, 72회 대회 동메달을 땄고, 70회 대회 고등부 페더급에서 동메달을 딴 정을진은 91년 전북에서 열린 72회 체전에서 대학부 페더급 금메달과 74회 대회 금메달, 75회 대회 은메달, 77회 대회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90년대 중반부터는 여자부 태권도에서도 메달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보인(경희대)은 95년 경북에서 열린 75회 대회에서 여자일반부 핀급 금메달, 77회 대회에서 플라이급 금메달을 따냈다. 이지은(경희대)은 78회와 79회 여자 일반부 밴텀급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국현진(고창여고)은 79회 여고부 밴텀급과 80회 여고부 플라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유망주들이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이승용은 전북체고 학생때인 2001년 82회 대회에서 남고부 플라이급 우승을 차지한 뒤 경희대에 진학해 85회 체전에서 밴텀금, 그리고 89회 대회에서는 육군체육부대 소속으로 라이트급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또 전북체고의 박민우는 84회와 85회 체전에서 미들급 우승을 차지했고, 김진경(전북체고)은 84회와 86회 대회에서 여자부 미들급 우승을 품에 안았다. 또 류근무는 84회와 85회 남자일반부 헤비급 우승에 올랐고, 이리고생인 김배훈은 88회 대회에서 페더급 우승에 이어 경희대에 진학한 뒤 90회와 92회 대회 남자대학부 우승을 차지했다. 완산여고 장희영은 92, 93회 우승을 차지했고, 신동윤은 전북체고 학생으로 92, 93, 94회 전국체전 3관왕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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