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정신없이 챙겨서 아이들 휴가를 보내고 집안에 들어서니 거실과 주방이 발 디딜 곳조차 없이 엉망이다. 그래도 피곤이 몰려와 잠깐 쉬었다 치우자고 밀쳐두고 방으로 들어가 누웠는데 일어나 보니 한나절이나 자버렸다. 부리나케 일어나 세탁기에 빨래 돌리고 청소하고, 주방 가득 널려있는 그릇들을 씻고 닦아서 제자리에 넣고서야 한숨을 돌렸다.
갑자기 어느 시인의 ‘커피 한 잔의 여유’라는 시가 생각났다. “하루를 견디기가 지루하고 힘이 들 때에는/커피 한잔 마시는 여유가 있다면/내일의 하늘은 코발트 빛 희망일 겁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들고 베란다에 서서 어둑해진 거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기억하기 싫은 일들일랑 말끔히 지워버리고 아름다운 추억만을 잔 속에 채워 내일을 살아가는 지혜로 만들어 보자.
마음을 가다듬는 순간 ‘엄마, 같이 못 와서 섭섭해요.’라는 문자가 왔다. ‘뭘, 나는 내일 옛 친구들 만나러 동창회에 가는데….’라는 문자를 보내고 싱긋 웃었다. 우리 고향 초등학교에서는 매년 8월 15일 전후해서 전국에 흩어진 회기별 동창들이 만나 그리움과 설렘을 안고 꼴짝 꼴짝 예약된 장소로 모여든다. 그래서 이때쯤이면 모두가 싱크 홀에 빠진 듯 그날만을 기다리다가 만나면 서로 끌어안고 모두가 옛날로 돌아간다.
올해에도 고향 친구들의 배려로 ‘땡양지’ 생태마을 펜션에 도착했다. 하늘은 맑고 산과 들엔 싱그러운 푸르름이 폭염과 가뭄에 지친 눈을 뜨고 있었다. 하지만 골짜기를 흐르는 물소리도 정겹고, 달디 단 공기도 우리를 환영했다. 친구들은 오는 대로 가볍게 포옹도 하고, 악수도 하며, 마주 보고 웃는 인사로 서로 반겼다. 총무가 새벽 내내, 청소하고 물을 받아 채웠다는 검정 그물망 밑의 풀장은 물이 가득 차 넘실대고, 식당에서는 맛있게 준비한 어머니 표 산채반찬을 안주삼아 술잔이 오가며 이야기꽃이 피었다.
소, 사슴, 돼지, 염소 철렵국까지 갖가지 안주와 폭주로 떠들썩했던, 젊은 날의 추억은 그리움으로 남고, 콩비지 찌개 안주가 제일이라며 이구동성으로 엄지 척하는 친구들이 정다웠다. 허리가 굽고 희어진 머리카락으로 나이 들어가는 친구들의 모습이 정겹다.
친구들이 하나둘, 별이 되어 떠나고, 어딘가 아파서, 체력이 달려서 올 수 없다는 친구들의 소식을 들으며, 어릴 때 앞니가 다 빠진 입으로 열심히 뜯던 옥수수의 빈자리를 떠올려본다.
지글지글 숯불에 익어가는 삼겹살의 고소함이 몇 점의 젓가락질로 느끼해지는 나이, 밤새워 마시던 소주와 막걸리도 적당히 조절하며 거절할 줄 아는 나이, 노래방 평상과 풀장과 산책길에서 끼리끼리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고, 정치 이야기, 사는 이야기에 열도 올리지만, 바람 빠진 풍선처럼 적당히 주저앉을 줄 아는 나이, 먹는 거는 줄이고 잠자리는 편해야 하는 나이다. 그래서일까? 동창회에 와서 처음으로 11시에 숙소에 들어 잠자리를 준비하며, 자연스럽게 변화되어가는 친구들의 건강한 정신에 작은 긍지를 느낀다.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활짝 열어놓으니, 새벽 찬바람에 이불을 서로 끌어당기며 힘자랑을 한 번 해보며 그 추억을 고향 선물로 가져가리라 기대해본다.
* 문진순 수필가는 ‘대한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했다. 영호남수필 사무국장, 대한문학 작가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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