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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얼 태권도, 세계속의 태권도원] 1부 태권도 종주도 전북-⑥1970년대 침체기

새 일자리 찾아 지도자·학생들, 脫 전북 잇따라 / 74년 대통령기 전국대항경기선 입상 조차 못해 / 각종대회 잇단 패배…서울에 주도권 넘겨 씁쓸

▲ 1970년대 이후 본격적인 경쟁체제에서 전북 태권도가 전국 일선학교의 태권도 보급으로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전국대회에서 위상을 떨쳤던 전북 태권도는 1974년 대통령기 제9회 전국단체대항경기에서 입상팀을 단 한팀도 못내는 등 내리막 길을 걸었다.

태권도는 1970년대 들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극한 관심 속에 고속도의 발전을 맞는다. 대태협과 국제태권도연맹, 국기원이 잇따라 만들어지고, 해외사범 파견 등 태권도의 세계화 활동도 활발하게 이뤄진다. 태권도를 가르치는 학교가 급속히 늘어나고, 대통령배를 비롯한 각종 국내외 대회도 활발하게 펼쳐졌다.

 

그러나 이 시기 정부의 고도성장 정책이 전북도에게는 상대적인 침체와 낙후를 가져왔듯이, 우리나라 태권도의 전반적인 발전은 반대로 전북 태권도의 침체기의 시작을 의미했다.

 

한 때 전국에서 다섯 번째, 여섯 번째에 들던 전북의 인구가 계속 줄고 경제는 타 지역에 비해 뒷걸음질을 계속하다보니 전북의 태권도, 더 나아가 전북의 체육이 전반적으로 고전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대한태권도협회가 70년대부터 계간지 형태로 발행해온 ‘태권도’지를 보면 70년대에 태권도가 얼마나 급속하게 성장했는지 알 수 있다. 매 회마다 각종 대회소식과 함께 ‘세계로 뻗어가는 한국의 태권도’, ‘학교 순례’, ‘나의 수련기’ 등을 담고 있다.

 

소년체전, 전국체전, 중고연맹회장기 등의 전국대회뿐만 아니라, 서울을 시작으로 각 지역마다 크고 작은 태권도대회가 잇따라 생겨나 담을 소식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각종 대회가 활성화될 수 있었던 것은 일선학교의 태권도 보급이 그만큼 활성화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1966년에 김제 만경고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학교체육 정규시간에 태권도를 가르치기 시작하자 서울, 경기 등 타지역의 학교들도 잇따라 태권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70년대 초반부터는 수도권의 많은 학교들이 태권도를 시작했다.

 

60년대말부터 정부가 활발하게 추진해온 해외사범 파견의 결과도 각종 국제대회의 개최로 이어졌다. 74년 서울에서 제1회 아시아태권도선수권대회가 열린데 이어 76년에는 호주 맬버른에서 제2회 아시아태권도선수권대회와 스페인 바로셀로나에서 제1회 유럽선수권대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처럼 국내외적으로 태권도가 활성화됨에 따라 전북의 태권도는 상대적인 낙후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전북에서 활약했던 많은 선수들이 지도자로 변신해 일자리를 찾아 해외와 국내 타 지역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전북의 지도자가 가르친 학생이나 전북출신 학생들이 다른 지역의 선수로 뛰는 기회가 많아짐에 따라 전국적인 평준화가 이뤄졌다.

 

74년 열린 대통령기 제9회 전국단체대항 경기에 대한 ‘태권도’지의 기사에는 “경기는 처음부터 결승전까지 우열을 가릴 수 없어 전국적으로 실력의 평준화가 꾀해졌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날 벌어진 결승전 일반부 8체급은 (…) 묘기의 연속이었는데 연장전 빅승(비김)이 세 게임이나 되었다”고 나와있다.

 

이대회에서 고등부 우승은 서울체고, 일반부 우승과 준우승은 경기 B팀과 경기A팀이 각각 차지했는데, 전북에서는 입상팀이 없었다. 태권도도 이제는 서울과 경기 등 수도권으로 주도권이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기할 점은 서울체고가 팀을 만든지 불과 1년만에 이 대회에서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로 고등부 우승을 차지했다는데 있었는데, 서울체고를 이끈 사람이 바로 전북출신 오주열 사범이었다. 오주열 사범은 61년에 전북과 서울팀의 겨루기에도 참가했던 태권도 1세대로 한양대 체육대를 졸업하고 교사로 변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체육고둥학교에 태권도부를 만들어 코치겸 감독 역할을 했다. 서울체고가 대통령기 대회에서 센세이셔널을 일으킴에 따라 다른 시도 지역의 체육고등학교에도 잇따라 태권도부가 생겨나게 됐다고 한다. 오 사범은 브라질을 거쳐 87년 미국 마이애미에 정착했다.

 

그러면 1970년대 중반 이후 전북 태권도는 어떠했는가? 71년과 72년 서울에서 열린 전국체전 종합우승으로 정점을 찍은 뒤 73년 6위, 76년 7위, 77년와 79년 9위, 80년과 81년 8위 등으로 내려앉았다.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전국이 11개 시·도로 나뉘었던 시절이었다. 70년대 중반까지 선두권을 거의 놓치지 않았던 전북의 태권도가 7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중위권도 유지하지 못하고 거의 바닥권까지 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전북의 태권도는 이후에도 부침을 계속하고 있지만, 예전의 영광을 되찾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다. 한때 270만명에 이르렀던 전북의 인구가 180만명으로 줄고, 전북의 경제력은 최하위권이다. 인구와 경제력이 떨어지면 좋은 선수와 지도자가 나오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도 전북의 태권도가 최하위권까지 추락하지 않고 그나마 버티는 것은 일선 지도자들의 열성적인 노력 덕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태권도 종주도로서 태권도원을 유치한 전북으로서는 현재의 위치에 만족할 수 없다. 화려했던 옛날은 아니더라도 자존심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발전의 전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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