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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본부장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본부장

매 년 반복되는 일이지만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 즈음이 되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생각이 밀려온다. 인류의 역사 자체가 생성과 소멸의 과정이다. 그렇게 수 천 년을 반복해온 일이지만 여전히 사라지는 것들은 아쉽고 슬프며, 새롭게 태어나는 것들은 벅차고 기쁘다. 우리는 매일 맞이하는 밤과 낮처럼 그 둘 사이에서 살아가지만, 문제는 그 둘의 균형이 흔들릴 때이다.

서울시 성북구 성신여자대학교 근처 골목에는 오래된 동네슈퍼가 있다. 정확하게는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지금은 물건을 팔지 않고 낡은 간판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무 간판에는 하얀색 페인트로 쓴 ‘봉다리슈퍼’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담겨 있다. 원룸이 많은 대학가 주변이라 장사가 될 법도 하지만, 10여 년 전 바로 옆에 편의점이 들어서면서 이 작은 가게는 판매 물품을 조금씩 줄이면서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몇 년 전 마지막 들렀을 때 팔고 있는 품목으로는 생수가 유일했다. ‘봉다리슈퍼’는 대형마트와 편의점으로 가득찬 도시에서 낡은 간판으로 마지막 호흡을 연명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동네의 작은 가게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도시의 공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인류 문명의 힘으로 세운 도시의 유효기간이 만료되면서, 다시 새롭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조금씩 다듬고 고쳐서 살아갈 것인가 하는 관점의 차이가 있다. 재건축과 재개발을 넘어 도시재생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등장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순간이고, 새롭게 조성된 매끄러운 편의공간에 금방 익숙해지고 만다.

자본의 특징은 ‘탐식’이다. 서울의 사례로만 보자면, 홍대에서 삼청동으로, 가로수길로, 서촌으로, 성수동으로, 끊임없이 먹이를 찾아 이동한다. 현재로서는 이 포식자를 근본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다. 그나마 희망을 걸 수 있는 곳이 ‘공공’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쉽지 않다. 정부나 지자체도 공공의 이름으로 ‘주인 행세’를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공공이나 개인의 소유 개념을 넘어 ‘공유’(commons) 개념의 확장을 통한 새로운 공간의 확장이다. 단계적으로 ‘공공의 공간’을 어떻게 ‘공유의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마을 혹은 동네라는 이름의 지역에서 주민과 예술가, 청년 등 다양한 주체들이 일상적으로 드나드는 공간의 경험을 막연하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공간’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편리하고 기분좋게 드나드는 공간일수록 자본이나 공공 등 소위 ‘주인’의 행세가 가장 적은 곳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난 가을 한 연출가와의 대화에서 “연극인들(예술가들)은 공간을 잃는 일에 익숙합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묘한 슬픔이 밀려왔다. 그는 공공의 공간에서 새로운 실험과 도전을 하면서 유의미한 성과를 내고 있지만, 정작 자신이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공간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의 말을 그대로 해석하면, 일종의 체념이자 현실에 대한 인정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공간을 잃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잃는 일’ 너머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원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 할 것입니다.’라는 태도가 있었다. 그 태도는 단순한 결심이나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축적으로 만들어낸 삶의 표현이었다.

시인 고정희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여백을 남긴다’ 중)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쇠락하고 사라지는 것들을 지켜볼 뿐이다. 그것은 참으로 쓸쓸한 일이다. 그렇지만, 시인이 노래하듯이, 사라지는 것들이 남긴 그 여백에서 새로운 탄생을 기대한다. 2019년 기해년(己亥年)에는 파괴와 죽음이 아니라 창조와 생명이 넘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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