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 1924년 교화 목적 건립 / 원불교 상징 '일원상' 진리 선포 / 공동체 생활·교육 자선 중심지
익산시 신룡동 49만6000여㎡에 자리잡은 ‘원불교 중앙총부’는 원불교 교도들의 신앙의 중심지다.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1891∼1943)가 이곳에서 원불교를 정식 교단으로 선포했고, 원불교 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따라서 원불교에서는 중앙총부를 대종사가 깨우친 가르침을 전하는 ‘전법성지(傳法聖地)’로 여긴다.
△ 교통, 장소 편리한 곳에 총부 건립= 원불교가 익산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24년부터다. 부안 변산에서 원불교 교리 기초를 마련하고, 교화를 위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당시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현 익산시 신룡동)에 총부를 건설하기로 했다. 초기 교도들은 “교통과 장소가 편리한 곳을 택해 모든 사람의 앞길을 널리 열어주심이 시대의 급선무”라며 대종사에게 기지 마련을 요청했고, 답사 후 총부기지로 결정했다.
대종사는 1924년 6월 익산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라는 임시 교명(敎名)이름으로 교단을 세우고, 총부 건설과 교화활동을 벌였다.
총부는 1925년 9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3개월 후 목조초가 2개동 17간을 완공했다. 지금의 본원실(本源室)과 세탁부인데, 당시에는 회관과 엿을 곱는 엿집으로 사용됐다. 총부를 건설하면서 출가한 교도들인 전무(專務, 원불교 성직자)출신들의 공동체생활이 시작됐다. 엿 장사와 땅을 빌려 소작하고, 고무공장에서 일을 하며 생계와 공부 비용을 마련하고 밤에는 불법을 공부했다. 주경야독의 공동체생활을 통한 수행이 이뤄진 것이다.
△ 인재양성 ‘유일학림’ 설립=대종사는 1943년 열반에 들기까지 19년 동안 총부에서 교단의 기틀을 마련했다. 제자훈련과 교역자 양성 등 교화와 교단의 경제적 기반을 다졌다.
원불교 신앙의 상징인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도 이곳에서 선포했다. 원불교 교전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불교정전도 총부에서 간행됐다. 불교정전에는 대종사의 수행과 깨달음이 담겨있다.
원불교는 대종사 열반 후 교육부문을 강화했다. 1946년 총부에 인재양성을 위한 유일학림을 설립했다. 유일학림은 중등부와 전문부 과정으로 편제됐는데, 중등부는 원광중학교로, 전문부는 원광대학교로 발전했다.
‘원불교’라는 교명은 2대 지도자인 정산 송규 종사(1900∼1962)에 의해 1947년 선포됐다. 이후 교헌과 교단 조직의 틀도 마련했으며, 교화와 교육·자선 등 원불교 3대 사업의 방향도 정하는 등 새로운 종교로서의 위상을 확립했다.
△ 대각전 등 근대문화유산 문화재 지정=현재 원불교 익산총부에는 1920년대 총부가 건설될 당시 초기 교단의 모습이 ‘보존구역’으로 남아있다. 최초로 지어진 본원실과 세탁부, 대종사가 거처했던 금강원과 종법실, 교역자 양성소였던 공회당, 이리경찰서가 원불교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주재소를 설치했던 청하원, 일원상을 최초로 봉안했던 대각전 등이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대각전과 청하원, 구정원, 정신원, 본원실, 금강원, 종법실, 공회당과 대종사 성탑과 성비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원불교는 1983년 개교 반백년기념사업 일환으로 총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시설을 보강했다. 역대 지도자의 위패를 모신 영모전과 원불교 역사박물관을 건립했으며, 정산 종사 성탑도 봉안하는 등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익산총부는 원불교가 새로운 종교로서 기틀을 닦고 위상을 정립한 곳으로서 의미를 지니기도 하지만 원불교의 오늘을 가늠할 수 있는 곳이다. 교단을 주재라는 종법사가 거처하며 교단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으며, 최고 의결기구인 수위단회와 집행기관인 교정원, 감찰기관인 감찰원 등 원불교 교화와 행정 교육 문화 언론 복지산업의 중심기관이 자리하고 있는 원불교의 중심지이다.
● [소태산 대종사의 9인 제자] 원불교 창립, 교단 기틀 마련
죽음을 눈 앞에 둔 사람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눈빛들이었다. 결연한 의지가 사방의 공기를 순간 일렁이게 만들었다. 무릎을 꿇고 앉은 아홉명의 제자 앞에는 그 시절에 보기 힘든 회중시계와 날이 바짝 선 단도가 각각 놓여 있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한지를 꺼내 ‘사무여한(死無餘恨, 죽어도 여한이 없다)’이라는 글자를 쓰고 제자들에게 백지장(白指章, 인주나 물감이 없이 찍는 행위만 하는 손도장)을 찍게 하고는 마지막 심고(마음으로 고하는 일)를 드리게 하였다. 이제 각자의 기도 장소로 가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자결하는 일만 남았다.
방언공사(간척사업)가 끝났을 때 9인 제자는 들뜬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막일을 해 본적도 없었던 그들이 바다를 논으로 만든다고 했을 때 아무도 믿지 않았고 오히려 조롱을 당해왔던 터였다. 그들 스스로도 마음속으로 정말 가능한 일일까라는 의문마저 드는 일이었다. 수 많은 역경과 고난이 있었지만 결국 해 내고 만 것이었다. 들뜬 기분이 가라앉기도 전에 대종사는 9인 제자를 불러 모았다.
“지금 물질문명은 그 세력이 날로 융성하고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의 정신은 날로 쇠약하여 장차 창생의 도탄이 한이 없을지니 세상을 구할 뜻을 가진 우리로서 어찌 범연히 생각하고 있으리요. 그대들은 이때를 당하여 전일한 마음과 지극한 정성으로 모든 사람의 정신이 물질에 끌리지 아니하고 물질을 선용하는 사람이 되어주기를 천지에 기도하여 천의를 감동시켜 볼지어다.”
그렇게 기도는 시작되었다. 중앙봉과 그 주변의 여덟 봉우리에서 각자 같은 시간에 기도를 시작하고 끝냈다. 3개월쯤 지났을 때 대종사는 제자들에게 아직 기도에 사념이 남아있음을 지적하고 죽음으로써 천의를 감동시킬 것을 말씀하였고 제자들은 쾌히 응하였다. 제자들은 몸이 죽어 없어진다 하더라도 정법이 세상에 드러나서 모든 창생이 도덕의 구원만 받는다면 조금도 여한이 없었다.
약속한 날이었다. 단도와 시계, 기도 도구를 행장에 꾸리고 9인 제자는 길을 나섰다. 머릿속에는 오직 대종사가 한지에 쓴 ‘사무여한’이라는 글자뿐이었다. 조금의 후회나 마음에 걸림이 있었다면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될 일이었다.
‘돌아오라’
귀를 거치지 않고 고막의 울림도 없이 머릿속 전체를 파동시키는 스승의 음성이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대종사는 ‘사무여한’을 쓰고 백지장(白指章)을 찍게 했던 종이를 들고 있었다. 분명 백지장(白指章)을 찍었는데 혈인(血印)이 어려 있었다. 9인 제자들의 선명한 혈인(血印)이었다.
“이것은 그대들의 일심에서 나온 증거이다. 그대들의 몸은 죽었고 그대들의 마음은 천지신명이 이미 감응하였으며 음부공사가 이제 판결이 났으니 우리의 성공은 이로부터라.”
구인선진은 정산 송규 종사, 일산 이재철 종사, 이산 이순순 종사, 삼산 김기천 종사, 사산 오창건 종사, 오산 박세철 종사, 육산 박동국 종사, 칠산 유건 종사, 팔산 김광선 종사이다.
오늘날 원불교가 100년의 짧은 역사에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4대 종단으로 인정받고 세계교화를 향해 힘차게 도약하고 있는 것은 원불교 교도의 가슴속에 창립정신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창립정신은 구인선진이 대종사와 함께 교단을 창립할 때 보여준 이소성대(以小成大, 작은 것으로 시작하여 큰 것을 이룬다), 일심합력, 무아봉공(無我奉公, 내가 없이 공익을 위한 정신),근검저축 정신을 말한다.
교단초창기에 구인선진이 대종사의 지도하에 저축조합, 방언공사, 혈인기도 등을 통해 보여준 창립정신은 원불교 창립의 원동력이며 원불교의 발전과 현재 모습의 근본이다. 구인선진의 창립정신은 모든 원불교인의 마음속 보배이며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할 표본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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